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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423화


368장 신권무쌍(神拳無雙)

적화승은 자신의 앞에 철탑처럼 우뚝 서 있는 낙일방의 모습이 몹시 거슬리는지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성격적으로 포악하고 살심이 강한 적화승으로서는 자신을 앞에 두고도 겁을 먹기는커녕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낙일방이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낙일방이라. 요즘 강호에 계집애같이 이쁘장하게 생기고 제법 매서운 주먹을 휘두르는 꼬맹이가 등장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하지. 그게 바로 너냐?”

적화승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말하는 기세나 음성에 진득한 살기가 가득 묻어 있어 마치 한 마리의 난폭한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낙일방은 상대의 사나운 기세를 눈앞에서 직접 접하고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얼굴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관옥과도 같은 준수한 얼굴에 자신에 찬 미소가 어른거리자 그야말로 보는 이의 마음까지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한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임풍옥수(臨風玉樹)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내 얼굴이야 부모님께 타고난 것이니 어쩔 수 없고, 덩치는 아무리 봐도 내가 더 크니 꼬맹이 소리는 당신이 들어야 할 것 같소. 그리고 내 주먹이 얼마나 매서운지는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될 거요.”

낙일방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자신의 말을 그대로 반박하자 적화승은 어이가 없는 듯 한동안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 이내 그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어리더니 무시무시한 살광이 흘러나왔다.

“건방진 애송이 놈이 쥐꼬리만 한 명성을 얻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장내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적화승의 몸은 허공을 날아 낙일방의 코앞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아서 중인의 눈에는 낙일방의 앞가슴이 붉은 기운에 휩싸인 적화승의 오른손에 그대로 가격당하고 말 것처럼 보였다.

쾅!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거센 기운이 휘몰아쳐 대청 안의 기물들이 사방으로 부서져 나갔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든 적화승이 후려친 오른손은 낙일방이 내민 손바닥과 격렬하게 부딪쳤다. 뒤이어 낙일방의 손이 빙글 회전하여 적화승의 손목을 타고 팔뚝으로 올라가며 가볍게 요동쳤다.

적화승 또한 조금 전의 격돌로 낙일방의 무공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자신의 팔뚝을 타고 오르는 낙일방의 손을 거세게 떨치며 왼손을 갈고리처럼 오므려 낙일방의 목덜미를 찍어 갔다.

허공으로 튕겨진 낙일방의 오른손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적화승의 왼손 손등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적화승은 왼손을 빠르게 거두어들이며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낙일방의 관자놀이를 후려쳐 갔다. 낙일방은 피하지 않고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보호하며 오른팔을 구부려 적화승의 뺨을 향해 팔뚝을 휘둘렀다.

두 고수가 바짝 붙은 채 맹렬하게 서로의 몸을 향해 가차 없는 살수를 쓰는 광경은 주위의 모든 이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졌고, 단숨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을 듯한 무시무시한 수법들이 거푸 펼쳐졌다. 그들의 박투(搏鬪)는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없어 둘 중 한 사람이 당장 피를 토하고 쓰러져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뒤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서로를 향해 맹렬한 살수를 전개하고 있는 두 사람을 정신없이 보고 있던 도인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성락중이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저들이 싸우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구려. 우리도 못다 한 승부를 다시 해 봅시다.”

검을 손에 쥔 성락중의 몸에서는 말로 형용키 어려운 가공할 기세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인수는 더 이상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웃었다.

“크흐흐! 좋소.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몸을 풀다 말아서 영 기분이 개운하지 못했소. 오늘 원 없이 어울려 봅시다!”

그리고 품속으로 손을 넣어 하나의 기이한 병기를 꺼내 들었다.

가느다란 쇠사슬로 이루어진 그 병기는 양쪽에 각기 갈고리와 낫 모양의 칼날이 달려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색혼겸(索魂鎌)이라는 것으로, 도인수가 절체절명의 순간에만 사용하는 기문병기였다. 색혼겸의 중심을 이루는 쇠사슬은 두께가 얇고 가늘었으나 질기기가 이를 데 없는 인현철삭(引玄鐵索)이라는 것이었고, 양쪽에 달린 갈고리와 낫 모양의 칼날 또한 한철(寒鐵)로 만들어져서 강철기둥조차도 잘라버리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도인수는 맨손으로는 성락중의 검을 당해낼 자신이 없어서 비장의 병기를 꺼내 든 것이다.

색혼겸을 양손에 감아쥔 도인수의 얼굴은 강한 자신감과 진득한 살기가 어우러져 조금 전과는 달리 패기만만해 보였다.

선공을 한 사람은 성락중이었다.

성락중의 손에 들린 장검이 허공을 미끄러지듯 움직여 도인수의 앞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별다른 소리도 없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검의 모습이 어찌나 유연하고 부드러웠던지 도인수는 자신도 모르게 경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정말 멋진 검법이로구나!”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도인수는 수중의 색혼겸을 맹렬하게 앞으로 내던졌다.

색혼겸의 끝에 매달린 갈고리가 검봉을 향해 날아들었다. 막 갈고리와 검봉이 부딪치려는 순간, 검이 아래로 뚝 떨어져 내리며 기이한 호선을 그렸다.

그 호선의 끝에 도인수의 손목이 걸렸다.

도인수는 색혼겸으로 성락중의 검을 봉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성락중의 검이 너무도 수월하게 색혼겸을 피해 자신의 손목을 향해 날아들자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듯 크게 놀라고 말았다.

“으앗!”

그는 입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비명을 토해내며 왼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따땅!

색혼겸의 갈고리 반대편에 달려 있던 낫 모양의 칼날이 무섭게 회전하며 간신히 성락중의 검을 튕겨냈다. 하나 도인수의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칼날에 부딪혀 허공으로 튕겨진 성락중의 검이 빙글 회전하며 더욱 빠르게 날아들었던 것이다.

도인수는 양쪽 어깨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이 마치 허깨비처럼 옆으로 반 장쯤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상체만을 이용해 움직이는 이 보법은 마귀현현(魔鬼顯現)이라는 것으로, 소마 신지림의 절학인 마귀보(魔鬼步)의 한 초식이었다.

마도의 독보적인 절학인 마귀보를 펼쳤음에도 도인수는 아직 성락중의 검세에서 완전히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성락중의 검은 집요하게 도인수를 따라붙고 있었다.

‘정말 지독하구나!’

도인수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성락중의 검을 향해 뛰어들며 양손을 질풍처럼 움직였다.

우우웅!

마치 벌 떼가 몰려오는 듯한 음향과 함께 색혼겸이 무섭게 회전하며 거대한 두 개의 원반 모양의 경기를 만들어냈다.

색혼겸의 양쪽에 달려 있는 갈고리와 낫 모양의 칼이 만들어낸 두 개의 원반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성락중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좋은 수법!”

성락중은 짤막한 감탄성을 발하며 수중의 장검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오른쪽 원반의 한가운데를 찔러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정확했던지 비슷한 거리에서 있던 왼쪽의 원반이 채 절반도 다가오기도 전에 성락중의 검은 원반의 중앙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원반의 한가운데를 꿰뚫은 성락중의 검이 그 상태로 왼쪽으로 움직였다.

도인수는 황급히 오른쪽 원반을 멈추며 왼쪽 원반을 피하려 했으나 그가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오른쪽 원반과 함께 빠르게 이동한 성락중의 검이 왼쪽 원반과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따땅!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강렬한 마찰음과 함께 한 사람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으음!”

도인수는 양손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세 걸음이나 물러서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양손은 손바닥이 찢어져 질펀한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색혼겸을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수법 중 하나인 천지쌍벽(天地雙璧)을 펼쳤음에도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본 것을 깨달은 도인수의 얼굴이 다음 순간에 핼쑥하게 변하고 말았다.

고개를 쳐든 그의 코앞으로 하나의 검이 날아들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도인수는 사력을 다해 바닥을 굴러 목구멍이 검에 관통당하는 참변을 피했다.

도인수가 자신의 장기인 색혼겸을 쓰고도 거듭되는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낙일방과 적화승의 싸움도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적화승의 무공은 소문삼살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고, 특히 양손과 두 팔, 두 다리를 이용한 맨손 격투 실력은 사부인 신지림에게도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에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낙일방이 권법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슴없이 접근전을 벌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과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의 박투는 그가 유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칠고 살벌한 외모와는 달리 적화승은 상당히 치밀하고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낙일방이 등장했을 때부터 그는 어떻게 상대를 요리해야 할지 끊임없이 계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살심이 들끓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굴렸고,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일부러 낙일방을 자극하고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달려든 행동에는 그런 그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맹렬하게 맞붙었던 두 사람의 격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적화승이 조금씩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지금같이 서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의 격투는 순발력과 기술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풍부한 대적(對敵) 경험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 면에서 적화승은 낙일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낙일방 또한 주먹으로는 당대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상대와의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자신이 가진 강맹한 권법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적화승은 강력한 손가락 무공인 탈명조와 손목을 이용한 표응투(豹鷹鬪), 팔꿈치를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관철주(貫鐵肘)와 양다리를 쓰는 탈성퇴(奪星腿), 가공할 위력의 무릎 공격인 파천슬(破天膝),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기이한 맨손 무공 중 하나인 당랑벽(螳螂劈) 등의 육대무예를 완성한 상태였다.

소마 신지림이 창안한 이 육대무예는 순전히 맨손 격투를 위한 무공들이어서, 지금과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의 싸움에서는 천하의 어떤 절학보다도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낙일방은 장괘장권구식은 물론 천둔장법과 유운비수, 구반장법 등 종남파의 절학은 물론이고, 진산월이 육천기를 통해 입수한 취선 하종의의 비학인 취공대산수와 용수각 등 자신이 아는 대부분의 무공을 펼쳐 적화승에 맞서고 있었다. 그가 펼치는 무공들의 위력은 능히 적화승의 육대무예에 뒤지지 않는 것이었으나, 아쉽게도 상황은 백중지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낙일방의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적화승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낙일방이 자신의 무공 중 가장 위력이 강한 태인장과 낙뢰신권 등 몇몇 절학들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태인장은 물론이고 낙뢰신권과 옥잠지는 제각각 펼치는 데 일정 거리 이상의 공간이 필요한데, 적화승이 워낙 바짝 붙어 있어서 지금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적화승의 내공이나 체력이 낙일방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낙일방은 거리를 떼고 싶었으나, 적화승의 노련한 솜씨가 그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낙일방 또한 불쑥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좋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상태로 이겨내고야 말겠다.’

낙일방은 섣불리 거리를 벌릴 생각을 접고 지금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군림천하 (903)

일단 그렇게 결심하자 약간은 격앙되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한결 차분해졌다. 그에 따라 조금 전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적화승의 공격이 굉장히 체계적이고 규칙적이어서 일종의 연환식(連環式)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두서가 없고 즉흥적으로 양팔과 다리를 마구 휘두르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그 속에 일정한 규칙과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양팔과 양다리의 공격 다음에는 반드시 손목과 팔꿈치를 이용한 수법이 이어지고, 두 번 혹은 세 번에 한 번씩 손가락 무공이나 어깨 혹은 몸통 전체를 무기로 하는 공격이 뒤섞여서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어깨나 몸통을 이용한 변칙 공격은 여타의 고수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어서 그때마다 낙일방은 당혹스러운 상황에 빠지고는 했다.

방금도 낙일방은 막 적화승의 방비를 뚫고 그의 우측으로 바짝 접근하려던 찰나에 턱 밑에서 위로 불쑥 솟구쳐 올라온 적화승의 어깨에 하마터면 아래턱을 가격당할 뻔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황급히 손을 거두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에 한 줄기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눈의 사각(死角)지대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온 어깨 공격은 예측하기도 어렵고 방비하기는 더욱 어려워서 맨손 격투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낙일방으로서도 일시지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특히 가끔씩 펼쳐지는 어깨를 이용한 공격과 몸통으로 들이받듯 거칠게 치고 들어오는 수법은 대처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낙일방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도 비슷한 방식의 공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상황 이전에도 낙일방은 구반장법 중의 절초인 우랑장의와 천손직금, 금슬상화의 연환삼수로 적화승의 강력한 수비를 뚫고 들어갔기에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활짝 열린 적화승의 앞가슴을 향해 주먹을 강하게 내뻗기만 해도 무난히 승리를 거둘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막 앞으로 돌진해 들어가려던 낙일방은 황급히 손을 멈추고 오히려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피해야 했다.

휘잉!

그 순간 한차례 회오리가 방금까지 낙일방이 달려들던 공간을 휩쓸고 지나갔다. 낙일방이 계속 앞으로 움직였다면 그 회오리에 그대로 몸이 강타당했을 게 분명했다. 낙일방을 향해 서 있던 적화승의 몸이 어느새 반 바퀴 회전하며 반대쪽 어깨가 그 공간을 쓸어버린 것이다.

팔을 내뻗으면 팔꿈치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단순히 몸을 반으로 회전하는 것만으로 그러한 위력을 보여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선회해 들어오는 어깨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팔이나 다리와는 전혀 다른 동선을 타고 있어서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낙일방은 적화승의 맨손 무예의 조예가 자신의 예상보다 뛰어난 것에 경각심을 가지기는 했으나, 그 외에 별다른 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다시 비슷한 상황을 겪고 나니 언뜻 무질서하고 난폭하게만 보이는 적화승의 공격에 나름의 묘한 규칙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특이한 자세의 공격을 할 때 적화승의 몸이 움직이는 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빨라서 자칫 어설프게 뒤로 물러나거나 무작정 거리를 벌리려 했다가는 치명적인 허점을 노출시킬 가능성이 농후했다.

낙일방은 적화승과 맹렬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계속 머릿속으로는 그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추측이 맞았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곧바로 찾아왔다.

허리 아래에서 무섭게 솟구쳐 오르는 적화승의 무릎 공격을 왼쪽 팔꿈치를 내려 방어한 낙일방이 오른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파파팍!

수십 개의 수영(手影)이 어지럽게 피어오르며 적화승의 눈을 어지럽혔다. 적화승은 왼손을 쳐들어 수영을 막으면서도 실눈을 떠서 그 수영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영 사이로 하나의 섬광이 번뜩이며 그의 미간을 향해 폭사해 왔다.

천둔장법 중의 운둔섬뢰(雲遁纖雷)라는 초식인데, 현란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손그림자 아래 폭발하듯 날카로운 경기를 숨기고 있어서 자칫 손그림자에 정신을 팔렸다가는 영문도 모르는 채 머리에 피구멍이 나기 일쑤인 무서운 수법이었다.

적화승은 누구보다 풍부한 대적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수영을 보는 순간 단번에 그 수영 속에 무서운 살수가 숨어 있음을 직감하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섬광이 번뜩이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머리를 비롯한 상반신을 옆으로 기울이며 오른발을 세차게 내질렀다.

낙일방의 은둔섬뢰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며 오히려 적화승의 탈성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적화승의 상반신이 바닥에 닿을 듯 기울어져 있기에 낙일방의 눈에는 노리고 있던 적화승의 상체가 갑자기 사라지며 엉뚱한 각도에서 발길질이 다가오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낙일방은 피하지 않고 왼쪽 팔뚝으로 적화승의 발을 막았다.

퍼억!

팔뚝과 발길질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낙일방은 팔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도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오히려 눈을 부릅뜨며 빗자루로 바닥을 쓸 듯 오른발을 옆으로 휘둘렀다.

상체를 바닥에 뉘었던 적화승은 낙일방의 바닥을 쓸어오는 일소퇴(一掃腿)에 움찔 놀라며 황급히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덕분에 낙일방의 오른발에 얼굴을 격중당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으나, 자세가 기울어져 온몸에 허점이 드러났다.

그 순간에 낙일방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성큼 다가오며 오른 주먹을 세차게 아래로 휘둘렀다.

누가 보기에도 적화승이 치명적인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또다시 적화승의 기묘한 반격이 펼쳐졌다.

그 시작은 무릎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내질렀던 오른발이 굽어지며 낙일방의 왼팔에 막혀 있던 무릎이 낙일방의 뒤통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 위세가 너무도 강력했기에 낙일방은 휘두르던 주먹을 황급히 거두어들이며 상체를 옆으로 이동하여 무릎 공격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비스듬히 숙여졌던 적화승의 상체가 어떠한 반동이나 사전 움직임도 없이 순식간에 낙일방의 전면으로 쏘아지듯 이동해 왔다. 그것은 그야말로 유령의 움직임 같아서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는 낙일방도 이 순간만은 가슴 철렁한 느낌을 받았다.

“헛!”

낙일방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무서운 속도로 낙일방의 정면으로 다가들던 적화승의 몸이 살짝 기울어지며 그의 왼쪽 어깨가 낙일방의 얼굴로 날아든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무심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막던 낙일방은 적화승의 어깨를 이용한 공격이 이것이 처음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비슷하게 반복되었던 장면들이 스치듯 떠오르자 그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섬광이 이글거렸다.

‘그렇구나. 허리를 이용한 어깨 공격이 이자가 사용하는 무공의 핵심이었구나.’

손바닥 하나 정도의 간격밖에 없는 상태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날아들었던 어깨 공격도, 멀쩡하게 서 있는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굽혔다 일어나며 시야의 사각에서 쳐 올라왔던 기습적인 어깨치기도, 그리고 지금의 아무런 사전 동작도 없이 허깨비처럼 공간을 압축해서 날아드는 상체의 돌격도 그 근본은 모두 허리의 탄력을 이용한 어깨 공격이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그것이 신지림이 만든 육대무예의 최정수인 당랑벽이라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 무공을 깨지 못하고서는 적화승의 변칙 공격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적화승은 다른 육대무예에 이 당랑벽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했는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리 당랑벽이 기기묘묘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낙일방이 어렵지 않게 파해하는 방법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당랑벽에만 주의를 기울였다가는 다른 무공에 의외의 낭패를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만큼 육대무예의 하나하나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무서운 절학들이었다.

낙일방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얼굴로 날아드는 적화승의 왼쪽 어깨를 막았으나, 그 충격을 완벽히 제어하지 못하고 한차례 신형을 휘청거렸다.

그때 적화승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며 오른손에 막혔던 왼쪽 어깨가 아닌 반대쪽 어깨가 낙일방의 앞가슴을 가격해 들어왔다. 양쪽 어깨를 번갈아 사용하는 이 수법은 당랑벽 중에서도 가장 강맹한 위력을 지닌 당랑쌍격(螳螂雙擊)이라는 것으로, 그 막강한 위력만큼이나 상체를 격렬히 움직이기에 팔다리의 동작이 상대적으로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팡!

낙일방은 불안정한 자세에서 이 어깨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가슴을 가격당한 채 주춤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통으로 맞은 것은 아니었으나, 단순히 스친 것만으로도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은 분명했기에 순간적으로 몇 군데의 허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근접 거리의 격투에 관한 한은 누구보다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적화승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당랑쌍격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적화승으로서는 자신의 어깨에 가격당한 낙일방이 적지 않은 상세를 입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 적화승도 낙일방의 거센 공격에 그동안 몇 차례의 위기를 넘긴 터여서 내심으로 적지 않은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단번에 상대를 꺾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으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적화승은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 들어오며 양팔과 양다리를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탈명조와 표응투, 탈성퇴와 파천슬의 다양한 초식들이 구슬에 엮인 듯 줄지어 나오며 폭풍노도와 같은 기세를 뿜어냈다.

파파파파!

그 가공할 공세의 한가운데에 놓인 낙일방의 몸은 거센 풍랑에 흔들리는 일엽편주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어 보였다.

휘청거리던 낙일방의 몸이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적화승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퇴하는 모습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흔들리던 낙일방의 신형이 똑바로 서며 그의 오른 주먹이 섬전 같은 속도로 앞으로 내뻗어졌다.

쾌애액!

그와 함께 한 줄기 강력한 뇌전이 장내를 번뜩이고 지나갔다.

있는 힘을 다해 육대무예의 절초들을 펼쳐냈던 적화승은 낙일방이 내뻗은 주먹에 자신이 뿜어낸 경기들이 종잇장처럼 꿰뚫리는 것을 느끼고 안색이 대변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철추(鐵鎚)가 무수한 파편들을 뚫고 무인지경으로 날아드는 것 같았다.

자신의 당랑쌍격에 가슴을 격중당한 낙일방이 어떻게 이런 가공할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지는 적화승도 알지 못했다. 또한 그 주먹이 낙뢰신권의 최절초인 일점천뢰라는 것도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이 펼친 무공들을 바스러뜨리며 날아드는 그 주먹이 일찍이 보지 못한 강력한 것임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낙일방으로 하여금 그런 강력한 권법을 휘두를 수 있는 거리를 내주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낙일방의 가공할 주먹을 피하려던 적화승은 마지막 순간에 그 주먹이 노리는 방향이 자신의 가슴 쪽이 아니라 허리라는 것을 알고 안색이 노랗게 변했다.

콰득!

사력을 다한 끝에 간신히 앞가슴이 박살 나는 참변은 면했으나, 옆구리에 주먹이 스쳐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말았다.

이것으로 적화승은 자신이 자랑하는 당랑벽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당랑벽은 전적으로 강한 허리의 힘과 탄력을 이용하는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적화승의 두 눈에 한순간 암담한 빛이 떠올랐다.

어느새 그의 지척에 도달한 낙일방의 온몸이 무섭게 회전하며 양손에서 폭풍노도와 같은 기세가 뿜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구반장법의 절초들인 서우망월과 마면배심, 낭아선륜의 초식들이 거푸 펼쳐지며 적화승의 몸을 사정없이 가격해 버렸다.

허리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적화승으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무서운 공격이었다.

콰콰쾅!

“크아악!”

연이은 폭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적화승의 몸은 훌훌 허공을 날아 대청 벽을 뚫고 나가떨어졌다.

오 장 밖에 나뒹구는 그의 몸은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되어 혈인(血人)을 방불케 했다.

그토록 치열했던 격전치고는 너무도 갑작스럽고 허망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낙일방은 적화승의 주된 무공이 허리를 이용한 무공임을 알아차린 순간, 일부러 허점을 노출하여 가슴을 가격당했다. 낙일방의 천단신공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기에 당랑쌍격에 스친 정도로는 호심결이 깨어지지 않았다.

부상을 입은 척하며 뒤로 물러난 낙일방이 낙뢰신권을 펼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순간, 사실상 승부는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낙일방은 일점천뢰로 적화승의 방비를 무너뜨리고 천전만권으로 허리를 공격하여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구반장법의 최절초인 삼전으로 길게 이어오던 승부를 단숨에 끝내버린 것이었다.

이것이 근접박투의 무서운 점이었다. 아무리 백중세를 이루고 있다 할지라도 단 한 번의 실수나 상황 변화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군림천하 (904)

낙일방은 피로 물든 적화승의 시신을 슬쩍 쳐다보고는 이내 찬찬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락중과 도인수의 싸움도 이미 끝이 났는지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한쪽 구석에 가슴을 베이고 헐떡이며 앉아 있는 도인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인수의 상처는 제법 심각해 보였는데, 도인수는 지혈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벽에 등을 기댄 채 힘없이 앉아 있었다. 핏기를 잃어가는 그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서 하얀 분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노해광이 낙일방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수고했다. 실제로 보니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하구나. 진심으로 감탄했다.”

노해광은 좀처럼 다른 사람의 칭찬을 하지 않는 성격인데, 이번에는 몇 번이고 낙일방의 무공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만큼 그가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본 낙일방의 무공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적화승은 소마 신지림의 제자일 뿐 아니라 강호 무림의 대다수 무림인들이 두려워하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런 적화승이 자신이 자랑하는 치열한 근접전 끝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처참한 몰골로 쓰러지고 말았으니 노해광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낙일방뿐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동문 사형제인 성락중의 무공 또한 노해광의 마음을 한없이 설레게 했다.

원래 성락중은 노해광과 비슷한 시기에 입문했지만, 나이는 두 살이 적었다. 그래서 노해광은 성락중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에게 하대를 했다. 성격이 온후한 성락중은 그런 그에게 깍듯이 사형 대접을 했지만,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가 그다지 친밀하지는 않았다.

노해광은 관소양의 제자인 백동일과 더 죽이 맞았고, 성락중은 자신과 비슷한 성격의 임장홍을 많이 따랐다. 그런 그들이 각기 다른 사유로 종남파를 떠났다가 무려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두 사람 사이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성락중을 다시 만난 노해광이나 불쑥 노해광을 찾아온 성락중이나 서로의 모습을 보고 어느 쪽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물처럼 흘러버린 이십여 성상(星霜)이 그들 사형제를 가로막고 있기라도 한 듯,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본 채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성락중이었다.

“노 사형, 정말 오랜만이오. 나를 기억하시겠소?”

노해광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자네의 소식은 익히 듣고 있었네.”

성락중은 노해광의 깊은 두 눈과 연륜이 느껴지는 얼굴을 잠시 더 가만히 바라보다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 사형도 어느덧 나이를 먹었구려. 이제는 강호의 거물을 보는 것처럼 당당한 위엄이 느껴지는 것 같소.”

“정처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쓸데없이 나이만 먹고 말았네. 자네는 정말 예전 그대로군. 그 눈빛과 기상이 처음 봤을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어. 그런데도 나로서는 감당 못 할 절세고수의 풍취가 느껴지는군.”

그 말을 할 때 노해광의 눈에는 아련한 그리움과 짙은 후회, 그리고 말 못 할 깊은 번뇌와 반가움의 빛이 함께 감돌고 있었다.

예전에 두 사람은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고, 지금도 그리 친밀한 관계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나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서는 표현하기 힘든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험하고 거친 강호의 세계에서 서로의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존재를 만난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표현의 발로(發露)일 수도 있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함께 경험한 것에 대한 동질감일 수도 있다.

그렇게 성락중을 다시 만난 노해광은 오랜 시간 그와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이 이야기를 할수록 노해광은 성락중이 정말 뛰어난 검도의 경지를 이루었으며, 성격 또한 예전과 비할 수 없이 냉정하면서도 침착하다는 것을 몇 번이고 절감해야 했다.

성락중 또한 단순히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허세가 많은 줄로만 알았던 노해광의 변모한 모습에 적지 않은 놀라움을 느꼈다.

노해광은 누구보다 박학다식할 뿐 아니라 인간 본연의 심성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을 통해 강호의 생리에 정통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을 부리는 데 능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당황하거나 허점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가 서안의 흑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했던 성락중은 그를 직접 만나본 후에야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노해광은 성락중과 낙일방을 양옆에 두게 되니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을 듯했다. 그동안 많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절정고수가 없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던 노해광으로서는 두 사람의 가세가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힘이 되었다.

사실 노해광은 검단현의 실종에 어쩌면 소마의 세력이 개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심 적지 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의 우려가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은 소마 본인은 고사하고 소마의 제자 중 한 사람도 제대로 상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장병기를 막아주었던 금조명은 종남파의 혈겁이 벌어진 후 어딘가로 떠나버렸고, 든든한 조력자였던 조일평과 풍시헌도 사부인 나력지를 따라 여정을 떠난 후였다.

그렇다고 본산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종남파의 혈겁 이후 전풍개는 자신이 본산을 비운 탓이라며 거처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믿음직하고 의지가 되는 소지산 또한 혈겁으로 뒤숭숭한 본산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호행을 떠났던 제자들이 연락도 없이 돌아왔으니 노해광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들 중에는 이미 오래전에 소식이 끊긴 성락중마저 포함되어 있어서 노해광으로서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가슴 든든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해광의 기대대로 성락중과 낙일방은 소마의 제자들을 훌륭하게 물리쳤다. 이제 남은 것은 뒷정리를 하고 사태를 깨끗하게 마무리 짓는 일뿐이었다.

그런 일에 있어서 노해광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노해광은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가 없었다.

적화승과 도인수를 물리치고 그들이 막고 있는 계단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간 노해광은 텅 빈 공간만을 발견해야 했다. 분명 검단현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커녕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층 누각을 샅샅이 뒤진 끝에 노해광이 발견한 것은 지하로 통하는 수직 통로뿐이었다.

노해광은 누각의 한쪽 귀퉁이에서 문갑과 장식으로 절묘하게 가려진 그 구멍을 보고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거 한 방 먹었군. 검단현이 이런 술수까지 쓸 줄은 몰랐는데…….”

검단현은 화산파의 이름 있는 고수로,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문파와 자신에 대한 긍지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손을 쓸 때는 누구보다 냉정하고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함이 있지만, 그래도 적을 앞에 두고 미리 퇴로를 만들어서 꽁무니를 뺀 적은 없었다.

그런 검단현이 비밀리에 뚫어둔 통로를 통해 모습을 감추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검단현이 궁지에 몰려 있으며, 더 이상은 화산파의 제자라는 명분에 집착하지 않고 철저히 실리만을 좇기로 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노해광은 검게 뚫린 구멍을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 누각을 훑어보고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곳에서 일을 벌이나 했더니 이런 한 수를 숨겨두고 있었군. 이를 미처 예상하지 못했으니 이번 일은 나의 실책이 분명하다.”

그들이 있는 야월각은 화월루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노해광은 그들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남들의 눈을 피하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런 암도(暗道)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노해광은 다시 일 층으로 내려왔다.

한쪽 벽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도인수의 모습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노해광과 눈이 마주치자 도인수의 핏기 없는 얼굴에 한 줄기 호선이 그려졌다.

“뜻대로 잘…… 안 되나 보군.”

노해광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호 일이란 게 다 그렇지 않소?”

“그렇지, 확실히 강호에서는 모든 게 뜻대로 안 되지. 쿨룩!”

히죽 웃던 도인수가 기침을 하며 핏물을 토해냈다.

노해광은 그런 도인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당신의 상세는 너무 심해서 나로서도 손을 쓸 수가 없소. 당신도 그쯤은 짐작하고 있지 않소?”

도인수의 상처는 가슴에 나 있는 검흔(劍痕)이 유일했다. 하나 세 치 남짓의 그 검흔은 정확히 심맥을 가르고 지나갔기에 가히 치명적인 것이었다.

도인수도 그걸 알고 있는지 여전히 입으로는 피를 흘리면서도 나직한 웃음을 머금었다.

“흐흐. 물론이지. 도와준다고 해도…… 내 쪽에서 사양할 판인데,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는군.”

“그러니 이쯤에서 말해 주는 게 어떻소? 어차피 이제는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 아니오?”

“검단현의 행방…… 말인가?”

“그렇소. 그자가 갈 만한 곳은 이미 내가 모두 차단해 놓은 상태요. 그러니 당신이 마련해 준 곳이 아니라면 그가 갈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없소.”

도인수는 흐릿한 눈으로 노해광을 올려다보았다.

노해광의 시선은 무심했고, 행동은 침착하기 그지없어서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조금도 놀랄 것 같지 않았다. 도인수는 그런 노해광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차례 각혈을 했다.

“쿨럭! 이제 숨쉬기도…… 힘들어지는군. 이렇게 된 마당이니……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볼까?”

“말해 보시오.”

도인수는 고갯짓으로 노해광을 불렀다. 노해광이 가까이 다가가니 도인수가 피 묻은 입을 열고 힘겨운 음성을 토해냈다.

“관음사(觀音寺)…… 후원으로 가봐.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관음사? 와룡선사(臥龍禪寺)를 말하는 거요?”

노해광이 되묻자 도인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아래로 흔들리던 고개가 점차로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윽고 그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노해광은 차갑게 식어가는 도인수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와룡선사라…….”

와룡선사는 서안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예전에는 관음사라 불리기도 했다.

도인수는 죽어가면서 검단현이 와룡사의 후원에 숨어 있을 거라는 의미의 말을 했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까?

도인수는 천하제일살성인 소마 신지림의 제자로, 강호 무림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한 살인마였다. 온갖 희한한 방법으로 살인을 일삼는다고 하여 괴살이라고 불리기까지 한 그의 말을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성락중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지 노해광을 향해 물었다.

“사형은 와룡사로 가볼 생각이시오?”

노해광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고, 태도 또한 침착한 가운데 여유가 흐르고 있었다.

노해광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하네.”

“그의 말을 믿을 수 있겠소?”

“내가 그의 말을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세.”

“그럼 무엇이 중요하오?”

노해광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도인수의 입에서 와룡사라는 말이 나온 이상, 그곳에 그가 준비해둔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지. 그러니 그게 무시무시한 함정이든 아니면 꼬리를 말고 도망친 화산파의 파문제자든 나로서는 가보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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