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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11화


군림천하 (911)

마을은 괴괴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인가(人家) 백여 호의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고갯마루를 넘어 삼 리쯤에 위치한 그 마을은 복성(復姓)인 동방(東方)씨들의 집성촌이기에 동방촌(東方村)이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주위가 외진 데다 마을이 워낙 작아서인지 해만 떨어지면 돌아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인기척도 들리지 않아 폐촌(村)을 연상하게 할 정도였다.

오늘은 달도 뜨지 않는 그믐에 구름이 많이 낀 날이어서 마을 전체에 그러한 분위기가 평소보다 한층 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경(二更)이 가까워질 무렵, 마을의 중앙에 나 있는 별로 넓지 않은 길에 두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의를 입은 훤칠한 키의 청년과 그보다 한 뼘쯤 작은 키의 흑의 청년이었다.

두 사람은 마을의 입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인적이 완전히 끊긴 길의 한복판에서 정적에 잠긴 마을을 보고 있자니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공간에 서 있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움이 느껴졌다.

다부진 체구에 날카로운 인상의 흑의 청년이 나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로군요. 밤이 제법 깊기는 했지만, 어떻게 불 켜진 집이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때마침 길에서 멀리 떨어진 인가에 갑자기 불이 켜졌다.

“엇?”

흑의 청년은 짤막한 경호성을 토하며 안력을 돋우어 불이 켜진 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외곽에 위치했는데, 외관상으로는 여느 집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평범해 보였다. 낮은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집의 창문 중 하나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흑의 청년이 백의 청년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를 유인하려는 걸까요?”

백의 청년은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불이 켜진 집을 보고 있다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쪽 일대의 공기가 확실히 심상치 않구나. 유인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뻔하고, 아무래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건 분명한 것 같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진산월과 전흠이었다. 고갯마루에서 갈혁의 시신을 뒤로하고 산 아래로 내려온 그들은 곧바로 갈혁이 암시하는 삼리 밖의 마을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그 집을 향해 움직였다.

일대의 집들이 모두 낮은 담벼락이나 대나무로 주위를 두르고 있어서 길에서도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개중에는 아예 대문이나 담이 없는 집들도 적지 않아서 과연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다웠다.

전흠은 길을 따라 걸으며 몇몇 집들을 기웃거리다가 진산월을 향해 은밀한 전음을 보냈다.

-사람들이 안 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였다. 다만 숨을 억누른 채 쥐 죽은 듯 조용히 안에만 머물러 있기에 마을 전체가 깊은 잠에 빠진 듯이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공력을 돋우어 귀를 기울여 보아도 그들의 숨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잠들어 있는 사람의 숨소리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아주 낮게 속삭이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여보, 큰당숙께서 무사하실까요?”

“아무렴. 당숙은 신선 같은 분이니 별일이야 있으려고? 다만 우리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까 우려되어 하신 말씀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래도 오늘 밤은 절대로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방 안에 꼼짝도 말고 있으라고 하실 때의 그분 표정이 너무 무거워서인지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드네요.”

“어허. 부정 타게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어서 눈 감고 잠이나 잡시다.”

“잠이 와야 자죠.”

“글쎄 눈이나 감으라니까.”

한 부부의 툭탁거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리더니 이내 조용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나 진산월과 전흠은 그들의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너무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들 부부만이 아니었다. 불이 꺼진 대부분의 집에서 낮게 소곤거리는 속삭임과 불안한 마음에 거칠게 내뱉는 호흡 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흠은 혹시라도 그들이 알아차릴까 봐 기척을 죽여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걸으려고 노력했다. 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뜩이나 불안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불이 켜진 집은 마을의 외곽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해, 다른 집들과는 적지 않은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

진산월과 전흠이 막 마을의 마지막 집을 지나 불이 켜진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 방향에서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앙!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정적에 잠겨 있던 마을 일대가 온통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하나 마을 어디에서도 사람들이 일어나거나 방 밖으로 나와 보는 집은 없었다. 오히려 다들 더욱 숨을 죽이고 방 안에만 꼭꼭 틀어박혀 있었다.

진산월과 전흠은 서로 시선을 마주 보고는 이내 몸을 날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불 켜진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저쪽이다.

진산월이 집 뒤편의 야산 쪽을 가리켰다. 조금 전의 굉음은 바로 그 야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야산은 나지막해서 웬만한 구릉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는데, 야산을 넘자 제법 넓은 공터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 공터의 한복판에서 한눈에 보기에도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싸우고 있는 사람은 하늘색 유삼을 입은 청년과 갈색 마의를 걸친 청년이었다. 두 청년의 나이는 얼핏 보기에 비슷한 듯했으나, 용모는 물론이고 사용하는 무공이나 병기 또한 판이하게 달랐다.

하늘색 유삼의 청년은 이목이 수려하고 눈빛이 맑아서 헌앙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비췻빛이 감도는 옥(玉)으로 된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그 부채가 움직이는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현란했던지 눈으로는 제대로 좇을 수 없을 정도였다.

반면에 갈의 청년은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어깨 위를 수북하게 덮고 있는 데다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이따금 보이는 눈빛이 어찌나 차갑고 서늘하던지 흡사 한 마리 야수를 보는 듯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꼬챙이처럼 날카롭게 생긴 기형검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마치 쇠꼬챙이를 연상하게 하는 그 기형검이 움직이는 방식이 너무도 변칙적이고 날카로워서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금시라도 하늘색 유삼 청년의 몸통이 검에 꿰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용모부터 무공까지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은 그야말로 보는 이의 시선을 앗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한 명의 중년인과 한 명의 노인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화려하면서도 치열한 싸움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색 유삼을 입은 청년의 뒤편에 있는 사람은 검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르고 청삼을 입은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헌칠한 키에 두 팔이 유난히 긴 편이었으며 서 있는 자세와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기도가 범상치 않아서 마치 고고하게 서 있는 한 마리 학(鶴)을 보는 듯했다.

청삼 중년인은 담담한 눈길로 장내의 격전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간혹 하늘색 유삼의 청년이 수세에 몰릴 때마다 짙은 검미(劍眉)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살짝 꿈틀거리고는 했다.

또 다른 인물은 화려한 비단 장포를 입고 얼굴이 대춧빛으로 붉은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검은 터럭 하나 섞이지 않은 눈부신 백발을 뒤로 묶은 노인은 당당한 몸집에 눈빛도 강렬하기 그지없어서 그의 고리눈이 움직일 때마다 주위를 질식시킬 듯한 강렬한 광망이 이글거리듯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게다가 뒷짐을 지고 턱을 살짝 앞으로 내민 자세는 광오한 느낌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는데, 그 모든 것이 노인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보였다.

백발노인은 격전을 지켜보면서도 가끔 청삼 중년인을 힐끔거렸는데, 그때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의미를 알기 힘든 괴이한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장내의 격전은 점점 더 치열해져서 나중에는 누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기 힘들 정도로 두 사람의 신형이 복잡하게 뒤엉켜 들었다.

쾅!

때마침 하늘색 유삼 청년의 섭선과 갈의 청년의 기형검이 정면으로 격돌하며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져 나와 주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방금의 격돌은 먼젓번보다 한층 더 격렬해서 그 여파로 바짝 붙어서 격투를 벌이던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 갈라져 오 장 밖으로 튕기듯 멀어졌다. 두 사람은 몸을 휘청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각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하늘색 유삼 청년은 낯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서 금시라도 피를 토할 것 같았으나, 이를 악물고 속에서 치미는 선혈을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갈의 청년은 산발한 머리가 얼굴을 덮고 있어서 표정을 알 수 없었으나, 맹수처럼 무섭게 번뜩이던 두 눈이 순간적으로 흐려진 것으로 보아 그 또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섭게 쏘아보면서도 선뜻 달려들지 않고 숨을 가다듬으며 느릿느릿 다가서고 있었다. 상대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알고 한결 신중해진 모습이었다.

어느 순간, 청삼 중년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몽아(夢兒)야, 이제 됐다. 물러서거라.”

듣는 이의 마음까지 씻어 주는 듯 청수하고 깨끗한 음성이었다.

막 앞으로 몸을 움직이려던 하늘색 유삼 청년이 그 말에 움찔하여 그를 돌아보았다.

“대숙(), 저는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청삼 중년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동안 열심히 수련해 온 걸 알 수 있겠더구나. 하지만 너는 오늘 네가 할 일을 다 했다. 이제는 나에게 맡기도록 해라.”

하늘색 유삼 청년은 망설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전신에 가득 끌어 올렸던 공력을 거두어들였다.

“알겠습니다.”

청삼 중년인이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갈의 청년은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 서 있던 백발노인이 당당한 걸음으로 청삼 중년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었으나, 그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주위의 공기가 요동을 쳤다. 그것만 보아도 지금 그의 몸에서 얼마나 가공스러운 기운이 흘러나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여느 사람이었다면 백발노인의 그러한 모습에 기가 질릴 법도 한데, 청삼 중년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

백발노인의 기세가 더욱 강해지자 청삼 중년인은 오히려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쓸데없이 허세를 부려 사람의 기를 죽이려 하는 버릇은 여전하구려. 그렇게 바깥으로 흘려 버리는 기운이 아깝지도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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