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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22화


제375장 강호유원(江湖留怨) (1)

군림천하 (922)

진산월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보았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흰 구름 몇 점이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옆에서 걷고 있던 전흠이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는 진산월의 모습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한적한 산길이었다.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태행산(太行山)의 끝자락에 있는 이름 모를 야산의 중턱을 지나는 길로, 몇 개의 고개만 더 넘으면 낙양으로 향하는 관도(官道)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저 멀리 병풍처럼 늘어선 태행산의 험준한 산세가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산길을 따라 묵묵히 걷고 있던 진산월이 문득 허공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멈춘 것은 높은 산자락에 유달리 커다란 뭉게구름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 다음이었다.

솜덩이를 뭉쳐 놓은 듯한 구름은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산과 하늘을 경계로 커다란 몸을 반쯤 누인 채 걸터앉아 있었다.

그 구름은 한편으로는 연인의 눈빛처럼 부드러워 보였고, 한편으로는 완만한 곡선을 그려내는 여인네의 사랑스러운 몸짓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샘물처럼 솟아나는 누군가의 그리운 얼굴인지도 몰랐다.

“장문 사형.”

끊임없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있던 진산월은 자신을 부르는 전흠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냐?”

전흠이 날카로운 눈으로 슬쩍 한 곳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산월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확실히 그 일대의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있었다. 게다가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은은한 폭음이 들리니, 상당히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진산월은 잠시 그 일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오른쪽의 산자락을 타고 백여 장을 더 가면 상당히 울창한 송림(松林)이 나타난다. 소리가 그 송림 안쪽에서 들려오기에 겉으로 보아서는 그 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짙게 우거진 송림 안쪽에서 희끗한 인영들이 거푸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대여섯 명 이상의 인원들이 모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강호에서 자신과 관련도 없는 싸움에 무작정 끼어드는 일은 금기시되고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송림으로 다가갈수록 싸움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휘파람을 연상케 하는 듯한 파공음과 격렬한 마찰음은 듣기만 해도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가공스러웠다.

휘이이익!

쿠앙!

그 순간,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송림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강력한 여파가 휘몰아쳐 오자, 전흠이 다소 놀란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 싸우고 있는 것 같군요. 이런 외진 곳에서 저런 수준의 고수들이라니, 혹시 쾌의당이나 신목령의 고수들이 아닐까요?”

진산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신중한 동작으로 수풀을 헤치며 숲속으로 다가갔다.

송림은 멀리서 볼 때보다 더 넓은 구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무도 한층 우거져서 안이 제대로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이 막 송림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할 때였다.

“멈추시오.”

갑자기 숲속에서 누군가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진산월과 전흠은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숲이 워낙 울창한 데다 음성 자체에 기이한 울림이 담겨 있어서 음성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나 음성의 주인은 그들을 훤히 보고 있는지 재차 말을 이었다.

“이제 보니 앞날이 창창한 젊은 친구들이로군. 지금은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발길을 돌리도록 하게.”

전흠이 진산월을 슬쩍 쳐다보고는 한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이곳은 엄연한 대명천지의 빈 땅이거늘 왜 들어갈 수 없단 말이오?”

음성의 주인은 껄껄 웃었다.

“하하. 패기가 좋은 친구로군. 다 자네들을 생각해서 하는 소리일세. 지금 이곳은 잠시 대명천지를 벗어난 곳이니 그리 알고 물러가도록 하게.’

마치 물가에서 노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그 음성에 전흠의 짙은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나는 지금껏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한 적이 없소. 하니, 이곳이 내 걸음을 돌릴 수 있다고는 믿지 못하겠소.” 

전흠이 자극적인 말로 도발을 했음에도 음성의 주인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도 소싯적에는 그런 마음으로 살았지. 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때로는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하는 일도 있고,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곳이 있음을 알게 되었네. 자네가 이곳에 들어와 봤자 흉다길소(凶多吉少)일 뿐이니, 순간적인 호기심에 몸을 망치지 말길 바라네.”

전흠은 여전히 기세등등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내가 본 것만 믿소. 무엇이 흉이고 무엇이 길인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소. 내가 끝까지 들어가겠다고 하면 어쩔 셈이오?”

“허허. 참으로 곤란한 친구로군. 그렇게 자신한다면 들어와 보도록 하게.”

전흠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뜩였다.

“나를 막지 않겠다는 말이오?”

“사실 막을 필요도 없는 일이지. 어차피 자네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테니 말일세.”

“그게 무슨 말이오?”

“이 일대는 내가 뿌려 놓은 독으로 인해 독지(地)로 변한 지 오래일세. 내가 자네의 발길을 돌리려고 한 건 자네들이 영문도 모르고 독지로 들어왔다가 애꿎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 안타까워서였네. 그런데 자네가 굳이 목숨까지 바쳐 가며 뜻을 고집하겠다면 나로서는 그 의지를 존중해 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전흠은 절로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지라는 단어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대의 음성 또한 얼마 전에 들 본 적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독지라면…… 혹시 당신은 만독곡의 주인인 독선 고준이 아니오?”

지금까지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음성의 주인이 처음으로 놀란 빛을 감추지 않았다.

“자네가 나를 어찌 알고 있는가?”

전흠은 그들이 동방욱을 제거하는 장면을 몰래 훔쳐보았다고 할 수 없기에 재빨리 머리를 굴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영민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독지라는 말에 독지계가 떠올랐소. 독선의 독지계가 능히 강호일절(江湖絶)임을 누가 모르겠소?”

“흐음, 내가 중원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중원에 내 명성이 그렇게 널리 퍼져 있다니………… 뜻밖이로군.”

그럼에도 반신반의하는 듯 고준의 음성에는 다소 어리둥절해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독지라는 말로 당신의 정체를 알 수 있겠소?”

고준은 잠시 생각에 잠겨 아무 대답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패기는 넘치지만 그리 영명해 보이지는 않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 자네 말이 맞다고 해 두세.”

전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을 때, 고준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무튼, 내 독지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면 절대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도 알겠군. 그러니 더 이상 심력을 소비하지 말고 돌아가도록 하게.”

고준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전흠도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거듭된 도발에도 일절 대응하거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고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들어오라고 해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던 동방욱이 어떤 꼴로 쓰러지는지를 똑똑히 보았던 전흠으로서는 독지계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대로 몸을 돌려 원래의 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이미 들어서 있었다.

하나 진산월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전흠이 어찌할지를 몰라 자신을 쳐다보자 진산월은 성큼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전흠이 깜짝 놀라 그를 제지하려 했으나, 그 전에 고준의 음성이 먼저 들려왔다.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독지계에 들어오게 되네. 그다음부터는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네.”

진산월은 막 두 번째 걸음을 내디디려다 몸을 멈추고 숲속의 어느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정말이오?”

진산월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 흠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뒤이어 그들에게서 오 장여 떨어진 소나무 위에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인상의 그 사내는 몹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로 진산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회절음(音) 수법을 단번에 파악하다니 놀라운 친구로군. 자네는 누군가?”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그보다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오?”

고준이 가슴을 두드리며 당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엄연한 한 문파의 주인인 내가 자네를 속여 무엇 하겠는가? 이곳에는 확실히 독지계가 펼쳐져 있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안으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물은 거요.”

고준이 눈을 부릅떴다.

“일단 독지계가 펼쳐진 이상, 누구도 독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네. 이건 내 이름을 걸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일세.”

진산월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송림 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는 왠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죽고 싶다면 무슨 짓이든 못 할까? 제아무리 무림의 절정 고수라 해도 독지계에 빠지면 어떤 참혹한 모습이 되는지 자네는 짐작도 못 할 걸세.”

“나도 내가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일은 믿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오.”

고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반쯤 벌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들 모두 죽기 딱 좋은 성격이로군.”

“하지만 이렇게 살아 있지.”

“정말 누군지 모르지만 말 하나는…….”

혀를 차던 고준이 갑자기 안력을 돋우어 진산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행색이 어딘지 낯설지가 않군. 자신감을 넘어 광오해 보이는 말씨하며…..”

고준의 시선이 진산월의 냉정함을 넘어 무심함으로 가득 찬 두 눈을 지나 왼쪽 뺨의 칼자국과 훤칠한 키 그리고 옆구리에 매달린 용영검을 차례로 훑었다. 갈수록 그의 두 눈이 크게 열리며 경악 어린 빛이 담기기에 이르렀다.

“왼쪽 뺨의 그 칼자국과 고검(劍), 주위를 질식시킬 듯한 기도・・・・・・ 그리고 이십 대의 젊은 나이…………. 자네는 혹시…………?”

바로 그때였다.

쿠아아앙!

송림 안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거센 경기가 송림 일대를 쓸어 버릴 듯이 어마어마한 한 기세로 구름처럼 일어나 사방을 휘몰아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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