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13화
군림천하 (913)
청삼 중년인은 잠시 고준의 전신을 찬찬히 훑어보다 이내 흑의 중년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 사람은 운남의 명망 있는 세가의 가주이고, 다른 한 사람은 멀리 서장의 기인이라. 그렇다면 당신의 정체도 심상치는 않겠구려.”
흑의 중년인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즉시 입을 열었다.
“나를 상대로 잔머리 굴릴 필요는 없네. 난 봉구령이란 사람일세. 들어 본 적이 있나?”
청삼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창만큼이나 날카로우면서도 살벌하기는 몇 배나 더한 무시무시한 창법을 쓰는 봉씨 성의 고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당신이 혈창이오?”
“맞아. 용케도 내 이름을 알고 있었군.”
청삼 중년인은 다시 침착한 눈길로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더니 이윽고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알고 있지. 쾌의당주가 야율척의 사패천을 흉내 내어 자기의 최측근에 사방신(四方神)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그 봉씨 2 쓰는 창의 고수라고 하더군. 이제 보니 당신들은 쾌의당에서 온 것이로군.”
이번에는 그 말에 흑의 중년인을 비롯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청삼 중년인의 시선은 패존 동방광일에게로 향했다.
“당당한 운남제일세가의 가주가 한낱 청부업체의 주구(走狗)가 되어 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강호의 도리가 참으로 오묘하군.”
동방광일의 광오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붉은빛이 어른거렸다. 청삼 중년인의 말에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하나 그것은 이내 사라져 버렸고, 그 뒤에는 격한 분노와 살심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았자 명년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이 되는 건 변함이 없다. 네놈과의 질긴 악연도 오늘로 마지막이 될 것이다.’
동방광일은 운남에 있는 동방세가의 가주였다.
동방세가는 운남 제일의 명문세가로 누구나가 손에 꼽고 있지만, 강호 무림 전체에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운남성에만 머물러 있을 뿐, 세력을 외부로 확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은 가주인 동방광일이 야망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방광일은 동방세가를 운남을 넘어 강호 제일의 가문으로 만들 욕심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운남에만 칩거해 온 것은 십여 년 전에 벌어진 가문의 혈사(事) 때문이었다.
당시 동방광일은 광오하리만치 유아독존하는 성격과 동방세가의 세력을 확장하느라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압에 가까운 방법을 계속 고집한 탓으로 일족들에게 신망을 잃고 있었다.
동방세가는 대대로 은인자중하여 내실을 다지는 가풍이 있기에 가문의 혈족들 상당수는 무리한 확장을 반대하고 있었다. 자연히 그들은 독선적이고 야망이 큰 동방광일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그의 동생인 동방수일(東方守日)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동방수일은 침착한 성격에 배려심이 많고 솔선수범을 몸소 실천하는 인물이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동방광일은 점차로 커지는 동방수일의 지지 세력에 불안감을 느끼고 끝내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자신의 회갑연을 축하해 주러 온 동방수일과 그의 측근들을 향해 살수를 쓴 것이다.
동방수일은 지지자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탈출했으나, 부상의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혈사의 충격은 동방세가를 거의 갈가리 찢어 놓다시피 했고, 동방광일이 그 여파를 수습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동방수일의 아들이 바로 동방욱이었다. 동방욱은 어려서부터 동방세가 사상 최고의 기재로 이름이 높았고,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절정의 무공을 완성하여 경천신수라는 별호로 천하 무림을 경동시키고 있었다.
동방욱이 자신의 부친에게 일어난 참변을 전해 들은 것은 일이 벌어진 지 한 달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분기탱천한 동방욱은 당장 동방세가로 돌아가 부친의 원수를 갚고 싶었으나, 때마침 부상을 당한 몸으로 자신을 찾아온 동방수일 때문에 마음을 바꾸어야 했다.
동방수일은 더 이상 가문에 혈족의 피가 흐르게 해서는 안 된다며 동방욱을 설득했고, 결국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만을 데리고 운남을 떠나 멀리 장강 이북으로 향했다. 그 일행이 머물러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동방촌이었다.
동방수일은 당시 당한 부상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동방촌에 정착한 지 이 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동방욱은 삼 년 동안 부친의 무덤을 충실히 지켰고,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동방광일에 대한 복수를 단념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런데 자신을 피해 다녀야 할 동방광일이 오히려 야밤에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동방욱은 동방광일의 무공이 자신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의 도발에 적지 않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한없이 당당하고 오만한 것 같아도 동방광일은 의외로 소심하고 치밀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와 같은 혈사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예상대로 동방광일은 혼자 오지 않고 몇 명의 방수(手)를 대동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방수들이 쾌의당 당주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
세가의 정통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친동생에게도 살수를 쓴 동방광일이 막상 강호에서 청부업체로 알려진 쾌의당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자 동방욱은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신목령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젊은 시절 신목령주에게 목숨의 구원을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더구나 그는 신목령의 오천왕 중 일인으로 불리고 있으면서도 막상 신목령을 위한 활동은 거의 한 적이 없었다. 간혹 아끼는 사자들에게 몇 수의 무공을 알려 주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동방촌에 칩거한 채 강호를 반쯤 떠난 상태였다. 그만큼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형제의 피까지 손에 묻히는 강호의 생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은거하다시피 하고 있는 그에게로 동방광일이 찾아온 것도 뜻밖이었지만, 동방광일과 두 명의 고수들이 쾌의당 소속이라는 것은 더욱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쾌의당은 그동안 여러 차례 신목령의 수하들을 빼내려 했고, 심지어는 고수들을 보내 암습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목령에서 쾌의당에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하지 않은 것은 신목령의 수뇌에서 쾌의당을 적대시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인지 쾌의당도 일정 수준 이상의 도발은 벌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무언의 약속이 깨어진 것이다.
동방욱이 전해 듣기로는 사방신은 쾌의당주의 직속 세력으로 좀처럼 강호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존재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쾌의당주의 직접 지시만을 듣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의 배후에 쾌의당주가 있다는 뜻이었다.
쾌의당주가 신목령의 오천왕 중 하나인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사방신을 보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동안 몇 번의 충돌 속에서도 근근이 유지되고 있던 신목령과 쾌의당 사이의 선(線)이 깨어졌음을 나타내는 너무도 분명한 신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방욱은 혈창 봉구령과 독선 고준, 동방광일을 차례로 응시하더니 그중 고준을 향해 물었다.
“당신도 사방신 중의 한 사람이오?”
고준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불초하지만 이 사람이 서방신(西方神)을 맡고 있소.”
동방욱은 아직도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고 있는 동방광일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저쪽은 남방신(南方神)쯤 되겠구려.”
고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크게 웃었다.
“하하. 맞소. 정말 놀라운 혜안이시오. 동방 가주께서 남방신을 맡고 있고, 봉 대협은 동방(東方)을 책임지고 있소.”
“북방신(神)은 누구요?”
고준은 망설이거나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즉시 입을 열었다.
“빙제) 냉우림(冷宇林)이란 사람인데, 혹시 들어 본 적이 있소?”
“북해의 최고고수를 어찌 모르겠소?”
“그 유명한 경천신수가 자신을 안다고 하면 냉 대협도 무척이나 기뻐할 거요.”
고준이 싱글벙글 웃으며 꼬박꼬박 동방욱의 말에 대답을 해 주자, 동방광일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이제 밤도 깊었는데,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는 게 어떤가?”
고준은 다시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우리 정체를 술술 부는 게 동방 가주께선 불만인 모양이구려. 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알려줘도 상관없지 않겠소?”
“밤이 길면 꿈도 길어지는 법일세.”
“아무래도 동방 가주께서 마음이 급하신 모양인데, 그래도 천하의 경천신수를 상대하는데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소?”
동방욱은 비단 신목령의 오천왕 중 일인일 뿐 아니라, 누구나가 그들 중 최고수로 인정하는 불가일세(不可-世)의 고수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가 계속 강호에서 활동했다면 능히 무림구봉의 한 자리에 올랐을 거라고 믿을 정도로 예전에 그가 보여준 모습은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동방촌에 칩거한 지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의 이름이 무림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것은 당시의 그가 무림인들에게 얼마나 큰 놀라움과 감탄을 자아내게 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하고 스스로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동방광일이 봉구령과 고준을 대동하고 온 것도 혼자로는 도저히 동방욱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혈창 봉구령과 독선 고준이라는 절세의 고수들을 방수로 두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동방광일의 마음속에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과 초조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고준이 천연덕스러운 모습으로 동방욱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조차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고준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품속에서 조그만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 안에 든 기름을 양손에 꼼꼼히 바르고 있던 고준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동방욱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내 재주는 몇 가지 독을 부리는 것뿐이라 손을 보호하는 이 기름이 내게는 병기인 셈이오. 그러니 동방 대협께서는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동방욱은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봉구령 또한 등 뒤에서 세 개로 분리된 창대를 뽑아 들더니 조립을 하기 시작했다.
조립을 마친 봉구령의 손에는 유난히 긴 창이 들려 있었다. 창날의 길이는 일 척(尺)에 가까웠고, 창대는 일 장에 달했다. 창날 아래에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수실이 달려 있어서인지 창 전체가 붉게 보였다.
그 창을 들고 있는 봉구령의 전신에는 칼날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고, 단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 자신이 하나의 거대한 창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봉구령은 동방욱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특유의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 혈망육창(網六槍)은 오직 피를 보기 위한 무공이다. 경천신수의 피라면 충분히 적실만 하겠군.”
동방광일 또한 품속에서 손바닥 두 개 길이의 철척(尺)을 꺼내 들었다. 기이한 묵(墨)빛이 감돌고 있는 그 철척은 언뜻 보기에도 예사 병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측천척測天尺)이라는 것으로, 동방세가에서 대대로 가주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절세의 기병(奇兵)이었다.
측천척을 손에 든 동방광일의 전신에서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공할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동방욱은 담담한 눈으로 그들 세 명의 절세고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양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유난히 길고 여인의 그것처럼 섬세한 손이 드러났다.
동방욱은 여인의 섬섬옥수를 방불하게 하는 손을 든 채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오시오. 내 손이 왜 신수(神)라고 불리는지 알려 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