군림천하 : 414화
제364장 기인귀호(奇人鬼狐)(2)
이북해의 말에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행적이 일치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는 하북성 형태(刑台)에서부터 함께 움직였는데, 첫 목적지가 바로 구궁보가 있는 구화산이었소. 명목은 모용봉의 생일연을 보기 위한 것이어서 이때만 해도 나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소.”
“……!”
“그런데 구궁보에서 진 장문인을 보고 난 후 그의 관심이 온통 진 장문인에게 집중되었소. 그가 내게 진 장문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몹시 당황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때부터 그는 진 장문인이 가는 곳을 뒤따라가기 시작했소.”
이어 이북해는 자신이 야율척과 함께 움직였던 지명을 차례로 밝혔다.
“제갈세가가 있는 호북성 융중을 거쳐 현악문을 지나 무당산을 지나 무당산의 우적지까지, 진 장문인이 크고 작은 싸움을 벌였던 모든 장소에 우리의 발길이 닿아 있었소.”
진산월은 이북해가 말했던 지명이 모두 자신이 강호 무림의 고수들과 커다란 싸움을 벌였던 곳임을 알아차렸다.
융중의 이름 모를 야산에서는 우내사마 중의 일인인 음양신마 복양수와 살 떨리는 결투를 벌였고, 무당산의 초입인 현악문에서는 무림구봉의 일인이며 강호제일의 암기고수였던 천수나타 당각과 그야말로 생사의 일전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우적지에서는 형산파의 육결검객인 고진과 두 문파의 운명을 건 승부를 벌였다.
그 싸움들은 하나같이 진산월이 강호에 출도한 이후 벌어진 것들 중 가장 거대하고 치열한 격전들이었다. 그 모든 싸움을 야율척이 지켜보았다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특히 진 장문인의 검정중원이라는 무공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소. 늘 진 장문인이 언제 검정중원을 펼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진 장문인은 단 한 번도 그 초식을 사용하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소.”
야율척이 검정중원에 관심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만 해도 그는 그 초식을 보기 위해 머뭇거리다 천살 궁해가 죽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북해의 말을 들으니 검정중원에 대한 야율척의 반응은 단순한 관심을 넘어 거의 집착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격한 것이었다.
대체 왜 야율척은 진산월의 검정중원을 보기 위해서 그리도 애를 썼단 말인가?
이북해 또한 그 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문아(文兒)에게 들으니 오늘도 그는 진 장문인의 검정중원을 보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고 하더구려. 참으로 기이한 일 아니오? 서장 무림의 제일고수이며 중원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가 하필이면 특정 초식 하나를 보려고 그렇게 애를 끓이고 있으니 말이오.”
이북해의 말을 듣고 있던 진산월의 뇌리에 문득 과거 구궁보의 후원에서 있었던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 진산월이 만난 사람은 구궁보의 주인인 모용단죽이었는데, 나중에야 진산월은 그가 진짜 모용단죽이 아니라 그로 변해 있는 조익현임을 알게 되었다.
당시 조익현은 야율척에 대해 평가하기를, 싸움에 관한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무공을 배우는 것보다 남을 상대하는 것에 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를 상대하려면 두 번의 기회는 없으며, 반드시 처음 붙은 상태에서 이겨야만 그에게 승리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무심히 들었던 그 말이 지금 갑자기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조익현은 야율척에 대해 당금 무림의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야율척은 중원 무림에는 서장의 절대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막상 그 정체나 성격 등 여러 가지가 신비에 쌓여 있어 실제로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그를 주시하며 그에 대해 작은 사항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이북해조차도 야율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단편적인 몇 가지뿐이었다.
진산월 또한 그동안 적지 않은 강호인들에게서 야율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야율척의 성격이나 무공에 대해 조금이나마 말해준 사람은 조익현이 유일했다.
과연 당시에 조익현이 했던 말은 사실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조익현은 대체 무슨 의도에서 야율척에 대해 진산월에게 그런 말을 해준 것일까?
이북해는 생각에 잠겨 있는 진산월을 향해 어느 때보다 진지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진 장문인의 검정중원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진 장문인은 가급적 그의 앞에서 검정중원을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떨까 싶소. 적어도 그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검정중원에 대해서 몇 가지 허점을 발견했으며, 그 허점을 보완할 때까지 검정중원을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고, 최근에 유운검봉을 완성한 이후에는 검정중원을 펼쳐야 할 정도의 위급한 상황은 거의 없을 거라는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밝히지 않았다.
이북해 또한 특별히 그의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 재차 말문을 이었다.
“그는 상당히 집요한 구석이 있지만, 반면에 사소한 일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의외의 허점을 노출하는 경우도 있소. 그가 진 장문인의 검정중원에 지나친 신경을 쓴다는 건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그의 허점을 노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보오.”
“이 대협은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신 모양이오.”
이북해는 진산월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몇 달 동안의 동행으로 정신은 많이 고달팠지만, 소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소.”
진산월은 흥미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 대협이 본 그는 어떤 인물이었소?”
진산월은 야율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몇 달간 함께 움직였던 이북해의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었다. 이북해는 누구나가 인정하다시피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었다. 자연히 사람을 보는 안목 또한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뛰어난 것일게 분명했다.
이북해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상당히 복잡한 인물이오. 자신이 잘 알거나 좋아하는 일에는 광(狂)적일 정도로 몰입하는데 비해, 그렇지 않은 일은 수수방관하는 경향이 있소. 성격은 침착하고 유들유들해서 좀처럼 화를 내거나 냉정을 잃는 법이 없지만, 의외로 자기 주장이 강해서 일단 결정한 일은 절대로 번복하거나 되돌리려 하지 않았소.”
진산월은 조용히 이북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직접 보았던 야율척과 이북해가 말하는 야율척을 머릿속으로 나란히 그려보면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좀 더 자세히 파악하고자 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도 자신만의 독특한 기준이 있는 것 같았소. 그 기준에 들어오는 자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워지지만, 그 기준을 벗어나는 자에게는 한없이 냉혹해지더군.”
“이 대협에게는 어떤 기준이 적용된 것 같소?”
다소 난감할 수도 있는 물음에도 이북해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평온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다행히 기준 안쪽에 들었던 모양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그를 만났을 때 내가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게 분명할 테니 말이오.”
“그가 이 대협을 한 눈에 알아보았단 말이오?”
이북해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거요. 내가 그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듯이.”
“이 대협의 얼굴이 본 모습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오?”
“내 외관이 어떻든 그가 나를 보자마자 내 정체를 알아차린 것은 분명한 것 같소.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세 가지 약조를 내걸면서까지 나와 동행을 하려 하지 않았을 거요.”
진산월은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세 가지 약조라면 무얼 말하는 거요?”
“첫째는 상대의 정체에 대해 묻거나 아는 척 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진산월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적대세력의 두 사람이 동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합당한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것과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더구나 자신이 의심하는 상대의 정체를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은 동행하는 동안 상대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거나 불리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두 번째는 무엇이오?”
“상대방이 말하기 싫어하는 것은 절대로 묻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이 또한 두 사람 사이에 원만한 동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진산월은 점점 흥미가 생겨 다시 물었다.
“세 번째 약조는 무엇이오?”
“중요한 일을 물을 때는 반드시 대가를 주고받아야 하며, 그 사안의 중요도는 대답을 하는 자가 결정한다는 것이오.”
진산월은 세 번째 약조가 언뜻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가를 주고받는 다는 건 무슨 의미요?”
“말 그대로요. 내가 그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을 때는 그 질문의 가치에 해당하는 정보를 그에게 제공하여야 하고, 반대의 경우도 또한 마찬가지라는 뜻이오.”
진산월은 이해했다는 듯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아! 그렇다면 사안의 중요도를 대답하는 자가 결정한다는 건 제공받는 정보의 가치 또한 대답하는 자가 판단한다는 말이겠구려.”
“그렇소. 내가 보기에는 대단치 않은 질문이라 할지라도 그가 그 질문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면 나 또한 그에 합당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오. 반대로 내가 제공하는 정보가 아무리 높은 가치를 지녔더라도 그가 판단하기에 질문의 대가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가 만족할만한 또 다른 정보를 제공해야 하오.”
진산월은 단순한 듯 보이는 그 약조 속에 포함된 의미를 알게 되자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뜻 듣기에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질문을 하는 쪽에서는 상대의 반응을 보고 자신이 무심코 던진 질문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임을 알 수 있기에 상당히 공정한 규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던진 질문이 사실은 상대에게는 별로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될 수도 있었다.
진산월은 그러한 규칙을 제시한 야율척이란 인물에 대해 다시 한 번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북해와 동행하기 전에 제시했다는 세 가지 조건만 살펴보아도 야율척이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이며,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북해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 세 번째 약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상당한 제약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소. 그중에는 진 장문인도 꼭 알아야 할 것들이 있어서 급히 만나려 했던 것이오.”
그렇지 않아도 진산월은 이북해가 늦은 밤에 사전 통지도 없이 자신을 불쑥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기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말씀하시오. 경청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