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24화
제369장 혹서살인(酷暑殺人)(1)
햇살이 유달리 따가운 한여름의 오후였다.
뜨거운 태양이 대지를 달구는 가운데 때때로 불어오던 바람마저 잠들어 주위의 공기는 한없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누런 황톳길에는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찾을 수 없었고, 길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들도 간신히 자기 발등만을 가린 채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고준(高俊)은 땀으로 흠뻑 젖은 겉옷을 들쳐 몇 번 펄럭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이건 완전히 초열지옥(焦熱地獄)이 따로 없군그래.”
인적이 끊긴 황톳길에서 이글거리듯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법도 했다.
고준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런 날에는 바람 솔솔 부는 계곡에 앉아 얼음장 같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미녀가 따라주는 옥빙주(玉氷酒)나 마시며 뒹굴거리는 게 제일인데 말이야.”
그가 있는 곳은 황톳길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노상 주막이었는데, 몇 개의 그리 두껍지 않은 천막과 얇은 대나무 기둥으로 어설프게 만들어진 것이어서 내리쪼이는 따가운 태양 빛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어서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바람에 주막 안은 그야말로 찜통을 방불케 했다.
그럼에도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세상 만물을 태워 버릴 듯 이글거리는 양광(陽光)이 너무도 강렬하기 때문이었다.
안에 있어도 덥고 밖으로 나가도 더운 것은 마찬가지여서 고준은 그저 혀를 내민 채 어서 빨리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옷을 펄럭이며 짜증이 가득 찬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고준의 눈에 문득 멀리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이 보였다.
다가닥다가닥!
자욱한 먼지구름이 점차로 가까워지며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고준은 태양이 작열하는 황톳길을 달려오는 한 쌍의 인마(人馬)를 보며 혀를 찼다.
“쯧. 이 더위에 말까지 타고 있다니……. 말도, 사람도 못 할 짓이로다.”
말발굽 소리가 점차로 가까워지며 자욱한 먼지 사이로 인마의 모습이 보다 생생하게 드러났다.
말은 짙은 갈색에 갈기와 꼬리가 검은 북방마(北方馬)였고,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은 흑색 무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였다. 흑의인은 짙은 남색 피풍의를 두르고 머리에는 커다란 방갓을 쓰고 있는 데다 먼지를 피하기 위해 소맷자락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어서 용모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흑의인은 찌는 듯한 무더위와 따갑도록 내리쬐는 태양 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맹렬하게 말을 몰아 달려오다가 고준이 있는 주막을 발견했는지 이내 말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었다.
히히힝!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말이 주막 옆에 멈춰 서자 흑의인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성큼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 바람에 자욱한 먼지가 흑의인을 따라 후욱 밀려 들어오며 주막 안을 어지럽혔다.
“우욱! 조심 좀 하시오.”
고준이 다급하게 소맷자락을 휘둘러 먼지를 막으며 투덜거렸다.
흑의인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주막 안을 둘러보더니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주인이오?”
건장한 체구만큼이나 걸걸하고 묵직한 음성이었다.
고준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연한 걸 물어보는군. 내가 주인이 아니라면 이 무더운 날에 미쳤다고 여기에 죽치고 있겠소? 어디 시원한 계곡이라도 기어들어 가서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있지.”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엉망이었으나, 흑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풍의를 벗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피풍의를 본 고준이 기겁을 하고 소리쳤다.
“나가서 터시오. 여기를 먼지 구덩이로 만들 셈이오?”
흑의인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피풍의를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방갓을 벗어 들었다.
방갓에도 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방갓을 피풍의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흑의인이 의자에 털썩 앉더니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문부터 받으시오. 시원한 닭국수와 구운 오리 두 마리, 냉채 몇 가지하고 차게 식힌 술 한 병 내오시오.”
방갓을 벗은 흑의인은 제법 준수한 용모에 검은 수염을 기른 사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이렇게 더운 날에 황톳길을 달려왔으면 얼굴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을 법도 한데, 흑의인의 얼굴은 금방 씻기라도 한 듯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고준은 흑의인의 그런 모습이 신기해 멍하니 보고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어기적거리며 걸어갔다.
해는 어느덧 서쪽으로 절반이 넘게 기울었으나,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고 햇빛 또한 강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마침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지만 황토 먼지를 가득 품은 그 바람은 시원함은커녕 짜증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흑의인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흩어지는 먼지구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빌어먹게도 더운 날씨로군. 하필이면 이런 날에…….”
무언가 나직하게 투덜거리던 흑의인은 주방에서 나오는 고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방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술 한 병과 나물 몇 가지가 담긴 소반, 그리고 국수를 담은 그릇과 삵은 닭이 통째로 올려진 쟁반이 들려 있었다.
고준은 걸레로 먼지가 내려앉은 탁자를 대충 닦고는 음식과 술병을 올려놓았다.
“이렇게 더운 날에 오리를 구울 정신이 어디 있겠소? 마침 국수 국물을 우려내느라 삶은 닭이 있으니 이걸로 만족하시오.”
흑의인은 술을 한 잔 따라 잠시 그 향을 음미하더니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거푸 석 잔을 마신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음식은 제법 먹을 만했다. 닭 가슴살을 찢어 고명으로 올리고 차갑게 식힌 닭 국물을 육수로 쓴 닭국수는 간이 딱 맞았고, 양 또한 적당했다. 삶은 닭은 비록 가슴살이 반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리와 날개 쪽에 살이 제법 남아 있어서 간단하게 술안주로 먹기에는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나물 또한 별다른 조미를 하지 않았으나 담백하고 깔끔해서 오히려 이런 날에는 더욱 입맛을 당기게 하고 있었다.
흑의인은 국수의 국물을 조심스레 한 모금 들이켜고는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이내 국수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는 닭 다리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고준은 한쪽에 앉은 채 흑의인의 그런 모습을 심드렁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그가 막 두 개째의 닭 다리를 먹을 때가 되어서야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잘 먹는군. 보기보다는 식성이 좋은 사람이었어.”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막 안이 워낙 조용해서인지 흑의인은 그 목소리를 듣고 닭 다리를 먹다 말고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준이 한쪽 팔로 턱을 기댄 채 다시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날씨에 그렇게 먹고 싶을까? 나 같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물이나 몇 잔 마시고 말 텐데 말이야.”
문득 흑의인의 얼굴에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기이한 표정이었다.
흑의인은 자신이 먹고 있는 닭 다리를 내려놓고 국수 그릇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고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지, 아니야. 멀쩡한 닭국수는 왜 의심하는 거야? 기껏 맛있게 잘 먹어놓고 말이지.”
흑의인은 다시 술병을 들고 술잔에 술을 따른 다음 새끼손가락을 살짝 담갔다. 그의 새끼손가락에는 은으로 만든 실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고준이 다시 고개를 저으며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정성을 다해 얼음물에 담가 놓은 술에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술에다 쓸데없는 장난질 치는 건데, 나를 겨우 그런 놈으로 봤단 말인가?”
흑의인은 은반지에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 술잔을 내려놓고는 젓가락을 들어 나물 반찬을 뒤적거렸다.
고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답답한 친구로군. 나물은 간을 약하게 할 수밖에 없어서 수작을 부리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보군.”
흑의인이 마침내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다시 고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몇 개의 탁자가 놓여 있었지만, 마치 코앞에 있는 듯 흑의인의 눈빛은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고준은 전혀 거리낌 없이 팔로 턱을 괸 채 중얼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운도 정말 지지리 없는 친구야. 하필이면 이런 날에 먼 길을 달려오느라 지치고 피곤했을 텐데 제대로 쉬지도 못했군. 이제 그만 힘든 일을 내려놓고 편히 쉬는 게 어떤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흑의인의 신형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흑의인은 그 자리에 꿈쩍도 않고 앉은 채 여전히 고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을 뚫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슨 수법을…… 쓴 거지?”
고준은 턱을 괸 팔을 빼고는 탁자에 양팔을 올려놓은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거 아닐세. 그저 풀때기 하나와 곱게 빻은 약간의 가루, 그리고 조금 특이한 액체가 쓰였을 뿐이네.”
“금엽초(錦葉草), 계지산(鷄脂散), 벽하수(碧蝦水)…….”
흑의인이 씹어뱉듯이 말하자 고준은 활짝 웃으며 손뼉을 탁 쳤다.
“과연 천봉궁의 사대신군 중에서 뇌군(雷君)이 각종 기물과 약초에 능하다고 하더니 거짓이 아니었군. 하마터면 자네에게 실망할 뻔했었네.”
흑의인의 준수한 얼굴에는 어느새 검은 땀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고, 피부 또한 점차 검게 변색되고 있었다.
흑의인은 여전히 탁자에 앉은 채 힘겨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 정도로는…… 내 여의현공(如意玄功)을 뚫을 수 없을 텐데…….”
고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턱으로 조금 남아 있는 닭고기를 가리켰다.
“그래서 백골투계(白骨鬪鷄)까지 자네에게 먹여야 했지.”
“백골투계?”
“백화정분(百花精粉)을 먹이며 정성 들여 키운 닭일세. 나도 아끼는 것이라 아까 목을 치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네.”
흑의인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모공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땀이 조금씩 붉은색을 띠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준은 혀를 찼다.
“딱한 친구로군. 그 네 가지 성분이 섞이는 정도는 감당할 자신이 있단 말이지? 그런데 오늘 날씨를 보게, 이렇게 더운 날이면 인체의 혈액순환이 최고로 빨라지는 반면에 몸속의 기운은 낮게 가라앉지. 그런 상태에서 그 네 가지 성분이 몸속에 들어가면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네. 그게 바로 지금 자네가 겪고 있는 일일세.”
“…….”
“지금 온몸이 화염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마구 들끓고 기운이 폭발하면서 조금만 움직여도 혈맥이 터져 나갈 것 같지? 실제로 자네 혈맥은 이미 터지고 있네. 자네가 여의현공인지 뭔지로 억지로 막고 있던 기운은 이미 흑한(黑汗)으로 배출되어 사라졌고, 이제는 혈맥 속의 혈기가 진혈(眞血)이 되어 빠져나오고 있네. 아마 못 견딜 정도로 뜨겁겠지만, 그래도 뇌군이라는 자네의 명성을 생각해서 최대한 참아보도록 하게. 그리 오래 참지 않아도 될 걸세.”
흑의인의 모공에서 흘러나오는 땀은 이미 시뻘건 선혈로 변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흑의인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앉은 채 이를 악다물었다.
“이 수법은…… 무엇이냐?”
“초열계(焦熱界)라는 것일세.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흑의인은 시뻘겋게 핏발 선 눈으로 고준을 노려보았다.
“그…… 그건 서장 만독곡(萬毒谷)의…….”
“들어 본 모양이군. 내가 바로 만독곡주(萬毒谷主)인 독선(毒仙) 고준일세.”
서장십이기의 일인이며 서장제일독(西藏第一毒)이라 불리는 고준은 활짝 웃으며 모처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림천하 (906)
흑의인의 몸이 다시 크게 흔들리더니 입 밖으로 시커먼 독혈(毒血)이 터져 나왔다.
“쿠욱!”
그동안 간신히 내공으로 억누르고 있던 독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며 마침내 도저히 참지 못할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고준은 시커멓게 변한 흑의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심후하고 정순한 내공이군. 근래 몇 년 동안 내 팔계지옥(八界地獄) 중 하나를 일다경(一茶頃) 가까이 버틴 사람은 자네가 처음일세. 그런 점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팔계지옥은 고준이 평생을 고심한 끝에 만들어낸 최고의 독술(毒術)로, 초열계는 그중의 하나였다.
흑의인이 왼손으로 피 묻은 입가를 쓰윽 훔치고는 무서운 눈으로 고준을 노려보았다.
“우, 우리는 서장과 특별한 원한 관계가 없는데…… 대체 왜 내게 이런 살수를 쓰는 거냐?”
“물론 나는 자네와는 아무런 은원 관계가 없네. 자네뿐 아니라 자네가 속해 있는 천봉궁과도 마찬가지지.”
“그런데 왜……?”
“자네가 아무 관계도 없는 누군가에게 서신을 전해 주기 위해 이 찜통 같은 무더위 속에서 말을 달려온 것과 비슷한 이유일세.”
흑의인의 검게 변한 얼굴에 한 줄기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고준은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까닥거렸다.
“그러니 나를 탓하지 말고 이만 눈을 감도록 하게. 아무 은원도 없는 자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 숨이 끊어지는 걸 보는 건 내게도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니 말일세.”
흑의인의 검은색으로 물들어 가던 얼굴이 더욱 시커멓게 변하며 충혈된 눈에서마저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 흑의인은 발작하듯 세차게 몸을 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준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하나 그의 몸은 채 반도 날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구는 흑의인의 모공에서는 어느새 검붉은 선혈이 질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준은 한동안 흑의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흑의인은 눈을 부릅뜬 채로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독혈로 인해 흑의인의 피부는 이미 푸석푸석하게 변했고, 장기(臟器)가 썩어 들어가는지 지독한 악취가 풍겨 나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고준은 나직하게 혀를 차며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쯧. 이래서 초열계는 가급적 쓰고 싶지 않았건만, 오늘 같은 날에는 그게 가장 효과적이니 안 쓸 수도 없고…….”
고준은 흑의인의 가슴팍으로 손을 넣어 이내 한 장의 서신을 꺼내 들었다.
서신은 촛농으로 단단하게 밀봉되었는데, 겉에는 봉황이 꿈틀거리는 듯한 아름다운 서체로 ‘신검무적 진산월 대협 친전(親展)’이라고 쓰여 있었다.
고준은 신중한 손길로 밀봉을 풀어 봉투를 뜯고 그 안에 든 편지를 펼쳤다.
편지를 모두 읽고 난 고준의 얼굴에 냉랭한 미소가 감돌았다.
“역시 당주의 짐작대로군. 이 마녀는 정말 생각하는 게 한결같구나.”
고준은 편지를 손에 쥔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봉투에 넣고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황량한 황톳길 한쪽에 엉성하게 차려진 주막은 흑의인의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악취와 검붉은 독혈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고준은 다시 눈을 살짝 찌푸렸다.
“가뜩이나 더위도 제대로 막지 못해 한증막 같은 곳이 이제는 아예 잠시 머물러 있지도 못할 곳이 되어 버렸구나.”
흑의인의 시신은 이미 독기에 녹아들어 그가 입었던 옷만 흉물스럽게 남았을 뿐, 한 줌의 핏물로 화해 있었다. 그 옷가지조차 조금씩 녹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곧 흑의인의 몸뚱이와 같은 신세가 될 게 뻔했다.
고준은 흑의인이 앉아 있던 탁자 위에 남겨진 음식들과 술병을 주막 뒤쪽의 숲속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이내 주막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황톳길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고준마저 떠나간 주막 안은 찌는 듯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그토록 따갑게 대지를 내리쬐던 태양이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고 있을 무렵, 인적 끊긴 주막 앞에 홀연히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 인영의 신법이 어찌나 표홀했던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려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이렇게 더운 날에도 바닥에 거의 끌릴 듯한 파란색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었다. 이마에도 청색 두건을 매었고, 허리에는 은은한 비췻빛이 감도는 옥대(玉帶)를 차고 있어서 그야말로 전신이 온통 푸른색 일색이었다.
청포 중년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막 안을 둘러보다 이내 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자와 탁자 사이의 바닥에 유난히 거무스름한 빛을 띤 부분이 있었다.
청포 중년인은 그쪽으로 다가가 바닥으로 몸을 굽혀 검은 부분의 흙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하지만 이내 안색이 변해 황급히 손을 털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그 안에 든 액체를 손에 발랐다.
흙을 만진 손가락 부분이 검게 물들었다가, 액체가 닿자 다시 조금씩 원래의 살색을 회복해 갔다. 그제야 청포 중년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안색은 더욱 심각하게 굳어졌다.
“정말 무서운 열독(熱毒)이로군. 살짝 만지기만 했는데도 현공(玄功)을 뚫고 체내로 들어오다니…… 천하에 이토록 지독한 열독이 있었단 말인가?”
청포 중년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주막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주막은 몇 개의 대나무 위에 천막을 얹어 놓은 것이라서 네 개의 탁자와 십여 개의 의자 외에는 별다른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쪽에 주방으로 사용한 듯한 공간이 있긴 했으나, 청포 중년인이 본 것은 닭을 삶은 듯한 커다란 솥과 몇 개의 접시, 그리고 물에 담가 놓은 두 개의 술병뿐이었다.
무더운 날씨를 감안하면 애초에는 차가운 물이었겠지만 이미 술병은 미지근해졌고, 솥단지에도 국물만 조금 남아 있었다.
청포 중년인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닭 국물이 담긴 솥과 술병을 살펴보았다. 조금 전에 큰 낭패를 볼 뻔했기 때문인지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방에 대한 조사를 마친 청포 중년인은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얇은 장갑이었는데, 어찌나 얇은지 반대편이 훤히 비쳐 보일 정도였다.
청포 중년인은 장갑을 손에 끼고 주막 안의 검게 변색된 바닥 앞에 무릎을 대고 검은 흙을 조심스럽게 만지기 시작했다.
잠시 흙을 들어 손가락 사이에 비벼 본 청포 중년인은 냄새를 맡기 위해 손을 눈앞으로 가까이 가져가려다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아직 코에 대지도 않았는데 지독한 악취가 풍겨 나와 속이 메슥거렸다.
하나 청포 중년인이 놀란 것은 단순히 악취 때문이 아니었다. 그 악취 속에 은은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던 것이다.
‘역시 이것은 시신(屍身)이 독기에 잠식된 흔적이란 말인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든 청포 중년인은 주막을 벗어나 근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곧 그의 눈에, 버려진 닭의 잔해와 나물 그리고 깨진 술병 조각 등이 들어왔다.
청포 중년인은 더욱 경직된 얼굴로 계속 주막 뒤편의 숲속을 수색했다.
그로부터 일각 후, 마침내 그는 목이 부러진 채 수풀 속에 숨겨진 말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은 그의 눈에 익은 것이었다. 바로 자신의 동료가 아끼던 애마였던 것이다.
청포 중년인은 막상 자신의 찾던 말의 시신을 발견하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 역력했다. 최악의 상황으로 가정했던 것이 현실로 닥쳤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호탕하고 거칠 것이 없던 염(閻) 형이 한낱 독에 당해 한 줌의 핏물로 변해 버렸다니…… 이건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구나.’
흑의인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한 사람을 가까이에서 모셔 온 동반자이기도 했다.
별호는 뇌군(雷君).
이름은 염일도(閻一道).
청포 중년인과 함께 풍뢰쌍군(風雷雙君)이라 불렸으며, 같은 사람을 주인으로 모신 채 오랜 세월을 함께 활동해 왔다.
치밀한 성격의 청포 중년인과는 달리 흑의인은 성격이 담대하고 남자다워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번 일도 주인이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면 그의 신분으로 무더운 한여름 날에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며 먼 길을 달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이름도 없는 황톳길 한편의 허름한 주막에서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핏물로 녹아버리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청포 중년인은 한동안 말 못 할 기분에 젖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두 눈에 날카로운 신광을 번득였다.
‘염 형을 해친 흉수는 필시 염 형이 소지한 밀서를 노렸을 것이다. 염 형이 주인의 부름을 받은 것이 어제였고 밀서를 가지고 움직인 것이 오늘 아침인데, 흉수가 이곳에서 염 형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흉수의 그림자가 본 궁의 깊숙한 곳까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을 거듭하는지 그의 눈빛은 수시로 변하고 있었다.
‘본 궁의 중추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세력은 세 군데뿐이다. 그중 성숙해는 굳이 염 형을 살해하면서까지 밀서를 손에 넣을 필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신목령에는 염 형을 이렇게 만들 만한 독공(毒功)의 고수가 없다. 그렇다면 역시…… 그들인가?’
점차로 생각의 흐름이 정리되는지 청포 중년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밀서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해도 당장 일이 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 일이 복잡하게 헝클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결국 어쩔 수 없이 신목령의 힘을 빌려야 하는가? 다행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있긴 한데…….’
청포 중년인은 차갑게 굳어 있는 말의 시신을 내려다보다가 나직하면서도 어느 때보다 단호한 음성을 내뱉었다.
“너와 네 주인의 복수는 반드시 해 주마. 어차피 이제는 피아(彼我)의 구분이 확실해졌으니 더 거리낄 것이 없다.”
청포 중년인, 천봉궁의 사대신군 중 한 사람인 풍군(風君) 두일해(竇一解)는 다시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쏜살같이 몸을 날려 장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풍군이라는 외호답게 이내 그의 몸은 한 줄기 바람처럼 눈부신 속도로 기울어 가는 석양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