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09화
군림천하 (909)
시신을 계속 살펴보고 있던 전흠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이 시신이 갈휘라면 그의 형인 갈혁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때 보니 두 사람은 항상 같이 붙어 다녔던 것 같은데…”
진산월도 그 점이 의심스럽기는 했다.
갈혁과 갈휘는 천봉궁에서 쌍무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함께 움직이던 사이였다. 갈휘가 이곳에 있다면 갈혁 또한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갈혁은 동생의 시신마저 내버려 둔 채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전흠이 혹시나 하여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다른 시신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처음부터 갈혁과 갈휘가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차복승의 수족과 같은 인물이므로, 그들이 차복승의 지시를 받고 각기 따로 움직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차복승이 갈휘를 이쪽으로 보낸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이 동행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갈라지게 된 경우였다.
동생인 갈휘가 비참한 시신으로 야산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갈혁이 순순히 두고 보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갈혁은 갈휘의 사정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신목사호 천세기와 천봉궁의 갈휘가 하필이면 진산월이 이동하고 있는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신으로 누워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만약 이번 일이 진산월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것이라면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진산월이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크아악!”
어디선가 어두워지는 하늘을 갈가리 찢어 놓을 듯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전흠은 흠칫하여 진산월을 돌아보았고,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비명은 고개 너머에서 들려왔기에 전흠은 가파른 고개를 정신없이 올라갔다.
해가 완전히 떨어진 산중은 순식간에 어두워져서 산마루에 올라가도 시야가 상당히 제한되었다. 하나 전흠은 정상에서 멀지 않은 숲속의 어두운 그늘 아래 하나의 인영이 길게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흠은 신중한 동작으로 그 인영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 전의 비명이 무색하게 주위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고, 숲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어둠 속에 살짝 드러난 인영의 모습은 남색 무복을 입은 무인이었다. 고개를 땅으로 처박고 있기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드러난 뒷모습은 건장해 보였다.
전흠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비명이 들리고 그가 이쪽으로 오기까지 숨 몇 번 내쉴 정도의 짧은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쓰러져 있고 흉수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전흠은 조심스럽게 쓰러져 있는 남의인의 몸을 뒤집었다.
남자답게 생긴 중년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왠지 낯익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전흠은 무언가를 느낀 듯 짤막한 탄성을 토해 냈다.
“아! 이자는 갈혁이로구나!”
남의인은 다름 아닌 갈휘의 형이자 쌍무상의 일인인 추혼무상 갈혁이었던 것이다.
갈혁의 사인은 너무도 분명했다.
그의 왼쪽 가슴에 작은 구멍이 선명하게 뚫려 있었다. 새끼손가락 절반 크기의 그 구멍은 정확히 심장을 관통하고 있어서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갈혁의 상반신을 온통 붉게 적셨다. 그 때문인지 갈혁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에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전흠은 갈혁의 가슴에 난 상처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멍이 뚫린 형태로 보아 검이나 도에 의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창에 의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았던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병기에 의한 상처일까?”
전흠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진산월이 갈혁의 시신을 내려다보고는 짤막하게 말했다.
“창에 의한 것이로군.’
“예? 창으로 이런 상처를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창날의 끝에 강기를 덧씌워서 찌르면 이런 흔적이 남게 된다.”
전흠은 진산월의 말을 듣고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라면 창날이 몸을 완전히 뚫고 나갔을 텐데…….”
“흉수는 쓸데없이 힘을 모두 쏟지 않고 정교한 솜씨로 심장만을 뚫어 버린 것이다.”
전흠은 혹시나 하여 갈혁의 몸을 뒤집어 보았다. 갈혁의 등에는 아무런 흔적도 나 있지 않았다. 진산월의 말대로 흉수는 정확히 갈혁의 심장을 관통할 정도로만 창날을 찔러 넣은 게 분명했다.
갈혁은 천봉궁의 총관인 차복승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였다. 흉수는 그런 갈혁을 마치 허수아비처럼 창끝으로 정확히 자신이 노리고 있는 부위만을 공격해 쓰러뜨린 것이다.
강기를 창에 덧씌울 수 있는 고수가 창을 사용하는 경지 또한 이 정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전흠이라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탈혼검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무림인들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한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탈혼검이 수법의 기괴함과 예측 불가능한 신비스러움으로 상대를 두렵게 한 것이라면, 갈혁의 상처는 최상승의 내공과 완벽에 가까운 무예 실력을 겸비한 절정 고수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흔적이기에 놀라움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게 했다.
“강호에 이 정도의 창술을 지닌 고수가 있습니까?”
“두 사람 정도 생각이 나는군.”
진산월의 말에 전흠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예? 두 사람이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 한 사람은 환상제일창 유중악 대협이다. 유 대협의 여의조화창이라면 충분히 이런 조화를 부릴 수가 있지.”
유중악의 이름이 나오자 전흠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전흠은 비록 유중악과 직접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몇 번이나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본 그의 모습에 나름대로 적지 않은 흠모를 느끼고 있었다.
강호의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신창조화 의기천추’라 불리는 유중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그토록 찬란하게 빛났던 위명은 구궁보에서의 일로 더럽혀졌고, 유중악은 생사조차 불명인 채 홀연히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무당산에서 그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강호에서 누구도 그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강호 제일의 호한(好漢)이며 풍류남아였던 환상제일창 유중악의 시대가 너무도 허무하게 종말을 고했다는 생각에 전흠은 진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장문인인 진산월의 입에서 모처럼 그의 이름이 거론되니 말로 못 할 감흥이 불쑥 치밀어 올라 전흠은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졌다.
“유 대협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전흠의 말에는 유중악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의 결백을 믿으면서도 그가 과연 자신에게 드리워진 무거운 짐을 벗고 재기할 수 있을지, 종적조차 묘연해진 그가 과연 과거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그에 대한 불안함과 아쉬움 그리고 한 가닥의 기대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진산월은 여느 때보다 조용한, 그러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의지 견정한 사람이다. 인간의 의지는 때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지.”
전흠은 묵묵히 그의 말을 음미하다가 한차례 어깨를 떨고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담담하게 웃었다.
“의기는 천추를 간다고 하지요. 제가 본 그는 누구보다도 의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그대로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전흠은 다시 갈혁의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 대협 말고 이런 솜씨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구입니까?”
“혈창 봉구령이란 자다.”
“혈창 봉구령?”
전흠은 나직하게 그 이름을 뇌까려 보고는 약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과문해서인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입니다. 별호만 봐서는 마도(魔道)의 인물인 듯하군요.”
“모를 법도 하지. 나도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별로 없어서 아는 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자가 유 대협에 비할 만한 고수란 말입니까?”
유중악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전흠은 이름도 모르는 인물이 그와 비견될 만한 창술의 고수라는 말이 잘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봉구령은 조화신창 감화의 첫 번째 제자였다. 다시 말해서 유 대협에게는 사형(師兄)뻘이 되는 인물이지.”
진산월에게 처음 봉구령에 대해 말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유중악이었다.
무당파에서 진산월을 숙소로 찾아온 유중악은 구궁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얽힌 미혹을 풀기를 원했으며, 진산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그는 진산월과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신에게는 사형이 되는 어떤 인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내가 사부님의 제자로 들어갔을 때, 사부님에게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제자가 따로 있었소. 그는 나를 무척 경계하고 시기했는데, 그로부터 오 년 후의 비무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패하게 되었지. 그리고 그날 밤에 나를 습격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사부님께 파문당하고 말았소.’
당시 진산월은 그가 왜 파문당한 과거의 사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는 파문에 앙심을 품고 마도로 뛰어들어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그들의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소. 그리고 파문당한 지 칠 년 후에 다시 나를 찾아와 도전했는데, 상당히 실전적이면서도 사나운 창법을 구사했지. 하지만 다소 난삽한 구석이 있어서 나는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할 수 있었소. 그때 그는 기필코 복수하겠다며 떠났는데, 그 후로 중원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소.”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거의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였소. 그는 과거와는 달리 절제된 기운을 풍겼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결코 내 아래가 아니었지. 나는 그와 두 시진 넘게 싸웠음에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고, 그 또한 나를 꺾지 못했소. 결국 우리는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헤어졌는데, 떠날 때 그는 더 이상은 나를 찾아오지 않겠다며 앞으로의 승부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웃었소.”
“그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된 건 이번 일이 벌어진 후였소. 구궁봉에서 누명을 쓰고 그곳을 벗어난 후 그의 편지를 받았지. ‘이제 어떤 기분인지 알겠나?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걸 한순간에 빼앗긴 기분이 어떤가?”라는 글이 쓰여 있더군.”
그 말을 할 때의 유중악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씁쓸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된 배후에 그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소. 혹시라도 진 장문인이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실을 잊지 말아 주기 바라오.”
진산월은 유중악에게 그의 이름을 물었고, 유중악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봉구령이라 하오. 스스로 혈창이라는 별호를 붙이고 있었소. ‘신창을 피로 물들게 할 창’이라는 의미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