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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10화


군림천하 (910)

제371장 심야격전(深夜激戰) (1)

진산월의 말이 끝나자 전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유대협의 사형뻘이며 그분과 동수(同手)를 이루었다면 충분히 비견될 만한 고수라고 할 수 있겠군요.”

“유 대협의 말이 사실이라면 봉구령은 구궁보를 암중에 장악하고 있는 조익현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조익현은 쾌의당의 실질적인 주인이지.”

“그렇다면 봉구령도 쾌의당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군요.”

무심코 중얼거리던 전흠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갑자기 손뼉을 탁 쳤다.

“탈혼검의 주인도 쾌의당이고 봉구령도 쾌의당 소속이라면, 갈혁을 해친 흉수는 역시 봉구령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오늘 우리가 목격한 세 건의 살인을 저지른 흉수도 모두 쾌의당의 인물들이란 말이군요.”

진산월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흠은 그를 힐끗 돌아보다가 진산월이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자 내뱉으려던 말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평소의 전흠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모습이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눈길을 끌었는지 진산월이 생각을 멈추고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할 말이 있느냐?”

전흠은 머뭇거리다 진산월의 독촉을 받고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갈혁의 비명을 듣고 우리가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 반 각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필시 흉수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말인데, 그를 찾아낼 방법이 없는지 장문 사형께 여쭈어보려고 했습니다.”

전흠의 말투와 행동은 장문인을 대하는 제자의 태도로 손색이 없었다. 과거에 진산월을 대하던 그의 모습을 상기해 본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옳을 정도로 달라져 있는 것이다.

무당산에서 형산파와의 악산대전을 승리로 끝낸 후, 전흠의 진산월에 대한 태도는 많이 바뀌었다.

그동안 문파를 재건하는 데 신경을 쓰느라 종남파의 규율이나 위계질서가 적지 않게 흐트러져 있었던 건 누구도 부인 못 할 사실이었다.

특히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위험을 헤쳐 와서인지 진산월과 그의 사제들 간은 주위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지나치게 격의가 없고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하나 종남파가 점점 예전의 위세를 되찾고 사숙인 성락중과 육천기 등 선배 고수들이 합류하면서 조금씩 문파의 틀이 갖추어져 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악산대전이 끝난 후 제자들 사이에서 이제는 종남파가 명문 정파로 강호에 우뚝 서게 되었으니 다른 문파에 흠을 잡힐 만한 일은 없어야 한다는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로 종남파의 제자들은 장문인인 진산월을 대할 때 예전과는 달리 깍듯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전흠은 바닷가에서 워낙 자유분방하게 자라온 터라 그동안 문파의 딱딱한 예절에 익숙하지 않아서 많은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나 동중산의 조언과 그 자신의 노력으로 조금씩 나아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유소응과 손풍 등의 제자들과 함께 강호행을 나선 후로는 한 문파를 이끄는 장문인의 사제라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한결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번에 장문인인 진산월과 단둘이 동행하면서 전흠의 그러한 변모가 더욱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이제는 다른 문파의 누가 보아도 흠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게 바뀌어 있었다.

진산월은 전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이제는 제법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구나.”

확실히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부터 저질러 버렸던 예전의 성질 급한 전흠을 떠올려 본다면 지금은 한 명의 무림인으로 손색이 없는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흠은 멋쩍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도 이제는 강호초출(江湖初出)의 풋내기가 아닙니다.”

예전 같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투덜거렸을 전흠이 의외로 의젓한 모습을 보이자 진산월은 가볍게 웃고 말았다.

“그렇지. 그나저나 네 말대로 흉수가 아직 이 근처에 머물러 있을 확률은 충분히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를 유인해 볼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네가 비명이라도 지른다면 흉수가 궁금해서라도 와 보지 않겠느냐?”

진산월이 다소 짓궂은 눈으로 전흠을 바라보며 웃자 전흠도 싱겁게 따라 웃었다.

“그런 일이라면 저보다는 장문 사형의 목소리가 더 어울릴 듯합니다.”

“그런 일에는 내가 재능이 없는 편이다. 아무튼,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불현듯 한 가지 다른 생각이 떠오르더구나.”

전흠의 얼굴에 호기심 어린 빛이 떠올랐다.

“그게 무엇입니까?”

“갈혁은 심장을 관통당해 죽었다. 그런 상처라면 거의 즉사에 가까운 죽음을 맞았다고 봐야지. 그런데 우리가 들은 비명은 지나치게 크고 길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내지른 것처럼 말이지.”

전흠은 전혀 생각도 못한 점인지라 눈을 크게 치켜떴다.

“장문 사형은 비명의 주인이 갈혁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떨구어 갈혁의 가슴에 나 있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만 이 정도 상처를 입은 자가 그런 비명을 지를 수 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전흠이 듣고 보니 확실히 진산월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조금 전의 비명은 고개 너머에서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더구나 처절하기 이를 데 없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달려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강호의 고수들은 어지간한 고통에는 비명을 내지르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는 자체가 상대에게 약세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 무공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고수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심했다. 개중에는 팔다리가 잘리는 부상에도 비명을 억누르며 참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갈혁같이 강호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경험이 풍부한 절정 고수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더구나 심장은 제대로 가격당하면 목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급소다. 심장을 관통당한 사람이 숨이 끊어지기 전에 주위가 떠나갈 듯한 비명을 지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갈혁을 죽인 흉수가 일부러 그런 비명을 지른 걸까요?”

“아니라면 갈혁 본인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내지른 걸 수도 있지.”

전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예? 그가 왜……?”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명을 내지른 자가 흉수든 갈혁이든 중요한 건 그 소리를 듣고 우리가 이곳까지 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소리를 지른 자가 누구든 그는 우리가 이곳으로 오기를 원했다는 것이지.”

“일부러 비명을 질러 우리를 유인했단 말입니까?”

“그렇다.”

“대체 왜 그런………?”

전흠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진산월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흉수가 일부러 비명을 질러 우리를 유인한 것이라면, 지금까지 흉수에게서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전흠은 그 말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컴컴해진 숲속은 칠흑같이 어두워서 일 장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깊은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전흠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귀에 공력을 잔뜩 기울였다가 풀벌레 울음소리가 정상적으로 들려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주위에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알고 긴장을 풀었다.

전흠이 좀 더 침착하고 냉정했다면 진산월의 반응만으로도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당금 무림에서 진산월의 이목을 속이고 지척에 숨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비명을 지른 자가 갈혁이라면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리고 도움이나 지원을 요청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진산월의 시선은 아직도 감기지 않고 있는 갈혁의 두 눈에 잠시 고정되었다.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복수를 부탁하는 걸 수도 있겠지.”

전흠은 진산월의 말을 나직하게 곱씹어 보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 사형의 말씀은 갈혁이 우리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았다는 뜻이로군요.”

“그렇다. 갈혁과 갈휘는 총관인 차복승의 수족과 같은 존재들이니, 아마도 나를 만나라는 차복승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인적도 드문 이곳에서 그들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 설명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갈혁은 자신이 봉구령의 혈창에 죽을 것을 알고 장문 사형께 뒷일을 부탁한 것이로군요.”

전흠은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으나, 진산월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뒷일을 부탁한다………….라. 확실히 그런 의미일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지.”

“하지만 지금 상태라면 갈혁의 복수를 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없지 않습니까? 당장 봉구령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진산월은 턱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갈혁의 왼손을 보거라.”

전흠은 흠칫 놀라 갈혁의 왼손으로 시선을 주었다.

갈혁의 오른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었지만, 왼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대신에 손가락이 다소 특이한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 중지가 세워져 있고 약지와 소지가 오므라져 있었던 것이다.

“이건 세 개를 가리키는 건가요?”

“그렇다.”

“하지만 모양이 다소 이상하군요.”

일반적으로 삼(三)을 나타내려면 대부분의 사람이 엄지와 소지를 접고 나머지 세 개의 손가락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갈혁의 손은 약지와 소지를 접고 있어서 마치 무언가를 겨누는 듯한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진산월에게는 그 점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방위를 나타내려 했던 것일 게다.”

전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위라고요?”

“갈혁의 시신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의 자세를 취해 보거라.”

전흠은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갈혁의 시신을 눕혔다. 그러자 세 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이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서쪽이군요.”

공교롭게도 서쪽은 그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었다.

진산월은 갈혁의 시신과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쪽으로 삼 리(里)를 가면 마을이 나오지.”

전흠은 알겠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을에 갈혁이 우리에게 바라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겠군요.”

“바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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