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929화


군림천하 (929)

사실 원당의 무공 실력으로 보건대 성락중과의 이번 승부는 허무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 과정을 되짚어 보면 성락중의 눈에 땀방울이 들어가는 순간을 노려 강력한 한 방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욕심으로 너무 공격에 치중한 것이 패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능한 한 빠르게 승부를 내려는 것은 아미파를 나와서 흥안령 일대에 칩거한 후에 자신도 모르게 생긴 원당의 버릇이었다. 서장 고수들과의 거듭된 싸움으로 풍부한 대적 경험을 쌓기는 했으나, 기괴하고 변칙적인 서장 무공을 상대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본신 무공의 장중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리란 말이지…… 흐흐!”

성락중은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웃는 원당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내 마음만 같아서는 대사께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청해 제대로 된 무공을 견식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소.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오.”

“그놈의 군자연하는 태도를 뜯어고쳐 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깝구나.”

원당의 조롱 섞인 말에도 성락중은 변함없이 차분함을 유지했다.

“대사께서 의도적으로 아미파 무공의 장중함을 버리신 거라면 아마도 각명선사에 대한 원망 때문이 아닐까 싶소.”

비웃음 가득하던 원당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라.”

“대사께 꼭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소. 솔직히 오늘 내가 대사 앞에 나서게 된 것도 그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오.”

원당은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알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안색이 변한 채 버럭 노성을 질렀다.

“입을 다물어라. 나는 듣지 않겠다.”

그의 발작적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락중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대사가 혈겁을 저지른 후, 각명선사께선 어느 날인가 훌쩍 길을 떠났다가 며칠 만에 돌아오셨다 하오. 그리고 아미산 뒤쪽에 있는 가장 깊숙한 동굴에 칩거하며 돌아가실 때까지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셨소.’

“무슨 개소리를 하고 싶은지 모르지만 난 안 듣겠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셨다고 했소. 그분의 평소 유언대로 화장(火葬)하려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분이 마지막으로 입고 계셨던 옷가지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결국 육신만 화장하여 그 재를 아미산에 뿌렸다고 하오.’

“안 듣는다고 하지 않느냐? 네가 나를 이겼다고 내게 이런 수모를 줄 수는 없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지금도, 평소 불심이 깊어 존경했던 각명선사의 옷가지를 찾고 있다고 들었소. 대사께선 혹시 각명선사가 그 옷을 어디에 두었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으시오?”

“나는 모른다. 나는 더 이상 네가 하는 말은 어떤 것도 듣지 않겠다.”

침착하고 차분하던 성락중이 돌연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대사, 각명선사의 죽엽인이 왜 대사의 왼쪽 가슴이 아닌 오른쪽을 향했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소?”

잔뜩 성나 있던 원당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각명선사께서 살심에 젖어 괴물이 된 유일한 제자를 몸소 찾아가 가슴에 일장을 날렸을 때, 그분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느냔 말이오.”

“네놈이 무얼 안다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느냐?”

“선사의 죽엽인이 대사의 심장을 노리지 않은 건, 그분의 마지막 배려였소.’

“그런 배려 따위는…………….”

원당의 말은 가늘게 떨리며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배려라니. 아무리 제자가 살인에 눈이 멀었다 해도 그 가슴에 서슴없이 자신의 최고 무공을 내갈기는 게 배려란 말인가?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원당은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끄집어내지 못했다.

문득 그날 보았던 각명선사의 주름진 두 눈이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에는 자신을 불쑥 찾아와 일 장을 내갈긴 사부에 대한 분노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때 사부의 눈빛과 표정이 어떠했는지 생생하게 기억났다.

잔주름 가득하고 깊은 시름에 젖은 사부의 두 눈은 너무도 슬퍼 보였다.

되돌아 생각해 보니, 불쑥 찾아와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의 가슴에 일 장을 내질러 적엽인을 찍어 놓고 다시 훌쩍 사라질 때까지 사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유심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몇 번이고 훑어보았을 뿐이다.

그때는 사부가 자신을 어떻게 징치할지 고민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그 시선 속에 자신에 대한 안쓰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한 줄기 비통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사부는 살아생전 두 번 다시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기 위해 그렇게 눈에 새기듯 보았던 것이 아닐까?

사부에게 제대로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가슴에 맞은 일 장으로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되살아난 원당은 사부에 대한 원망과 분노, 복수심에 사로잡혀 한동안 미친 듯이 방황해야 했다. 그러다 중원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장성을 넘은 것은 그나마 살심이 뇌리를 마비시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때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천운(天運)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사부는 처음부터 죽일 의도가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죽엽인에 누구보다 정통한 사부가 자신이 되살아날 것을 몰랐을 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 보니 너무도 분명하고 명확한 일인데, 그동안은 왜 그렇게 서운하고 원망스럽기만 했을까? 그건 아마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부러라도 원망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억지로라도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이제 다시 옛일을 되짚어 보고 막혔던 눈이 트이게 되자, 원당은 갑자기 모든 일이 허망해졌다. 사부에 대한 원망으로 중원을 등진 일부터 미친 듯이 살겁을 저지르고 다니다 흥안령의 어느 계곡에서 무시무시한 괴인을 만난 일, 그의 손에 패한 뒤로 그를 따르며 아무 생각 없이 지내온 세월까지, 모든 것이 허무하기만 했다.

생면부지의 남을 위해서 아무 은원도 없는 종남파의 고수들과 싸워야 했던 이번 일을 생각하면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엇을 위해서 나는……………?’

한동안 원당은 말 못 할 회한에 잠겨 넋을 놓고 있었다.

성락중은 수시로 변하는 원당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손을 내밀어 막혔던 그의 경맥을 풀어 주었다.

원당이 한차례 깊은숨을 내쉬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마침 할 일 하나가 떠올랐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군.”

“어떤 일인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사부의 옷가지를 찾아야겠네.”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아마 사천성의 어느 한적한 시골,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아궁이에 있을 걸세.”

“그게 무슨……?”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 역병이 돌아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나는 얼어 죽을 상황에 처했었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사부가 나를 발견하시고, 당신의 옷을 태워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몇 날 며칠 나를 구완해 주셨지.”

원당의 목소리는 어느새 낮게 가라앉았고,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는 눈은 한 줄기 아련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되살아난 나를 보며 ‘네놈은 미간 한구석에 살기가 있구나. 아무리 봐도 언제고 나를 한 번 더 소신공양하게 만들겠어.’라며 웃으셨지. 그때는 그 말뜻을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군. 벌써 사십 년도 훨씬 지난 다음에야 겨우 말일세.”

성락중이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떤 일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늦은 게 아니더이다.”

원당은 물끄러미 성락중을 쳐다보다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라면 그런 식으로 말할 만하네.”

“단순한 내 생각일 뿐이오.”

“그렇다고 해 두지. 질풍검께 안부 전해 주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원당이 마지막 말을 얼버무렸으나, 성락중은 알아들었다.

“꼭 전해 드리겠소.”

원당은 다시 한 번 각별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고는 몸을 돌려 이번에는 노해광을 향했다.

“자네가 찾는 자는 팔상전이 아니라 저쪽 불전의 지하 창고에 있네. 가만두어도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일을 마무리하려면 확실한 게 좋겠지.”

노해광은 무심결에 원당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곳이라면…… 명부전(冥府殿) 말씀이오?”

“그렇네. 두 곳의 지하는 암도로 이어져 있지.”

“미처 몰랐던 일이오.”

“그럴 것 같았네.”

노해광은 정중하게 포권했다.

“대사의 아량에 감사드리오.”

원당이 손을 내저었다.

“서로 어색한 공치사는 그만하세. 내가 패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오늘로 일이 마무리될 거라는 생각은 접어 두도록 하게.”

“무슨 말씀이시오?”

원당의 얼굴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거운 빛이 감돌았다.

“며칠 내로 그자가 올 걸세. 그러니 단단히 각오하고 있어야 할 게야.”

“그자……라면?”

“내 대형 말이네.”

노해광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결국 온단 말이오? 대체 그가 검단현과 무슨 관계이기에……?”

“자네들이 그의 제자를 모조리 살해했는데, 그의 성격에 참고 있을 것 같은가? 나도 원래라면 그가 올 때까지 조용히 있어야 했는데, 그놈의 호승심이 뭔지……”

만약 그랬다면 노해광으로서는 훨씬 더 고역스러웠을 게 분명했다.

노해광은 다시 한 번 원당에게 포권해 보였다.

“알려 주어 고맙소. 이번 일은 잊지 않으리다.”

원당의 얼굴에 자조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나같이 양손에 피를 잔뜩 묻힌 살인마를 그나마 사람대접해 주는 곳은 이곳뿐이군.

원당은 회한 어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훌쩍 몸을 날렸다.

“가 보겠네. 사부의 옷에 밴 체취를 맡고 싶어 더 견딜 수가 없군.”

목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노해광은 떠나가는 원당에게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성락중이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자를 어떻게 상대할지 궁리하는 거요?”

노해광은 문득 고개를 떨구고는 피식 웃었다.

“궁리는 무슨. 소마가 궁리한다고 상대할 수 있는 자인가?”

“그럼 무슨 특별한 비책이라도 있소?”

“비책이야 늘 있지.”

성락중은 물론이고 낙일방 또한 그 말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노해광을 쳐다보았다.

“무슨 비책이오?”

노해광이 그답지 않게 빙긋 미소 지었다.

“종남의 방식으로 상대하는 것이지.”

“종남의 방식?”

노해광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잊었나? 종남은 결코 포기하지 않네. 상대가 누구든 물러서지 않고 기필코 쓰러뜨리고야 말지. 그게 우리 종남의 유일한 방식일세.”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