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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20화


제374장 원가노착(寃家路)

군림천하 (920)

한적한 산길을 마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아주 호화롭거나 크지는 않았으나, 양쪽으로 주렴이 늘어진 창문이 나 있고 두꺼운 차양까지 달려 있어서 상당히 쾌적한 느낌을 주었다.

심지어 마차 밖의 마부석에도 따가운 햇볕을 가릴 수 있는 가림막이 있어서 한낮의 더위를 피해 길을 가기에는 더할 수 없이 적합해 보였다.

마부석에는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중년인이 앉아 있었는데, 가림막 밑에 있어도 여전히 더운지 연신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 내고 있었다. 

“제길. 정말 덥군. 이제 더위가 가실 때도 되었는데 어째 더 더워지는 것 같구나.”

마부는 투덜거리면서도 말이 산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능숙한 솜씨로 마차를 조종했다.

주위는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이 이어져 있는 산길은 짙은 녹음이 우거져 있었고, 흰 구름 몇 점이 간간이 떠다니는 하늘은 한없이 높고 푸르러서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비록 날이 덥기는 했으나, 인적 없는 호젓한 산길을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지나가는 것은 나름대로 운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마부는 땀투성이인 상태에서도 가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흐흐흥! 흥흥!”

정체 모를 가락을 흘려 내던 마부가 문득 고개를 들어 멀리 앞을 내다보고는 반색을 했다.

“저곳이 낙일정(落日亭)이로구나!”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고 있는 산길 저편이 탁 트이며 한 채의 정자가 자리해 있었다. 더운 날씨에 지쳤던 마부는 쾌재를 부르며 마차를 빠르게 그쪽으로 몰고 갔다.

정자 가까이에 이르자 구릉 아래로 제법 장쾌하게 펼쳐진 벌판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정자는 구릉과 벌판의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기에 높은 고개는 아니었어도 정자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넓혀진 시야와 함께 제법 서늘한 바람을 쐴 수 있었다. 또한 더위를 피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정자가 서 있는 위치가 공교롭게도 해가 떨어지는 서향(西向)이기에, 저녁 무렵이면 벌판 너머로 지는 붉은 해를 볼 수 있어서 이곳 일대에서는 풍광이 좋기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낙일정이란 이름도 그 때문에 붙게 된 것이었다.

마부는 마차를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세우고 마차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낙일정에 도착했습니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차례로 마차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주렴을 걷고 먼저 나온 사람은 남색 유삼(儒衫)을 입고 머리에는 노란색 문사건(巾)을 쓴 이십 대 후반의 준수한 청년이었다.

남삼 문사는 한 손에 청옥(靑玉)으로 만든 섭선을 들고 있었는데, 입은 의상과 잘 어우러져서 상당히 고아(高雅)한 기상을 뿜어내고 있었다.

뒤이어 새하얀 옷을 입은 백발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잔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여 젊은이를 연상케 했는데, 막상 머리는 검은 터럭 하나 없이 깨끗한 백발이어서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사내였다.

그럼에도 이상함보다는 비범함이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중년인의 수정처럼 차갑고 맑게 빛나는 두 눈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흡사 인형의 눈인 듯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그 눈은 왠지 모르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는 힘을 지닌 것 같았다.

백발 중년인과 남삼 문사는 마부의 안내를 받으며 느긋한 걸음으로 정자로 들어섰다.

정자에는 이미 몇 사람의 선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두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젊은이였다.

노인 중 한 사람은 청의를 입고 문사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준수하고 앉아 있는 자세가 꼿꼿하여 노인답지 않게 헌앙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당장이라도 관 속으로 들어갈 듯한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수수한 마의를 입고 있는 그 노인은 허리도 구부정하고 앉아 있는 자세도 금시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여서 옆에 있는 건장한 모습의 청의 노인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두 노인 옆에는 한 명의 젊은 청년이 조용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두 노인을 시종(侍從)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간단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마침 청의 노인이 술잔을 비우자 청년은 공손하게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주향(香)이 정자 안을 감돌다가 불어오는 산바람에 흔들리며 조금씩 사라져 갔다.

정자로 들어오던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백발 중년인과 남삼 문사는 별 반응이 없는 반면에 그들 뒤쪽에서 따라오던 마부는 코를 킁킁거리며 연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 모습은 상당히 천박해 보였지만, 그래서 더욱 그의 심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구라도 오늘같이 무더운 날이면 시원한 바람이 부는 전망 좋은 정자에 앉아 차가운 술 한잔을 기울이고 싶을 것이다.

백발 중년인과 남삼 문사도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그러한 마음이 없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줄곧 술자리를 기울이는 노인들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일 것이다.

그들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청의 노인이 그들을 돌아보며 점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침 술이 조금 남아 있는데, 괜찮다면 한 잔씩 하시겠는가?”

백발 중년인과 남삼 문사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더니 이내 청의 노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삼 문사가 정중한 자세로 두 노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남양(南陽)의 송(宋) 모(某)이며, 이 분은 저의 외숙이십니다.”

청의 노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답례했다.

“나는 북평(平)에서 온 양가(楊)일세. 이런 날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불편해하지 말고 이쪽으로 앉도록 하게.”

“결례를 범하겠습니다.”

남삼 문사가 청옥 섭선을 가볍게 흔들며 자리에 앉는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절도가 있어서 격조를 느끼게 했다.

백발 중년인도 가볍게 인사하고는 남삼 문사의 옆자리에 앉았다.

청년이 눈치 빠르게 새로운 술잔 두 개를 꺼내어 두 사람의 앞에 놓자, 청의 노인은 손수 술병을 들어 그들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것은 옥빙주(玉氷酒)라는 것인데, 차갑게 해서 마시면 그런대로 한여름의 더위를 잠시 잊을 만한 풍취를 느낄 수 있다네.”

어찌 된 일인지 남삼 문사와 백발 중년인은 선뜻 술잔을 들지 않고 청의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의 노인은 이내 그들의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자신의 머리를 살짝 두드렸다.

“내 정신 좀 보게. 아무리 사해(四海)가 동도(同道)라 하나 강호의 일에는 도리와 순서가 있는 법이거늘.”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술병을 기울여 새롭게 술잔에 따라서 그 또한 들이마셨다.

거푸 두 잔의 술을 마신 다음에야 비로소 청의 노인은 그들을 향해 온화하게 웃음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제법 괜찮은 술일세. 오늘 같은 날에는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군.”

그제야 남삼문사도 잔을 들어 그를 향해 인사하고는 술을 기울였다.

강호에서 낯선 타인이 따라 주는 술을 함부로 마시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주인 된 자가 먼저 술을 마셔서 술에 아무런 수작을 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남삼 문사는 천천히 술을 마신 다음 잔을 내려놓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좋은 술이군요. 차갑게 식힌 술이 몸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심산유곡의 계류(溪流)에 몸을 담근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하! 술맛을 아는 젊은이로군. 그게 바로 옥빙주의 맛일세.”

남삼 문사가백발 중년인을 돌아보았다.

“외숙께서도 한 잔 드시지요. 외숙의 입맛에 딱 맞으실 겁니다.”

내뱉었다. 백발 중년인은 주저하지 않고 술잔을 들어 단숨에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뜨며 짤막한 음성을 내뱉었다.

“좋군!”

간단한 말이었으나, 차갑고 냉정한 외모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어서인지 다른 어떤 말보다 더 좋은 찬사로 들렸다.

청의 노인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쪽 분도 주도(酒道)에 정통하신 것 같구려. 좋은 날, 좋은 곳에서 한 잔 술의 가치야말로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 아니겠소?”

남삼 문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올해에 마셨던 술 중에서 지금의 한 잔이 가장 값진 것 같습니다. 다만 아쉬운 건…….”

청의 노인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쉬운 게 무언가?”

남삼 문사는 빈 술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이런 좋은 술에 어울리는 안주가 없다는 겁니다. 이 술에 딱 맞는 안주만 있었어도 술의 가치가 몇 배는 올랐을 것 같군요.”

“허헛! 듣고 보니 그렇군. 하나 우리에게는 이미 나름의 안주가 있다네.”

“그게 무엇입니까?”

청의 노인의 얼굴에 한 줄기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옛 추억이라고나 할까? 회상, 아련한 그리움・・・・・・ 그런 것 말일세.”

“두 분은 추억을 안주 삼아 술을 기울이고 계셨군요. 정말 멋진 일입니다.”

청의 노인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추억이 좋은 안주이기는 하지만 그걸 곱씹는 게 꼭 멋진 일은 아닐세. 때로는 씁쓸하고, 때로는 아쉬우며,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지.”

“오늘은 어떠셨습니까?”

청의 노인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나는 아쉬웠네.”

남삼 문사의 시선이 지금까지 한쪽에서 아무 말 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마의 노인에게로 향했다. 마의 노인은 정자 아래의 풍광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끔씩 자신의 앞에 놓인 술을 홀짝거리고 있을 뿐, 이쪽의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노인장께선 어떠셨습니까?”

마의 노인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시선을 정자 밖에 둔 채 아무런 대답도 없던 그의 고목처럼 갈라진 입술이 열린 것은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고통스러웠지.”

너무 낮고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음성이어서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었으나, 남삼 문사는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다시 낭랑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떤 추억이기에 이렇게 좋은 술을 마시면서도 그러셨습니까?”

마의 노인은 천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름살 속에 파묻히다시피 깊게 자리한 그의 두 눈은 의외로 투명할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마의 노인은 그런 눈으로 남삼 문사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자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을 걸세.”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자네는 자식이 없을 테니 말일세.”

남삼 문사는 손에 든 섭선으로 손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아! 자식에 대해 추억을 하셨군요.”

“자식보다 더 아끼는 녀석이었지.”

“그분이 어떻게 되셨습니까?”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 버렸네. 그렇게 훌쩍 가 버릴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는데 말이지.”

남삼 문사는 혀를 찼다.

“저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군요.”

마의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타깝지는 않아. 다만 가슴 한편이 고통스러울 뿐이지.”

남삼 문사도 말로 그를 위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마의 노인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두 늙은이는 추억을 안주로 삼았지만, 확실히 자네에게는 다른 안주가 필요하겠군.”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야. 자네에게 맞는 안주가 있을 걸세. 기대해도 좋네.”

마의 노인이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젊은 청년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청년이 한쪽으로 가서 보자기로 싸인 네모난 상자 하나를 꺼내어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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