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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14화


제372장 경천동지(驚天地)

군림천하 (914)

동방욱의 나이는 마흔여섯 약관을 갓 넘은 스물둘의 나이에 처음 무림에 출도하여 불과 일 년 사이에 네 명의 절정 고수들을 연파하여 강호 무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그가 선보인 월강수를 비롯한 아홉 가지의 절학들은 대부분 수공(手功)을 바탕으로 한 무공들이어서, 사람들은 그를 경천신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출도 일 년 만에 두 개의 손만으로 천하를 경악시킨 그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별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운남의 명문인 동방세가 출신이었으나, 그의 무공의 근간은 동방세가가 아니라 광동(廣東)의 괴걸(怪傑)로 알려진 번천객(客) 탁무단(卓武端)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탁무단은 평생을 일정한 거처 없이 홀로 떠돌며 고수들과의 비무를 즐겼던 인물이었는데, 말년에 우연히 본 동방욱의 기재에 감탄하여 그에게 자신의 무공을 알려 주었다.

하나 사승(師承) 관계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동방욱은 그를 사부라 부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탁무단은 죽기 전에 동방욱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으며, 그 제안을 들어주는 것으로 그들 사이의 은원을 매듭짓겠다고 말했다.

탁무단의 제안은 네 명의 고수를 꺾어달라는 것이었다.

그 네 명의 면면은 하나같이 당금 무림에서 상당한 명성을 날리는 절정의 고수들이었으며, 특히 그들 중 한두 명은 당대 최고의 고수라는 무림구봉에 필적한다고까지 알려져 있었다.

탁무단과 그들 사이의 은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고, 동방욱도 알지 못했다. 다만 탁무단은 동방욱에게 그들 네 명의 이름을 밝히며 그들이 신의(義)를 저버린 자들이라고만 했을 뿐이었다.

동방욱에게 무공을 가르친 지 삼 년째 되던 해에 탁무단은 하나의 비급을 꺼내 들었다. 겉표지조차 없는 그 비급은 앞부분이 송두리째 뜯겨 나갔고, 군데군데 오래된 혈흔이 남아 있었다.

그 비급을 바라보는 탁무단의 눈에서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슬픔과 기쁨, 희망과 절망, 아련한 그리움과 격한 분노 그리고 짙은 후회와 번민 등 다채로운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한참이나 착잡한 눈으로 비급을 내려 보고 있던 탁무단은 이윽고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것은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무자(天)의 진전이 담긴 《천무보록(天武寶錄)》이다. 다만 보다시피 전반부인 <신공편(神功編)>은 분실되었고, 후반부인 <절학편(絶學編)>만 내 손에 남게 되었다. 지금은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한때 천무자의 절학을 익히면 능히 천하를 오시할 수 있다는 말이 무림인들 사이에 회자된 적도 있었지.”

탁무단은 자신이 어떤 경위로 《천무보록》을 얻게 되었는지, 왜 전반부를 분실하고 후반부만 남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이 《천무보록》 후반부의 무공을 익히게 되면 반드시 네 명의 고수를 찾아가 그들을 꺾어야 한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동방욱은 천무보록이 절반만 남게 된 것과 그들 네 사람 사이에 모종의 은원이 뒤얽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탁무단이 그 일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문 이상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었다.

“어떠냐? 내 제안을 승낙하겠느냐?”

동방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하겠습니다.”

탁무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얼굴에는 후련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미소가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탁무단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동방욱은 탁무단이 이미 예전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어서 오래 살지 못할 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동방욱이 탁무단의 무공과 천무보록의 후반부 절학을 모두 익히고 세상에 나온 것은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의 일이었다.

동방욱은 탁무단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네 명의 절정 고수들을 차례로 방문했고, 그들을 연파하여 강호 무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네 명의 절정 고수들은 탁무단의 부탁으로 찾아왔다는 동방욱의 말에 누구도 거부감을 보이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비무를 받아 주었을 뿐이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세 번째로 만난 고수는 동방욱의 월강수에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그 말만을 뇌까리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네 번째 고수와 싸웠을 때에야 비로소 동방욱은 《천무보록》의 전반부가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자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는 그야말로 가공스러웠으며, 그자의 무공 또한 무림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천무자의 전반부 신공을 익힌 그자와 후반부 절학을 익힌 동방욱과의 싸움은 그야말로 백중지세여서 한때 동방욱조차도 자신이 승리할 거라는 확신을 갖지 못할 정도였다. 동방욱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자의 천무신공(天武神功)에 대한 조예가 칠성에 머무른 반면, 동방욱은 천무자의 절학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시진에 가까운 처절한 혈투 끝에 동방욱은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지만, 대신에 천무신공에 심맥(心脈)이 크게 손상되어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혼절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동방욱의 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동방욱은 금시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던 심맥의 부상이 완쾌되었음을 알고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심맥이란 원래 타인이 손을 대거나 치료하기가 무척 힘든 부위라서 영약을 먹거나 스스로의 내공으로 손상 부위를 안정시키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동방욱은 강력한 천무신공에 내기가 뒤흔들리고 그 여파로 심맥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적어도 몇 년의 고련(苦鍊)을 하지 않고는 부상을 치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는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이런 외진 곳에서 의식을 잃었으니 방치되었다면 그대로 숨이 끊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그 사이에 치명적인 부상이 깨끗하게 나아져 있으니 그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구명지은(至恩)에 감사드립니다. 은인의 함자를 알려주십시오.”

백발노인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동방욱을 한참이나 보고 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노부는 한목신검주(寒木神劍主)라 하네. 들어본 적이 있는가?”

동방욱은 자신도 모르게 경호성을 토해 냈다.

“한목신검(神劍)의 주인이라면 ・・・・・・ 혹시 신목령주이십니까?”

“노부가 신목령을 이끌고 있네.”

담담한 백발노인의 말에 동방욱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몇 번이나 살펴보았다.

신목령주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마도의 제일 고수가 아닌가?

자신을 구해준 이가 무림구봉보다 오히려 위에 올라있는 전설적인 고수임을 알게 되자 강호의 신출내기나 다름없는 동방욱으로서는 머리가 어지럽고 산만해서 일시지간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신목령주는 정신이 없어 하는 동방욱을 안정시키고는 자신이 이곳에 온 사정을 말해 주었다.

원래 신목령주는 강호의 절정 고수들을 포섭해 자신의 수하로 삼으려는 생각에서 몇 명의 고수들을 물색해 두고 있었다. 동방욱의 손에 쓰러진 네 번째 고수도 그 대상 중 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자는 강호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신목령주는 나름대로 그에게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그를 포섭하기 위해 비밀리에 찾아온 것이다.

그런 신목령주가 목격한 것은 강호 무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무시무시한 싸움이었다. 그 싸움의 대상은 자신이 목표로 정한 인물과 이십 대 젊은 청년이었고, 두 사람의 무공은 마도의 제일 고수로 군림해 온 그로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한동안 신목령주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도 잊고 눈앞의 싸움을 정신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싸움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백중지세라면 강호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우세할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청년이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만큼 청년이 보여 준 수공절학은 경세(世)적인 것이었다.

비록 청년은 마지막 순간에 상대의 막강한 신공을 감당하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지만, 그가 보여 준 놀라운 무공은 신목령주를 감탄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청년의 부상은 치명적이었지만, 강호 제일의 음공을 지닌 신목령주는 어렵지 않게 그의 부상을 치유할 수 있었다.

신목령주의 말을 모두 들은 동방욱은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은혜를 갚을 방법을 물었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신목령주는 동방욱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동방욱의 손에 패해 죽은 고수 대신에 신목령에 몸을 담아 달라는 것이었다.

명문세가의 후손인 동방욱으로서는 상대가 마도제일고수라는 것에 적지 않은 고민이 되었으나,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승낙해야만 했다. 대신 그는 신목령주의 명만을 듣기로 약조했고, 신목령주는 주저 없이 그를 오천왕의 일인으로 삼았다.

동방욱에 대한 신목령주의 신임은 몹시도 두터워서 동방욱이 아버지인 동방수일의 묘를 지키기 위해 삼년상에 들어갔을 때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고, 상을 마친 그가 동방촌에 칩거할 때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그를 불러내지 않았다.

그런 동방욱의 거처로 쾌의당의 고수들이 찾아온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혈창 봉구령을 비롯한 세 명의 절정 고수들을 눈앞에 두고도 동방욱은 전혀 두려워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강호에서 한발 물러나 은인자중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단 하루도 무공을 연마하는 것에 소홀하지 않았고, 《천무보록》의 절학들을 연구하여 발전시키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그는 자신의 최고 무공인 구대절학의 정수를 하나로 모은 무공 한 가지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공의 최고봉인 수강(手罡)을 응용한 것으로, 아직 미완의 그 절학을 동방욱은 천당선엽수(天堂仙葉)라고 이름 붙였다. 천당선엽수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만 있다면 삼대 일의 승부라고 해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것이 동방욱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동방욱은 양손을 쳐들고 허리를 편 상태로 시선을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자세는 한 마리 학처럼 고고했고, 전신에서 풍기는 기상은 호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수한 기름을 바른 손에 몇 가지 물건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고준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멋진 인물이로구나. 이런 고수가 도처에 숨어 있다니 중원의 하늘은 얼마나 높고 거대하단 말인가?”

동방광일이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퉁명스러운 어조를 내뱉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기회가 오면 그 독지계(地界)인지 뭔지를 제대로 쓸 생각이나 하게.”

고준은 싱거운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염려는 붙들어 매시오, 동방 가주. 가주만 제대로 해준다면 내 팔계지옥이 잘못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오.”

동방광일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힐끗 노려보았으나, 더 이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혈창 봉구령의 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며 동방욱의 전면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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