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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21화


군림천하 (921)

붉은 보자기에 싸인 상자 하나!

그것을 보는 순간, 남삼 문사는 물론이고 백발 중년인 또한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청년이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자 비릿한 내음이 풍겨 왔다.

마의 노인은 두 사람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든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람은 둘인데 안주가 하나면 서운하지 않겠나?”

청년은 머리를 조아리고는 다시 한편에서 또 다른 상자 하나를 꺼내 왔다. 이번의 상자 또한 피처럼 붉은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두 개의 상자를 남삼 문사와 백발 중년인의 앞에 각각 하나씩 내려놓은 청년은 다시 한쪽에 가서 처음의 자세 그대로 조용히 서 있었다.

“풀어 보게. 어떤 안주인지 궁금하지 않나?”

남삼 문사와 백발 중년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깐 스치듯 교차되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무언의 합의가 있었던 듯 남삼 문사가 먼저 상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보자기를 푸는 남삼 문사의 손길은 침착했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마침내 보자기를 풀자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삼 문사가 돌아보자 마의 노인이 뚜껑을 열어 보라는 듯 가벼운 손짓을 했다. 남삼 문사는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갑자기 역한 피비린내가 진하게 흘러나오며 정자 안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바뀌었다. 조금 전만 해도 주향이 흘러넘치고 멋진 시구라도 흥얼거려야 어울릴 것 같은 낭만적인 공간이었던 정자 안이 갑자기 피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으스스한 곳으로 변해 버린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활짝 열린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아직 핏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누군가의 잘린 머리통이었던 것이다. 목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상자 바닥에 질펀하게 고여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지 눈을 부릅뜬 채 머리가 잘린 그 인물은 육십이 넘은 호탕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턱밑으로 잘린 부위는 예리하기 그지없어서 유리의 단면처럼 매끄러웠다. 흘러내린 피와 굳어버린 근육 때문에 조금 지저분해지긴 했으나, 인간의 목이 이렇게 깔끔하게 잘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특이한 모습이었다.

남삼 문사가 물끄러미 그 노인의 크게 뜨인 눈을 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동방광일…….”

목의 주인은 놀랍게도 운남성의 패자이며 동방세가의 가주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 온 패존 동방광일이었다.

때마침 들려온 마의 노인의 목소리는 마치 죽음을 부르는 저승사자의 귀곡성처럼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어떤가? 그 정도 안주라면 만족할 만하겠나?”

남삼 문사는 아무 대답 없이 이번에는 다른 상자의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 상자 또한 처음의 상자와 비슷한 크기에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상자의 뚜껑을 여는 남삼 문사의 손은 한 치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상자가 열리고 다시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그 상자 속에도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목부터 잘린 머리가 들어 있었다. 냉정하게 생긴 중년인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굳은 채로 상자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남삼 문사는 그 중년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마의 노인의 주름진 눈이 그를 향했다.

“이번 안주는 어떤가?”

남삼 문사는 대답 대신 조용히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내가 준비한 안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마의 노인이 여전히 그를 빤히 쳐다본 채 말하자 남삼 문사는 정색을 했다.

“봉구령은 한낱 안주로 쓰이기에는 아까운 인물입니다.”

“하긴. 그자는 제법 강단이 있어 보이더군. 마지막 순간까지 아쉬운 소리 같은 건 늘어놓지 않았어. 그에 비해…………”

마의 노인이 턱으로 동방광일의 머리가 들어 있는 다른 쪽 상자를 가리켰다.

“그놈은 쓰레기야. 살려만 준다면 무슨 짓이든 할 기세였지. 덕분에 자네들이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일을 던 셈이지만 말이야.”

남삼 문사는 그제야 저간의 사정을 알겠는지 눈빛이 한차례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래서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군요.”

“이곳의 풍광이 제법 좋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덕분에 잠시 먼저 간 녀석에 대한 추억에 잠길 수 있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네.”

“이들 외에 두 사람이 더 있을 텐데요.”

“고준이라는 녀석하고 젊은 애송이 말인가? 나도 그들이 함께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보이지 않더군. 고준이라는 녀석이 그렇게 독을 잘 쓴다고 해서 제법 기대를 했는데 말이지.”

마의 노인의 음성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나, 남삼 문사는 왠지 전신이 싸늘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천 개의 칼날같이 예리한 무형의 기운이 정자 안을 가득 메웠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남삼 문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가공할 위협만을 남긴 채 사라진 무형지기 때문인지 아니면 동방광일과 봉구령 외의 두 사람이 마의 노인의 눈을 피해 참변을 면했기 때문인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군요.’

마의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화 같은 게 아닐세. 아까도 말했지 않나? 난 그저 고통스러웠을 뿐이야.”

마의 노인은 문득 시선을 돌려 정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그리 높지 않은 구릉이었으나, 정자 밑으로 낮은 야산과 평야가 줄지어 늘어선 광경은 상당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끊어질 듯 끝없이 이어진 야산의 산줄기는 아득하게 멀리 보이는 높다란 고산의 산자락까지 연결되었다.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푸른 하늘 아래 줄기줄기 이어져 가는 산등성이의 흔적은 아련한 그리움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 같기도 했다.

마의 노인은 한동안 가만히 그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지. 그 아이가 가진 천재적인 무학의 재질 때문만은 아니었어. 다만 별빛처럼 빛나는 두 눈과 의지 견정한 마음새 그리고 올곧은 자세와 행실 등이 눈에 들어온 거지. 그건 꼭 내가 마음속으로 줄곧 바랐던 이상적인 자식의 모습이었지.”

“……!”

“알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식이 없거든. 그래서 늘 그런 자식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는데, 그것에 완벽하게 딱 들어맞는 젊은 녀석이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난 거야. 그러니 그때 내 기분이 어땠겠나?”

마의 노인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한 줄기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데 남삼 문사에게는 그 웃음이 다른 어떤 웃음보다 더욱 무섭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지. 허구한 날 자기 아들 자랑을 일삼던 동생 녀석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군. 그렇게 그 녀석은 내 아들 같은 존재가 되었던 거야.”

마의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남삼 문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주름진 두 눈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빛이 담겨 있지 않아 무심해 보였으나, 남삼 문사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흐르고 있었다.

“자, 이제 말해 보게. 그런 녀석이 간악한 자들의 술수에 당해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을 것 같나?” 남삼 문사는 마의 노인이 굳이 대답을 바라고 묻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 그의 몸은 어느새 흘러내리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의 노인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는 순간, 날카롭게 벼려진 거대한 칼날이 자신의 몸을 노리고 날아드는 듯한 압도적인 느낌에 정신이 아찔했던 것이다. 그 거대한 칼은 금시라도 그의 몸을 반쪽으로 잘라 버릴 듯 가공할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바짝 곤두세운 신경과 바닥까지 끌어올린 공력 때문에 전신의 솜털이란 솜털은 모두 곤두서 있었고, 체내의 근육마저 제멋대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남삼 문사가 처음의 자세를 유지한 채 그 기운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정력(定)과 내공이 그 나이대의 젊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심후하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의 노인은 여전히 조용한 눈으로 남삼 문사를 응시한 채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나는 생각했지. 왜 나만 이렇게 고통스러워해야 하는가? 누군가가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면 그도 또한 의당 이러한 고통을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네를 찾아온 거야.”

마의 노인의 시선이 남삼 문사의 얼굴을 지나 전신을 차례로 훑었다.

“듣기로는 쾌의당주가 자네를 끔찍이 아낀다고 하더군. 그자도 나처럼 자네를 자식같이 여기고 애착을 보인다는 말을 들었네. 지금 이렇게 직접 보니 확실히 신체도 잘 단련되어 있고 재질도 좋아 보이는군. 그자가 왜 다른 두 명의 제자와는 달리 옆에 놓고 좀처럼 바깥으로 내보이지도 않았는지 이해할 것 같네. 자네 정도라면 충분히 나의 그 녀석과 견줄만한 대상이 될 수도 있겠군.”

“……!”

“자네를 잃게 된다면 그자도 나와 비슷한 고통을 맛보게 되겠지. 그리고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될 거야. 다른 사람의 역린(逆鱗)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지.”

남삼 문사의 몸이 처음으로 한 차례 휘청거렸다. 하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마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을성도 강하고 심성도 견고해 보이는군. 확실히 좋은 인재야. 오늘 준비한 두 개의 안주로는 왠지 아쉬워 보였는데, 자네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마무리가 될 수 있겠어.”

주르르!

남삼 문사의 코로 시커먼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남삼 문사는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마의 노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때 지금껏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백발 중년인이 번개같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어 마의 노인의 가슴을 후려치려 했다.

하나 그의 손이 채 절반도 내밀어지기 전에 마의 노인은 장난처럼 오른손을 슬쩍 흔들었다.

파앙!

아무런 기척도 없이 허공 한복판에서 파공음이 터져 나오며 백발 중년인이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몸이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는 신형을 비틀어 허공에서 반 회전을 하며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하나 완벽히 자세를 잡지 못하고 다시 두 걸음이나 물러난 뒤에야 겨우 몸을 안정시켰다.

백발 중년인의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백지장보다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마의 노인은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사방신 중에서 안 나온 놈은 하나뿐이니 필시 네가 북방신(北方神)인지 뭔지 하는 자로구나.”

백발 중년인은 몇 차례 심호흡을 한 후에야 겨우 들끓는 진기를 가라앉혔는지 처음의 안색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바로 보았소. 내가 바로 북방신을 맡고 있는 냉우림(冷宇林)이오.”

마의 노인은 그의 이름을 들어보았는지 심드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북해에 빙궁(宮)인지 설궁(宮)인지 하는 곳에서 빙제(帝)라고 스스로 칭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그게 바로 너로구나.”

마의 노인의 조롱 섞인 말에도 백발 중년인은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강호의 마도를 석권하고 있는 신목령의 주인에게 비할만한 이름은 아니오.”

“알긴 아는구나. 그렇게 자기 주제를 잘 알고 있는 놈이 감히 나에게 덤벼든 것이냐?”

“나는 그저 천하를 위진시키는 신목령의 주인이 젊은 사람을 핍박하는 것을 참지 못했을 뿐이오.”

“네가 참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내가 감히 신목령의 주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소? 다만 한마디만 하도록 하겠소.”

의외로 당당한 기세를 잃지 않고 있는 냉우림을 묘한 눈으로 보고 있던 마의 노인이 피식 웃었다.

“말해 보거라.”

“얽힌 매듭은 당사자들끼리 풀도록 하시오. 애꿎은 사람 잡지 말고.”

그 순간, 마의 노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고목처럼 갈라진 주름살 속에 잠기듯 숨어 있던 두 개의 눈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무시무시한 기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냉우림을 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남삼 문사를 지나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그 사람은 마의 노인을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마침내 만나게 되었구려. 내가 바로 매듭을 풀 사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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