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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24화


군림천하 (924)

송림 안은 겉에서 보기보다도 훨씬 넓었다.

우거진 소나무 숲을 지나면 크고 작은 몇 개의 공터가 나오는데, 그중 가장 동쪽의 공터에서 두 개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청의를 입은 문사 차림의 노인이 백의를 입은 백발 중년인과 갈의 청년을 상대로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무시무시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무공 자체는 웅혼한 장력과 기이한 신법을 지닌 청의 노인이 앞서 보였으나, 백발 중년인과 갈의 청년의 합공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교하게 이루어져서 누구도 결정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갈의 청년의 쇠꼬챙이같이 생긴 기형검이 예측을 벗어난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조금씩 우세를 점해 가던 청의 노인이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주춤거리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니 더욱 승패를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들 세 사람의 결전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그들 주위의 반경 오 장 안은 휘몰아치는 경기의 소용돌이로 풀밭이 모두 파헤쳐지고 나무들이 부러져 나가 그야말로 폐허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에 비해 다른 한쪽의 싸움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전신에 피칠을 한 청년 한 사람이 남삼 문사를 간신히 상대하고 있었는데, 남삼 문사의 손에 들린 청옥으로 된 섭선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청년의 몸에는 새로운 혈선이 생겨나고 있었다.

원래는 하늘색이었을 청년의 유삼은 흘러나온 피로 시뻘겋게 젖어 당초의 색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제법 준수했을 용모마저 흐르는 선혈과 땀으로 얼룩져 그야말로 낭패스럽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남삼 문사의 압도적인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하늘색 유삼의 청년은 용케 쓰러지지 않고 힘겨운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나 조금만 안력이 높은 사람이라면 하늘색 유삼의 청년이 투지나 근성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남삼 문사가 손에 사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삼 문사가 하늘색 유삼의 청년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님도 알아차릴 것이다.

지금 남삼 문사는 마치 배부른 고양이가 생쥐를 가지고 놀듯 하늘색 유삼의 청년을 마음껏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색 유삼의 청년도 그것을 아는지 핏발 선 두 눈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수치심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상황을 타개하거나 빠져나갈 능력이 없었다.

남삼 문사의 손을 벗어날 수도 없고, 그에게 통렬한 반격을 가할 힘도 없었다. 쓰러지지 않고 최후의 최후까지 버티고 서 있는 것만이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하나 이제 그것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늘색 유삼 청년의 내공은 바닥이 난 지 오래였고, 악이 받쳐 쥐어짜 냈던 체력 또한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청년은 필사적으로 두 눈을 부릅뜨며 남삼 문사를 노려보려 했으나, 이미 무거운 눈꺼풀이 감기기 직전이었다.

‘이・・・・・・ 이렇게 끝날 수는………………’

하늘색 유삼의 청년은 감기려는 두 눈을 억지로라도 뜨고자 했으나, 눈꺼풀은 그의 그런 마음을 비웃듯 끝내 감기고 말았다. 그와 함께 그를 지탱하던 마지막 힘마저 사라졌다.

하늘색 유삼의 청년은 그대로 힘없이 허물어지듯 바닥을 향해 쓰러지고 말았다.

막 그의 몸이 땅에 닿기 직전, 갑자기 한 사람이 숲에서 튀어나와 빠른 속도로 그의 몸을 잡아채 갔다.

남삼 문사는 끝까지 버티다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하늘색 유삼의 청년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누군가가 그의 몸을 채 가는 듯하자 재빨리 수중의 섭선을 앞으로 내뻗었다.

“허튼수작!”

섭선에서 한 줄기 경기가 벼락같은 위세로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 거의 닿기 직전이었던 하늘색 유삼 청년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안아 든 인영이 오른손을 움직이자, 한 줄기 빛살 같은 검광이 장내에 번뜩였다.

파앙!

경기와 검광이 정면으로 격돌하며 예리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인영은 한차례 휘청거리다 한 걸음 물러선 반면, 남삼 문사는 살짝 흔들리는 정도에 그쳤다. 이것만 보아도 조금 전의 장면에서 누가 득수(得手) 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남삼 문사는 수중의 섭선을 가볍게 접으며 하늘색 유삼의 청년을 안고 있는 인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유난히 단단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청년은 오른손에 기다란 장검을 뽑아 든 채 매서운 눈빛으로 남삼 문사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나 표정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마치 한 마리의 성난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남삼 문사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청년의 전신을 쓰윽 훑고는 냉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예의가 없는 친구로군. 강호에서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소?”

청년은 살벌할 정도로 차가운 눈으로 남삼 문사를 쏘아보았다.

“강호에서 알량한 힘만 믿고 까부는 자들이 어떤 말로를 겪는지는 잘 알고 있지.”

통렬한 독설을 듣고도 남삼 문사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한 모습이었다.

“입담이 날카롭군. 그보다, 이 숲 입구에 누군가가 있었을 텐데…………… 혹시 만나지 못했소?”

“독지인가 뭔가를 만들어 놓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긴 하더군.”

“그는 어떻게 되었소?”

“나야 모르지. 지금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독지가 아까워서 그 앞을 지키고 있는지, 아니면 비루먹은 개처럼 마냥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게 지겨워져서 어디로 훌쩍 가 버렸는지…….”

남삼 문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문득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고준의 독지계를 벗어나다니 과연 평범한 인물은 아니로군. 말투에 남쪽 지방 억양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어느 파의 고인인지 알 수 있겠소?”

남삼 문사의 태도나 어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나, 청년은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자기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면서 남의 신원을 알려고 하다니, 이런 걸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하던가?”

남삼 문사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내 일에 주저 없이 끼어들기에 당연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줄 알았소. 나는 송악중(宋岳重)이라 하오.”

청년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뇌까려 보다가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는지 다시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나한테는 어느 파 소속인지 물어보면서 자기 자신은 이름만 달랑 밝히다니, 확실히 낯짝이 두꺼운 자로군.”

“독지계를 뚫고 왔다면서 내가 누구인지 짐작도 못 했다는 거요?”

“당신이 쾌의당주가 아끼는 제자인지 아닌지 내가 어찌 알겠소?”

남삼 문사, 송악중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청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내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구려. 당신을 보다보니 나도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소. 요새 강호에서 대세가 되고 있는 종남파의 고수인데, 성격이 다소 급하고 검법이 사납기 이를 데 없어서 폭뢰검이라고 불린다던가? 혹시 그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소?”

이번에는 청년이 눈을 번뜩이며 송악중을 뚫어지게 노려보더니 이윽고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종남파의 전흠이오.”

송악중은 짐짓 눈을 크게 치켜뜨며 가볍게 포권을 했다.

“오, 과연 내 짐작이 맞았구려. 고명하신 명성은 익히 들었소. 만나게 되어 반갑소.”

전흠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냉소를 날렸다.

“지금은 한가하게 인사나 주고받을 상황이 아닌 것 같소.”

송악중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준수한 얼굴에 어울리는 멋진 웃음이었으나, 전흠의 눈에는 왠지 먹이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맹수처럼 보였다.

“옳은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천하를 석권하고 있는 종남파의 위명을 귀가 따갑게 듣고 있던 참이었소. 종남파 고수의 제대로 된 실력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으니 나로서는 도저히 놓칠 수가 없구려.”

송악중의 수중에 들려 있는 청옥으로 된 섭선이 부드럽게 펼쳐지며 삼엄한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단지 손에 들고 있던 섭선을 펼쳐 보였을 뿐인데도 송악중의 전신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완벽한 자세를 이루고 있었다.

전흠은 여전히 하늘색 유삼의 청년을 한쪽 팔에 안은 채로 송악중의 자세를 유심히 보고 있다가 문득 턱으로 그의 뒤를 가리켰다.

“나보다 저쪽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보아도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 같은데…..,”

그 말에 송악중은 퍼뜩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돌려 보았다.

한쪽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이 대 일의 싸움은 점점 종말을 향해 치달려 가고 있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 보였던 정세도 일방적이라 할 만큼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누가 보아도 머지않아 승부가 나리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우세를 점하고 있는 사람은 합공을 당하고 있던 청의 노인이었다.

원래 청의 노인은 순수한 무공 실력만으로는 백발 중년인과 갈의 청년을 상당 부분 앞서고 있었다. 하나 두 사람의 합공이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무엇보다 청의 노인이 갈의 청년의 검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기에 무공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팽팽한 승부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나 하늘색 유삼의 청년이 위기에 처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하늘색 유삼의 청년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려는 순간부터 청의 노인의 공세가 한층 더 강력해지더니 이내 두 사람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형세가 되어 버렸다.

기이한 것은 갈의 청년에 대한 청의 노인의 자세였다.

갈의 청년의 기형검이 괴이한 검로(劍路)를 그려 낼 때마다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움찔거리며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던 청의 노인이 어느 순간부터 그의 검에 전혀 놀라거나 당황한 빛을 보이지 않고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자연히 세 사람 중 가장 무공이 떨어지는 갈의 청년이 급격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자연히 백발 중년인 또한 조금씩

일정 수준 이상에 올라 있는 고수들 사이의 대결에서 이 정도의 격차는 치명적이라고 해도 마땅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백지장 같은 우세만으로도 일방적인 승부가 벌어지는 것이 바로 고수들 간의 싸움이었다.

백발 중년인과 갈의 청년은 청의 노인의 공격에 연신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지금도 청의 노인이 흔들어 댄 수십 개의 장영(掌影)이 허공을 자욱하게 수놓으며 떨어져 내리자 백발 중년인과 갈의 청년은 감히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황급히 양쪽으로 이동하며 각자의 몸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 순간 수십 개로 퍼져 있던 장영들이 급속도로 모여들며 이내 커다랗게 변한 하나의 손바닥이 백발 중년인의 코앞으로 쏘아져 갔다.

수십 개의 장영이 하나로 합치하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백발 중년인이 무언가 눈앞을 어른거린다고 느낀 순간, 이미 손바닥은 그의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백발 중년인의 가뜩이나 새하얀 얼굴이 핏기 한 점 없이 핼쑥하게 변해 버렸다.

그는 전신이 거대한 산더미에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고 눈을 부릅뜨며 전력을 다해 양손을 내뻗었다.

콰앙!

“크으윽!”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백발 중년인은 피를 뿌리며 삼 장여를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를 단숨에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린 손바닥은 사라지지 않고 허공을 빠르게 선회하더니 이내 갈의 청년을 향해 날아갔다.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손바닥만 허공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하나 갈의 청년은 그 손바닥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지 나직한 경호성을 발하더니 이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염라무영수閻邏無影手)로구나! 으득!”

그의 얼굴에 진득한 독기가 가득 서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무섭게 짓쳐 오는 손바닥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더니 이내 수중의 기형검을 비스듬히 사선으로 쳐들었다. 

기형검 끝에 검기가 맺히며 서늘한 빛이 은은하게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한 줄기 음성과 함께 송악중이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제, 무리하지 마라.”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청옥으로 된 섭선이 거대한 경력과 함께 날아와 갈의 청년을 노리던 손바닥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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