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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422화


367장 구원회래(久遠回來)(1)

적화승은 여전히 살기등등한 모습인 데 반해, 도인수는 흠칫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옥면신권?”

낙일방이 그를 힐끗 쳐다보며 어깨를 쭉 폈다.

“바로 나요.”

옥면신권은 요즘 신검무적과 함께 강호 무림에서 최고의 성가를 올리고 있는 신진 고수였다. 그는 권법에 관한 한 누구나가 인정하는 젊은 층 중의 최고 고수로, 무당산에서 벌어진 악산대전에서는 무림구봉 중의 일인인 지봉 용선생과 백중지세의 혈전을 벌여 무림을 그야말로 경동(驚動)시켰다. 그래서 그를 천하제일의 후기지수(後起之秀)라고 부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나 도인수가 놀란 것은 단순히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 옥면신권은 무당산에서 악산대전이 끝난 후 종남파로 돌아오고 있다고 했다. 그런 그가 홀연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악산대전에 참여했다가 귀환한 종남파의 고수들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도인수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 전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중노인을 향했다.

중노인은 얼굴에서 한 장의 얇은 가죽을 벗겨낸 후 굽혔던 허리를 반듯이 폈다.

우두둑!

뼈마디 맞춰지는 음향과 함께 그다지 크지 않았던 그의 몸이 훨씬 커지며 왜소했던 체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뿐 아니라 주름이 가득했던 얼굴이 혈색 좋은 중년의 모습으로 변했고, 흐릿했던 안광 대신 정기가 가득 찬 눈이 되어 있었다.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은 도인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인사를 했다.

“나는 성락중이란 사람이오. 종남파에 몸을 담고 있소.”

도인수의 입에서 신음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영검군…….”

도인수는 그와 몇 수 겨루지는 않았지만 그가 자신에 못지않은 고수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는 본인의 장기인 검은 아예 뽑아 들지도 않고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자신을 상대했던 것이다.

맨손으로도 비등하게 싸웠는데 그의 손에 검이 쥐어진다면 결과가 어떻겠는가?

도인수의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성락중은 노해광에게서 장검 하나를 건네받았다. 검을 손에 든 그는 조금 전의 비쩍 마르고 추레한 중노인이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해 보였고, 추상같은 위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무영검군 성락중은 종남파의 장문인인 신검무적의 사숙으로, 남궁검문과의 비무에서 남궁검문의 최고 고수인 남궁연을 꺾으면서 처음으로 강호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후로 거듭되는 고수들과의 결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면서 급속도로 명성을 쌓아 올리더니 결국 무당산에서 벌어진 악산대전에서 형산파의 오결검객 중 한 사람이자 전설적인 검객인 비응검 사공표마저 격파하여 강호 무림에 그 신위를 널리 떨쳤다.

당금 무림의 누구나가 인정해 마지않는 절정 검객을 마주하게 되니 아무리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고 담대한 도인수라 할지라도 가슴 한구석에 불안감이 치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제길. 노해광 주변에는 절정고수가 없다는 말만 믿고 있었는데, 이놈들이 벌써 돌아왔을 줄이야. 그런데 어떻게 장안에 소문조차 퍼지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구나.’

도인수가 의문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악산대전 이후 종남파 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모든 무림인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악산대전에서 승리한 후 몸을 추스른 종남파의 고수들이 무당산을 떠나 종남산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소문은 적어도 무림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넓게 퍼져 있었다.

섬서성은 물론이고 서안의 모든 사람들도 언제 그들이 종남파로 돌아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회람연에서 화산파와의 충돌 이후 종남파의 본산에서 벌어진 습격 사건 때문에 그들이 종남파로 돌아오면 서안에 다시 한바탕 거센 폭풍이 몰아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며칠간 서안의 어디에서도 그들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노해광을 제거하려고 함정을 준비하던 도인수도 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도인수는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이틀만 더 일찍 계획을 진행했어도 어쩌면 오늘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되었을지 몰랐다. 왜냐하면 성락중을 비롯한, 악산대전에 참여했던 종남파의 고수들이 종남산으로 돌아온 것은 바로 이틀 전의 늦은 저녁이었기 때문이다.

* * *

붉게 물들었던 석양마저 서편 너머로 사라지고 주위가 조금씩 어둠에 잠길 무렵, 종남산의 깊은 산자락에 위치한 종남파의 산문 입구에 몇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중년과 청년 그리고 어린 소년이 뒤섞인 그 무리는 산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 관문과 그 너머로 아련하게 보이는 전각의 처마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왔구나.”

누군가의 감격에 찬 외침이 아니더라도 산문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격한 흥분과 설렘의 빛이 넘실거리고 있어 지금 그들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애꾸의 중년인이 우두커니 서 있는 청년의 옆구리를 툭 치자 청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제가 먼저 가서 알리겠습니다. 우리 왔어요. 우리가 돌아왔다고요!”

청년의 외침이 고요한 산속의 저녁을 송두리째 깨워 놓고 있었다.

잠시 후 소란스러운 움직임과 함께 몇 명의 인물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인물은 풍만한 몸매의 여인이었는데, 산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낙 사형!”

그녀는 사람들 중 준수한 용모의 백의 청년에게 달려가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백의 청년은 자신에게 달려든 그녀의 등을 어설프게 두드리며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이내 그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매, 잘 있었어? 본 파는 별일 없지?”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끌어안은 채 그의 건장한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대고 있었다.

백의 청년은 성숙한 여인의 체취에 잠시 어색한 빛을 띠었으나, 자신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자 흠칫 놀라 황급히 그녀를 떼어 냈다. 여인의 배꽃 같은 두 뺨이 눈물로 젖어 있는 것을 본 백의 청년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방 사매, 본 파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모두 무사한 거지? 소 사형은? 소 사형은 어디에……?”

백의 청년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두서없는 말을 내뱉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오며 진중한 음성을 내뱉었다.

“고수가 되면서 침착해진 줄 알았더니 성급한 건 여전하구나.”

“소 사형!”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백의 청년이 반색을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 잘생기지는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듬직하고 사내다운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오자 백의 청년은 황급히 다가가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사내, 소지산은 자신을 끌어안은 낙일방의 어깨를 두드리다가 문득 그의 체구가 몹시 건장해지고 가슴이 단단해진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팔과 가슴이 살짝 닿았음에도 그의 몸이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강인해진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소지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의 몸에 크고 작은 흉터가 적지 않게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는 그 잘생긴 얼굴에도 몇 개의 작은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낙일방은 자신의 몸에 난 상처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오히려 소지산이 다친 곳은 없는지 그의 몸을 훑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모습에 소지산은 어리고 미숙하기만 했던 낙일방이 어느새 강호에 위명을 날리는 절정의 고수가 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달았다.

‘녀석, 이제는 당당한 한 사람의 무인이 되었구나.’

소지산은 듬직하다는 눈으로 낙일방을 보고 있다가 이내 한쪽에 서 있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성락중 사숙이시군요. 본산의 이십일 대 제자 소지산이 사숙을 뵙습니다.”

성락중은 소지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가 바로 본산을 수호하고 있다는 대해검 소지산이로군. 본산을 지키느라 수고가 많았네.”

“별말씀을, 저야말로 강호 무림에 본 파의 명성을 떨치고 돌아오신 사숙께 진심으로 감사와 노고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나누도록 하세. 사부님을 뵙고 싶네만, 사부님은 어디에 계신가?”

소지산은 성락중이 전풍개를 찾고 있음을 알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태화각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네는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게. 태화각이라면 내가 위치를 알고 있으니 나 혼자 가 보도록 하겠네.”

성락중은 사부인 전풍개를 만날 생각에 마음이 급한지 소지산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는 이내 몸을 움직였다. 표표히 신형을 띄워 허공을 날아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한 마리의 비학(飛鶴)을 보는 듯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감탄 어린 눈으로 멀어지는 성락중을 보고 있던 소지산은 문득 고개를 돌려 한 사람을 찾았다.

외눈의 장한이 그와 시선을 마주치자 급히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소 사숙,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소지산은 자신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동중산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고생이 많았네. 자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일세.”

“제가 고생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보다는 장문인과 두 분 사숙 그리고 성 사숙조께서 힘들고 어려운 일은 모두 맡으셨습니다.”

소지산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장문 사형과 전 사제가 안 보이는군. 그리고 사저도 함께 오시는 줄 알았는데……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동중산의 얼굴에 한 줄기 어두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일을 얘기하자면 사연이 제법 깁니다. 그보다 본 파에 변고가 있었던 듯한데…….”

소지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서로 간에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군. 들어가서 차분히 말해 보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소지산은 다시 한차례 동중산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비로소 유소응과 손풍에게 다가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무사 귀환을 축하해 주었다.

군림천하 (901)

그날 밤, 소지산은 낙일방과 동중산을 불러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소지산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중 몇 번이나 표정이 변하긴 했지만, 소지산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질문을 던지거나 말을 가로막지 않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소지산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한동안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낙일방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두 사형의 위패를 보고 싶습니다.”

“같이 가자.”

소지산이 일어나자 동중산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장례식이 끝난 지 며칠이나 지났기에 여기저기 널려 있던 만장도 치워지고 위패를 올려놓았던 단상도 조촐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낙일방의 시선은 작은 단상 위에 놓인 십여 개의 위패들 중 하나에 못 박히듯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두기춘 신위’라고 쓰인 글자 외에는 여느 위패와 구분할 수 없는 작고 평범한 위패였다.

낙일방은 한참이나 그 위패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두 사형과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었어요. 항상 나를 혼내거나 비아냥거리기 일쑤였죠.”

소지산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두 사형이 나를 정말 싫어하나 보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때의 나는 실수투성이에 성질도 급하고 단점이 많은 엉성한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매번 혼나고 야단을 맞다 보니 적지 않은 반발심도 생겼죠.”

낙일방의 시선은 여전히 위패를 향해 있었지만, 그의 눈은 위패가 아닌 텅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따라 몸 상태도 나쁘고 기분도 좋지 못해서 하루 쉬고 싶었지만 두 사형이 지시해서 사부님의 거처인 태평각을 청소해야 했어요. 그런데 청소를 하다가 그만 실수로 사부님이 아끼시는 화병을 깨뜨리고 말았죠.”

소지산이 짤막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대나무와 기러기 한 쌍이 그려져 있는 화병이었지.”

“사형도 기억하시는군요. 돌아가신 사모와 결혼할 때 선물로 받은 화병이라서 사부님이 유독 아끼시던 거였죠. 아무튼 화병이 깨지는 소리에 놀란 두 사형이 달려와 그 광경을 보고는 엄청나게 화를 냈어요.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제 방으로 돌아가 방구석에 주저앉았어요. 사부님이 돌아오셔서 화병이 깨어진 것을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걱정도 되었고, 호된 꾸짖음을 당할 게 두렵기도 해서 구석에서 달달 떨고만 있었죠.”

“…….”

“그런데 그날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사부님이 제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거였어요. 화를 내거나 꾸짖기는커녕 화병이 부서진 거에 대한 말씀이 전혀 없으신 겁니다. 저는 사부님이 워낙 성격이 좋은 분이라 그냥 넘어갔나 보다 하고 혼자 속으로 희희낙락했죠. 다만 그날 두 사형이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고 절뚝거리는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두 사형이 그날 사부님께 혹독한 벌을 받아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끙끙 앓았다는 걸 알게 되었죠. 두 사형이 사부님께 왜 그런 벌을 받게 되었는지 안 것은 또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어요.”

낙일방은 담담한 눈으로 소지산을 돌아보았다.

“소 사형은 그때 두 사형이 왜 사부님께 벌을 받았는지 알고 계시죠?”

소지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낙일방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나중에야 나는 사저에게서 두 사형이 사부님께 자신의 실수로 화병을 깼다고 말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 때문에 사부님께 벌까지 받게 되었는데도 두 사형은 내게는 일언반구도 그 일을 내색하지 않았죠. 나는 그때 두 사형이 왜 나를 감싸주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몇 번이나 두 사형에게 직접 물어볼까 고민하기도 했는데,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시간이 지나버리고 말았죠. 그러다 사부님이 돌아가시고 두 사형이 본 파를 떠나버려서 물어볼 상황이 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이유를 물어볼 기회조차 영원히 없어져 버렸군요.”

그 말을 할 때 낙일방의 얼굴에는 한 줄기 씁쓸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소지산은 낙일방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화병을 깬 날, 기춘은 무척 성이 나서 나를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네가 실수투성이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하다 하다 사부님이 아끼는 화병마저 깨었다며 너를 어떻게 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지. 그때 우연히 옆에 있던 사저가 그의 얘기를 듣고는 말하더구나. ‘오늘이 일방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날이야. 일방은 타향을 떠도느라 제대로 제사도 차려드리지 못하는 걸 늘 아쉬워하고 있었지. 아마도 그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워 실수를 한 모양이니 두 사제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라고 말이지.”

이번에는 낙일방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소지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기춘은 사저의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진 채 더 이상 네 욕을 하지 않았다. 너도 알겠지만 기춘도 누구 못지않은 효자였고, 그 몇 년 전에 어머님을 여의었지. 그래서 아마 그날 일을 자신이 한 거라고 사부님께 고한 것일 게다. 그 녀석 나름의 방식으로 너에게 사과를 한 거지. 어머님의 제삿날인 줄 모르고 너에게 일을 시킨 자신의 실수를 말이다.”

낙일방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한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참으로 복잡해서 누구도 그의 현재 심정이 어떠한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낙일방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두 사형은 왜 그런 일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쑥스러웠겠지. 기춘은 사실 소심한 구석이 많은 녀석이었다.”

“샘이 많은 건 아니고요?”

“샘도 많고 욕심도 많았지. 그래서 자기보다 잘난 구석이 있는 사람에게 늘 질투를 느끼고 경쟁심을 가지기도 했지. 하지만 그래도 좋은 녀석이었다. 단점투성이의 인간이었지만,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었지.”

낙일방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처럼 말이군요.”

소지산의 고개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살짝 끄덕여졌다.

“그래, 너처럼.”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낙일방은 두기춘의 위패에 정성을 다해 향을 올리고 절을 했다.

동중산도 조용히 그를 따라 조문을 올렸다.

사실 동중산은 두기춘을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종남파에 입문했을 때는 이미 두기춘이 종남파를 떠나 화산파에 몸을 담고 있었고, 그가 초가보에 쫓기던 시절에 두기춘은 화산파의 집법이었던 신산 곡수의 밑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두기춘에 대한 소문은 귀동냥을 해서 적지 않게 알고 있었다.

인물이 준수하고, 무공에 대한 재질도 뛰어나서 어느 문파에 있어도 능히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좋은 인재라는 평이 많았다. 하나 장문인인 진산월에게 갈 영약을 훔치고 문파를 등진 것으로 인해 종남파에서는 기사멸조의 대역죄인이 되어 있었고, 화산파에서도 뚜렷한 지지자나 후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신세였다.

종남파와 화산파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끊임없이 흔들리던 두기춘이 마지막 순간에 종남파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불태웠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해야 할까?

종남파의 배반자였던 두기춘은 결국 종남파로 돌아와 최후를 맞았으며, 많은 종남파 제자들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새겨 놓았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이 되었지만, 동중산은 두기춘의 영혼이 지하에서나마 제대로 뿌리를 내려 그토록 바라던 평온과 안정을 되찾기를 진심으로 염원했다.

두기춘에 대한 조문을 마친 낙일방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숙연해졌다.

“매 사형은 어떻습니까?”

소지산의 얼굴도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그다지 좋지 않다. 아직도 제대로 운신(運身)하지 못하고 있다.”

“제갈 대협이 계시는데도 말입니까?”

“제갈 대협 덕에 그나마 숨이 붙어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낙일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부상이 지독했단 말이군요. 제갈 대협께선 뭐라고 하십니까?”

“치명적인 상태는 넘겼다고 하셨다. 제갈 대협의 말씀에 따르면 앞으로도 적어도 이틀은 꼼짝도 않고 누워 있어야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매 사형 성격은 여전하시죠?”

소지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과 변함이 없지.”

“그렇다면 쉽지 않은 일이겠군요. 매 사형 성격에 침대에 며칠씩 누워 있는 건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욱 참기 힘든 일일 테니 말입니다.”

소지산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제갈 대협께서 역정이 보통이 아니시다.”

“매 사형을 보고 싶군요. 지금 가도 되겠습니까?”

“오늘은 늦었고, 내일 아침 묘시(卯時)경에 가도록 하자. 그때쯤에 제갈 대협께서 오전 진료를 하시니 말이다.”

“잘되었군요. 어차피 제갈 대협도 찾아뵈려 했는데, 그때 인사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소지산이 왠지 말을 멈추었다.

소지산은 그다지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지만, 할 말을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이런 모습은 다소 생경하면서도 낙일방의 가슴에 한 줄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소 사형.”

낙일방의 듬직한 말에 소지산은 마음을 결정한 듯 입을 열었다.

“먼 길을 달려온 너에게 바로 부탁을 해서 미안하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한 가지 있다.”

“무엇입니까?”

“본산의 습격을 뒤에서 조종한 검단현의 행방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낙일방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섬광이 피어올랐다.

“검단현!”

“그자가 장안에 몸을 숨긴 것은 분명한데, 정확한 행방을 몰라 노 사숙께서 고민하고 계시다. 그자의 배후에 심상치 않은 인물이 있는 듯한데, 그동안은 본산의 일 때문에 노 사숙을 도와주고 싶어도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네가 힘을 좀 써야 할 것 같구나.”

낙일방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두 사형의 영혼을 위로할 방법을 몰라 안타까웠습니다. 두 사형을 농락하고 본산을 더럽힌 그자의 수급이라면 두 사형의 넋을 위로할 좋은 제물이 되겠군요.”

“마침 성 사숙께서도 오랜만에 노 사숙을 뵈러 장안으로 내려가실 생각인 듯하니, 내일 아침 매 사형을 뵙고 나서 성 사숙을 모시고 노 사숙께 가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누구도 본 파를 능멸하지 못하도록 이번 기회에 모든 일을 확실히 매듭짓고 돌아오겠습니다.”

굳건한 얼굴로 다부진 음성을 토해내는 낙일방의 전신에서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당당한 기세가 흘러나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을 보는 것 같았다.

소지산은 한층 성숙해진 낙일방의 모습이 너무도 믿음직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조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다음 날, 성락중과 함께 노해광을 찾아온 낙일방은 노해광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듯 가슴이 든든해진 노해광이 검단현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다음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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