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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15화


군림천하 (915)

봉구령의 창법은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움직이는 방향이나 투로가 여타의 창법과는 전혀 달라서 창술의 고수들과 많이 싸워 보았던 고수라 할지라도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특히 지금처럼 창대는 창대대로 회전하고 창은 창대로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상황이라면 제아무리 대적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피해야 할지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창날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동방욱은 너무도 유연하게 몸을 옆으로 움직여 창의 권역을 훌쩍 벗어났다. 무섭게 선회하여 들어오는 봉구령의 공세를 빠져나가는 그의 움직임이 어찌나 정교하고 자연스러웠던지 처음부터 봉구령이 그쪽 부분의 공간을 비워두고 공격해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봉구령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방금 봉구령이 펼친 것은 혈흔전전(血痕輟轉)이라는 것으로, 혈섬육창의 기수식(手式)과도 같은 초식이었다. 상대의 반응을 타진하고 행동반경을 최소화시켜 뒤이어 전개될 혈섬육창의 위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최적의 수법이었다. 그런데 동방욱이 너무도 수월하게 권역을 빠져나가 버리니 혈섬육창을 펼칠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봉구령이 멈칫하는 사이 때마침 동방광일의 측천척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동방욱의 몸놀림을 예상이라도 한 듯 동방광일의 측천척은 그가 움직이는 방향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사실 동방욱의 조금 전 동작은 동방세가의 비전인 을지선(乙支旋)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에 동방광일은 한눈에 그 경로를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 측천척이 채 몸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동방욱의 신형은 미끄러지듯 주르르 밀려나 너무도 쉽게 측천척의 공세마저 빠져나가 버렸다. 옆으로 빙글 돌았다가 뒤로 물러나는 간단한 동작에 두 절정 고수의 공세가 너무도 허망하게 빗나가 버린 것이다.

동방광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원래 을지선은 양옆으로의 이동을 주로 하는 보법이어서 전후의 움직임은 없다시피 한 무공이었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묘용(妙用)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절정 고수들의 합공을 간단히 피해 버릴 만큼 뛰어난 무공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동방욱은 이 을지선에 전후 동작을 집어넣어서 독보적인 절학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단순한 것 같아도 한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에 다른 동작을 가미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오며 보완될 대로 보완되어 완벽에 가깝게 구성된 무공의 틀을 바꾼다는 것은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것만큼이나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봉구령의 혈창이 다시 호선을 그리며 동방욱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갔다.

쉬아악!

마치 한 마리 뱀이 허공을 유영하며 날아들 듯 창의 움직임은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봉구령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혈섬육창 중의 절초인 비섬(閃)을 펼친 것이다.

동방욱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오른손의 소맷자락을 크게 휘둘러 봉구령의 혈창에 정면으로 맞서 갔다.

고오오!

주위의 공기가 압축되는 듯한 음향이 흘러나오며 세찬 경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이 무공은 번천수(天袖)라는 것으로, 탁무단의 최고 절학 중 하나였다. 

동방광일의 번천수에 대한 조예는 탁무단을 능가하는 것이어서 가볍게 소맷자락이 한 번 휘둘러지는 동작만으로 주위 사방이 온통 가공할 경기의 폭풍에 휘말려 버리는 듯했다.

봉구령의 혈창은 그 거센 경기를 거침없이 뚫고 들어갔다.

파파파파!

혈창에 파쇄된 경기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주위를 폐허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 여파가 어찌나 험악하던지 호시탐탐 동방욱을 노리던 동방광일조차 몇 걸음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원래 봉구령의 비섬은 공기와 공기 사이의 흐름을 교묘하게 뚫고 들어가 상대를 제거하는 수법이어서 특히 동방욱처럼 맨손 무공을 주로 사용하는 고수들에게는 치명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장력을 펼쳐도 그 장력의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 들어가기 때문에 맨손으로는 막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봉구령이 비섬을 자신 있게 펼친 것도 이 수법이라면 혈흔전전을 대신해 동방욱의 움직임이나 반응을 극도로 제한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봉구령의 창은 무서운 속도로 동방욱이 펼쳐낸 강기의 소용돌이를 뚫고 들어갔다. 하나 봉구령의 안색은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무거워졌다.

강기 속을 뚫고 들어갈수록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압력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압력은 갈수록 가중되어서 마침내는 더 이상 창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거세어졌다.

부르르.

봉구령의 손에 쥐어있는 창이 세찬 떨림을 일으키며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조금씩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속도라면 더 이상의 전진은 무의미한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봉구령은 비섬을 취소하고 창을 거두어들였다가 이내 더욱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내찔렀다.

쐐애액!

창날이 무섭게 선회하며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기세로 강기의 폭풍 속을 파고 들어갔다. 이것은 혈섬육창 중의 파섬(破閃)이라는 초식으로, 회전력을 극대화하여 상대의 몸을 뚫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비섬에 이은 파섬의 연환은 확실히 효과적이어서 봉구령의 창은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휘몰아쳐 오던 동방욱의 경기를 관통하여 마침내 그의 지척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동방욱의 신형이 반 바퀴 회전하며 소맷자락 사이에 숨겨져 있던 오른손이 번갯불 같은 광망을 토해 냈다.

땅!

귀청이 찢어질 듯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봉구령의 창이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봉구령은 손아귀가 찢어질 듯한 충격을 느꼈으나, 오히려 눈을 부릅뜨며 수중의 창을 더욱 빠르게 갈지(之)자로 그어댔다.

파파파팍!

주위가 온통 창날에 갈가리 찢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가 지금 펼친 삭섬(削閃)은 창날을 옆으로 기울여 휘두르는 초식으로, 혈섬육창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살벌한 무공이었다. 이 수법에 당하게 되면 상대는 전신이 난자되어 제대로 된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동방욱은 철탑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채 두 주먹을 풍차처럼 마구 휘둘렀다.

우우우웅!

순식간에 수백 개의 권영(影)이 폭풍노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은은한 뇌성이 들려왔다. 이것이 바로 동방욱의 구대절학 중에서도 강력하기로 유명한 풍뢰질풍권이었다.

풍뢰질풍권은 탁무단의 풍뢰권(風雷拳)에 천무자의 무공인 질풍노도권(疾風怒濤拳)을 융합하여 동방욱이 스스로 창안한 무공으로, 막강한 위력의 풍뢰권과 빠르고 강맹한 기세를 지닌 질풍노도권의 장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상승의 절학이었다.

이 무공은 사용하면 할수록 더욱 위력이 배가되는 특성이 있어서 처음에 제대로 막거나 분쇄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제아무리 천하의 고수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파파팍!

삭섬의 위력은 과연 놀라워서 동방욱의 소매가 찢어지고 양손이 훤히 드러났다. 그와 함께 그의 팔뚝에 십여 개의 혈흔이 생겨났다.

하나 동방욱은 팔의 부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주먹을 연속적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쿠쿠쿠쿠쿠…….

조금 전만 해도 귀를 기울여야만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했던 뇌성이 완연하게 들릴 만큼 커지며 세찬 권풍이 눈을 못 뜰 정도로 강력하게 몰아쳐 왔다. 풍뢰질풍권이 연환되면서 비로소 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봉구령은 갈수록 강력해가는 동방욱의 주먹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언뜻 보기에는 정면으로 맞서지 말고 뒤나 옆으로 피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 같았으나, 예리한 그의 감각은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저 강력한 주먹의 공세를 피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치 쇠로 된 거대한 수레바퀴가 몰려오는 듯한 저 무시무시한 주먹의 폭풍 속으로 선뜻 달려들 자신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봉구령은 혈섬육창을 완성한 후 강호의 어떤 고수와의 싸움에서도 약세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몇 수 겨루지도 못하고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짐작도 못 했던 일이다.

‘경천신수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이야! 왜 당주가 굳이 우리 세 사람이 모두 가야 한다고 그렇게 거듭 당부했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바로 그 순간, 하나의 물건이 섬뜩한 빛을 뿌리며 동방욱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왔다.

그 물건은 거무튀튀한 색의 철척이었는데, 철척에 담긴 기운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스치기만 해도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도 박살 나 버릴 것만 같았다.

시기적절하게 동방광일이 측천척을 휘두르며 달려든 것이다.

동방광일은 이미 동방욱의 무공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성명절기와도 같은 흑룡기공(黑龍氣功)과 광룡투(狂龍鬪)를 전력을 다해 펼치고 있었다.

동방욱은 놀랍게도 풍뢰질풍권을 거두고 물러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두 주먹을 휘두른다면 뒤쪽에서 날아드는 측천척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는 계속 두 주먹을 휘둘러 봉구령을 향한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봉구령도 더 이상은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동방광일이 가세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해 혈창을 휘두르며 동방욱의 주먹에 정면으로 맞서 갔다. 혈섬육창 중의 절초인 도섬(屠閃)과 육섬(戮閃)이 거푸 펼쳐지며 사방이 온통 시퍼런 창날의 그림자에 휩싸여 버렸다.

파파파파팍!

두 개의 기병과 두 주먹이 불러일으킨 거센 폭풍이 주위 사방을 폐허로 만들었고, 세찬 흙먼지와 잘린 수목의 파편들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크윽!”

봉구령은 혈창으로 동방욱의 옆구리에 피 구멍 하나를 뚫어 놓았으나, 풍뢰질풍권을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삼권을 격중당하고 말았다.

이 장이나 물러나는 그의 입과 코로 시커먼 핏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나 봉구령은 오히려 눈을 부릅뜨며 미친 듯이 앞을 주시했다.

동방욱은 여전히 처음의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담담한 신색도 여전했고 청명하게 빛나는 눈빛도 그대로였다.

왼쪽 옆구리에 작은 구멍이 뚫려 핏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그는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한 자세를 유지한 채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는 동방광일이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지 그의 낯빛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욱!”

마침내 그는 참지 못하고 한바탕 시커먼 피를 게워 내며 휘청거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측천은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동방욱은 여전히 그 자세로 서 있더니 천천히 손을 돌려 자신의 등 쪽을 더듬었다.

팟!

힘을 주자 그의 등에서 한 줄기 핏물이 뿜어 나오며 동시에 그의 손에 측천척이 쥐어져 있었다. 동방욱은 측천척에 묻어 있는 붉은 핏물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가문의 신물(信物)에 동방가의 피가 묻게 되었군.”

동방광일은 피를 토해 낸 다음에야 겨우 신색을 회복했으나, 그 말을 들었는지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동방욱은 손에 들고 있는 측천척을 자신의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걸 본 동방광일이 버럭 노성을 질렀다.

“무슨 짓이냐?”

동방욱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문의 신물에 더 이상 혈족의 피를 묻힐 수는 없지.”

동방욱은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요. 내 손은 측천척과 달라서 당신의 피를 묻히는 걸 마다하지 않을 테니.”

동방광일의 낯빛이 핼쑥하게 변하며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동방욱이 자신을 향해 성큼 다가오자 동방광일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망할 고가 놈아! 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기다리게 할 참이냐?”

그 순간, 고준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성질도 급하기는. 이제 막 완성되었으니 그렇게 안절부절못할 것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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