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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34화


군림천하 (934)

제380장 작전모의(作戰謀議)

노해광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러더니 평소의 그답지 않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어느새 흰머리가 무성해졌군. 아직 지천명(知天命)도 되지 않았고,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헛되이 세월만 흘려보낸 것 같구나.”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해가 웃으며 말했다.

“사숙께선 아직 정정하십니다. 그리고 뜻하신 바가 얼마나 원대한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사숙의 위치라면 어느 정도는 이루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노해광은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마주친 정해를 짐짓 노려보았다.

“입에 발린 말을 잘도 하는구나. 하지만 내가 마음먹은 뜻이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도 못 하는 연작(燕雀)의 지껄임일 뿐이다.”

정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응수했다.

“제가 홍곡(鵠) 같으신 사숙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만족한다고? 네 녀석의 흉중은 정말 참새처럼 좁고 보잘것없구나.”

노해광의 거듭된 질책에도 정해는 오히려 약간 흥분된 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예전부터 저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사문의 존속이었습니다. 물론 구대문파로 복귀까지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저 외부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문파의 안위를 지킬 수만 있어도 만족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단순한 존속이 아니라 섬서성을 넘어 강호 전체를 호령하고 있으니, 저로서는 하루하루가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하고 설레기만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정해의 두 눈은 유달리 반짝이고 있었고 얼굴에는 가벼운 홍조까지 어려, 첫사랑에 들뜬 어린 소년을 보는 것 같았다.

노해광은 그런 정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그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졌으니 더는 바랄 게 없느냐? 아니면 또 다른 소망이라도 생겼더냐?”

정해가 멋쩍은 듯 웃었다.

“사실은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래, 그게 인간이지. 원래 소망이란 인간을 지탱하는 원동력 같은 것이다. 간절함이 없으면 살아갈 힘을 잃게 되는 법이지. 지금의 네 소망은 무엇이냐?”

“떠나간 사형과 사제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오는 것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노해광은 잠시 멈칫거렸다.

정해는 침착하면서도 열망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장문 사형과 전 사제, 그리고 임 사저, 매 사형까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것이 지금 저의 가장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러고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역시 연작답게 너무 보잘것없는 소망이지요?”

노해광은 한동안 묵묵히 그를 응시하다가 진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정도면 괜찮다. 원래 소망이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느냐가 중요한 법이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매상은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린 뒤로 다른 소식이 없느냐?”

방금까지도 미소 짓고 있던 정해의 얼굴에 한 가닥 수심의 빛이 떠올랐다.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임동(臨潼)의 나루터에서 매 사형과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말이 있긴 했는데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임동은 서안의 북쪽에 있는 도시로, 위하渭河)를 건너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잠깐 본 것뿐이긴 하지만, 제법 강인한 녀석이더구나. 그런 놈은 절대로 쉽게 부러지거나 쓰러지지 않으니 네 말대로 기다려 보는 것도 좋겠지.”

“예,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다만 매 사형이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몸이라 그게 걱정이 되는군요.

“감당할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떠난 것이겠지. 장문인과 다른 제자들의 소식은 들어온 것이 있느냐?”

진산월에 대한 말이 나오자 정해의 표정이 한결 진중해졌다.

“장문 사형과 전 사제가 속한 무림맹의 선반이 형수 부근에서 서장의 세력과 큰 싸움을 치렀다는 소식 이후로는 달리 들어온 게 없습니다. 그 싸움에서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아마 장문 사형과 전 사제는 선반을 나와 본산으로 돌아오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산월이 무림맹의 선반을 맡아 활동한 지도 몇 달이 되었다. 그동안 강호에서 암약하고 있던 서장의 세력들을 상당수 처단하여 선반은 이미 본연의 임무를 몇 배나 초과해서 달성한 상태였다.

머지않아 장문 사형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정해의 얼굴은 벌써부터 설렘과 기대감으로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노해광은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금 웃고 말았다.

‘잔머리를 잘 굴리고 잇속에 누구보다 밝은 녀석이 장문인 이야기만 나오면 어쩔 줄을 모르는군.’

진산월과 그의 사제들이 어떠한 일을 겪어 왔는지 단편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노해광으로서는 그들 사형제 사이의 끈끈함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런 그들의 사이가 부럽기도 했다.

‘나도 그때 사문을 떠나지 않았다면 임 사형과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적어도 지금보다는 한결 가슴 한구석이 든든하지 않았을까?

정해가 노해광의 표정을 살피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노 사숙께서는 젊은 시절에 장안 일대를 누구보다 호탕하게 누비고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분들도 많으시고요.”

노해광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어디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들은 거냐?”

“하 사숙께서 술만 드시면 과거에 노 사숙의 그런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늘 따라다니고 싶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노해광의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하동원, 이 망할 녀석이 사질들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그놈은 예전부터 술을 너무 좋아했지. 술만 마시면 온갖 사고는 다 저지르고 다니던 녀석이니 그놈 말에 신경 쓸 것 없다.”

“그래도 세 분 사숙들 중 저희를 편히 대해 주시는 분은 하 사숙뿐입니다. 그분 말씀이, 예전에도 위세 등등하던 장안의 실력자들이 노 사숙을 탐내어 서로 자기 사람으로 포섭하려는 경쟁도 치열했다더군요.”

정해는 노해광이 과거에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칭송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말을 듣는 노해광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젊은 시절의 노해광은 성품이 호탕하고 재기 발랄하여 누구나가 인정하는 인재였다. 서안 일대에서는 나름대로 상당히 알려져서 제법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손 노태야가 그를 눈여겨보고 수하로 삼으려 했다.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여 발이 넓고 두뇌가 비상해서 좀처럼 손해 보는 일이 없는 그에게 나름의 상재(材)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나 당시 노해광은 종남파에 적(籍)을 두고 있었고, 종남파를 떠나 상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임장홍의 아내인 두란향이 심한 병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다.

임장홍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손 노태야에게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영약이 있음을 알고는 그를 찾아가서 사정했다.

손 노태야는 감정이라고는 일절 없는 무심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더니 흥정을 걸듯이 말했다.

“옥정단(精)은 나도 힘들게 구한 것일세. 나는 장사꾼이니 들인 값의 두 배는 받아야겠네.”

“내게 그런 돈이 없다는 건 손 노태야도 알 거요. 달리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보시오.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내놓겠소.”

손 노태야는 임장홍의 얼굴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장문인의 사제 중에 쓸 만한 녀석이 하나 있더군. 그를 내게 보내게. 옥정단의 값은 그자에게 받지.”

임장홍은 손 노태야가 노해광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평소 점잖은 그답지 않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손 노태야가 노 사제를 말하는 거라면 거절하겠소. 노 사제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본 파의 제자를 이런 일에 엮을 수는 없소.”

“본인에게 의사라도 물어보는 게 어떻겠나?”

“이건 의사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오.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문파 제자의 미래를 저당 잡힐 순 없소.”

임장홍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했기에 손 노태야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럼 더 이야기할 것 없군. 그만 가 보도록 하게.”

임장홍은 아무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고, 두란향은 병이 더욱 깊어져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노해광이 임장홍을 찾아 멱살을 잡고 울분을 터뜨리다 종남파를 등지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인지도 몰랐다.

정해는 노해광 밑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얌전한 성격의 그답지 않게 노해광을 찾아가 성난 목소리로 다그치듯 물었다.

“노 사숙께서는 얼마든지 응징하실 수 있었을 텐데, 왜 손 노태야를 그대로 두셨습니까?”

그때 노해광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에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장문인만이 아니다. 나도 문파를 떠난 후 많은 수모를 당했지. 하지만 과거의 수모를 일일이 갚으려 하다가는 사방이 온통 적으로 둘러싸여 단 하루도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일은 그저 마음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무공도 변변치 않고 뒷배도 없는 무림인이 강호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정해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지금은 무공도 많이 상승하셨고 사숙의 위치도 달라졌으니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나에게 수모를 주었던 자들은 그 일로 전전긍긍하여 이제 오히려 내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지.”

“하지만…….”

“손 노태야가 왜 나에게 여러 번 양보했는지 아느냐? 당시의 일을 나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손 노태야는 나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할 것이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는 나에게 조금씩 양보한 것이지. 이것이 지금 내가 강호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정해는 노해광을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선사와 사숙의 노고가 정말 크셨습니다. 우리 종남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윗분들의 노고 덕분이니, 새삼 감사드립니다.”

노해광의 얼굴에 씁쓸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코 잊지는 말아야겠지. 다만 아쉬운 건 그 일의 당사자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다.”

당시 정해는 갑자기 돌아가신 선사가 못 견디게 그리워서 고개를 돌려 몰래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또다시 달라졌다.

손 노태야는 물론이고 서안의 유력자들 중 누구도 노해광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지 못한다. 노해광의 영향력은 적어도 서안 일대에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서안의 절대자인 노해광이 어깨를 쭉 펴고 당당하면서도 진중한 눈으로 정해를 바라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검단현의 뒤처리는 어떻게 했느냐?”

정해는 평상시의 신색을 회복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화산파의 집법에게 인계했습니다. 화산파에서는 화장한 후 그 재를 낙안봉落雁) 뒤쪽의 계곡에 뿌린다고 하더군요.”

“낙안봉?”

“그 근처에 검단현의 사부가 영면한 곳이 있답니다. 검단현은 자기가 죽게 되면 그곳에 묻어 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군요.”

노해광은 냉소를 날렸다.

“흥. 끝까지 화산파의 제자로 남겠다는 것이로군. 그놈에게는 너무 후한 처사였어.”

정해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검단현은 노해광에게 생포된 다음 날 숨을 거두었다. 이미 상처가 악화되어 기식이 엄엄했던 그는 자신이 노해광에게 사로잡혀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다고 생각하자 급격하게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고, 다음 날 노해광이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미 차가운 시신이 되어 있었다.

한때 섬서성 일대를 뒤흔들었던 인물의 최후라기에는 너무도 허무하고 비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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