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36화
군림천하 (936)
제381장 춘행기흥(春行)
태행산을 벗어나 낙양으로 가는 길은 제법 순탄했다.
험준하기 그지없는 태행산을 빠져나오기만 하면 넓은 평야가 나타나고, 그 사이로 관도가 이어져 시야가 탁 트인 느낌을 주었다.
며칠 동안 험한 산길을 헤치고 나와서인지, 눈앞에 펼쳐진 평야의 풍광에 전흠은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편안한 길이 이어지는군요. 가까운 도시에서 잠시 쉬었다가 말을 구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관도가 있다면 말을 타는 것이 확실히 빠르고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오후 늦게 되어서야 두 사람은 태행산을 완전히 벗어나 제법 커다란 성읍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촌(吳村)이란 곳인데, 원래 오씨 성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集姓村)이었다가 점차로 커져서 지금은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가 되었다.
오촌의 거리를 걷던 두 사람은 대로 바로 옆에 위치한 제법 커다란 주루로 들어섰다.
낙빈루(樂賓樓)라는 이름의 그 주루는 삼층짜리 건물로, 아직 저녁 식사 시간이 되지 않았음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먼지를 털고는 일 층을 거쳐 이 층으로 올라갔다.
“삼 층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전흠이 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 두리번거리자, 진산월은 고개를 저으며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 층만 해도 경치가 괜찮구나. 저곳에 자리를 잡도록 하자.”
규모가 큰 주루일수록 상층은 단골손님이나 귀빈들을 받는 공간이어서 외지인들이 이용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진산월은 이를 알기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번거로움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이 층을 선택한 것이다.
하나 그의 의도는 뜻하지 않게 어긋나 버렸다.
때마침 삼층에서 막 내려오던 한 인물이 그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다가왔다.
그는 비단 화의를 걸친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는데, 좀 더 가까이에서 진산월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 혹시 실례지만 신…….”
진산월은 그가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짐작하고, 말을 자르듯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시는 게 맞을 거요. 다만 우리는 이곳에 조용히 식사를 하러 왔으니, 양해해 주시오.”
낙빈루의 삼층은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았다.
길게 뻗은 복도 양쪽으로 대여섯 개의 방들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방 하나하나의 크기가 상당히 컸고, 방 사이 문이나 벽이 튼튼해 보여서 호젓하게 식사를 즐기기에 적합하다는 중년인의 말이 과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중년인은 그들을 복도의 가장 끝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은 삼층에 있는 방들 중 가장 크고 조용해 보였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양쪽 벽으로 의자들이 줄지어 있고, 중앙에 커다란 팔선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팔선탁의 한쪽에 한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시오, 진 장문인. 전 소협도 다시 보니 반갑소.
그를 보자 순간적으로 긴장했던 전흠은 맥이 탁 풀려 버렸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이정문이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팔선탁의 한쪽 의자로 가서 앉았다.
“내가 이쪽으로 올 줄은 어떻게 알았소?”
이정문은 그의 앞에 놓인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 주며 빙긋 웃었다.
“진 장문인이 나와 헤어진 후에 낙양으로 갈 길을 계산해 보니 이맘때쯤이면 이곳을 지날 것 같았소.
“이 주루를 선택할 줄은 어떻게 안 거요?”
“그건 더욱 쉽게 예상할 수 있었소. 험한 산길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잠시 주루에서 목을 축이고 시장기를 덜어 내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소? 이 낙빈루는 오촌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고 분위기가 좋은 곳이니 진 장문인의 안목이라면 이곳을 택하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소.”
“그래서 사람을 보내 일부러 나를 초대한 거요?”
“하하. 추 대협이 그 때문에 오전부터 계속 낙빈루 앞을 지켜보느라 고생했다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전흠이 흠칫 놀라 돌아보니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던 중년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전흠이 무심결에 두리번거리자 진산월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우리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 다른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으니 굳이 찾을 것 없다.”
“장문 사형께서는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는 성숙해의 이십팔숙 중 한 사람인 파운수 추동생이다.”
그제야 전흠도 자세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문 사형께서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의 정체를 알고 계셨군요. 그래서 그의 청을 받아들이신 거고요.”
“그동안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어서 첫눈에 알아보았다. 다만 굳이 알은척할 이유가 없어 지나치려 했지. 한데 그가 자기 방으로 초대하길래 이 공자가 기다리고 있겠구나 짐작한 것이다.”
전흠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 억지로 눌러 참았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말해 주었으면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삼 층으로 올라오면서 바짝 긴장했던 게 억울해서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외인이 있는 앞에서 장문인에게 투덜거릴 수 없으니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전 소협도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전흠이 자리에 앉자, 이정문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원래 이렇게 급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었는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져 진 장문인을 찾게 되었소.”
확실히 이정문은 언제나 치밀한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성격이었다. 사소한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도 그만의 정교한 계산과 복잡한 심계가 담겨 있었다.
많은 강호인들이 그를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인물로 꼽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이정문이 진산월과 헤어진 지 열흘도 되지 않아 태행산을 가로지르다시피 하며 황급히 그를 찾아온 것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건 너무도 분명한 일이었다.
“뜻하지 않은 일이란 뭐요?”
“무림맹의 위지 맹주와 무단주가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소.”
무림맹의 맹주는 무림구봉 중의 일인인 장봉 일장개천지 위지립이었고, 무단주는 점창파 사상 최강의 고수라는 십방랑자 사효심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당금 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절정 고수들이며, 무림맹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수뇌부라고 할 수 있었다.
무당산에서의 집회 이후 그들의 행적은 특별히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이정문은 그들이 하남성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황급히 진산월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이 이쪽으로 오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진산월이 묻자 이정문은 특유의 눈썹을 찌푸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중추절에 벌어질 서장 무림과의 결전을 앞두고 각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순방이라고 했지만, 정작 그들은 어느 곳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이쪽으로 오고 있소.”
“이쪽이라면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거요?”
“하남성 방면인데, 나는 그들의 목표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오.”
“그곳이 어디요?”
이정문의 시선이 슬쩍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첫째는 진 장문인이 있는 곳이오.”
“그들이 나를 찾아온단 말이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선반의 임무도 진즉에 끝나서 나는 선반주도 아닌데, 무림맹주와 무단주가 왜 나를 찾아온단 말이오?”
“그들이 무림맹의 맹주와 무단주라는 것을 잠시 제쳐 두고 생각해 보시오.”
진산월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나를 찾아올 확실한 이유가 있긴 있구려.”
“그렇소.”
“또 한 군데는 어디요?”
“낙양, 그들의 동선을 따라 선을 그리면 낙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소.”
“낙양이라…….”
“마침 진 장문인도 낙양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그 생각을 하니 진 장문인을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소.’
이정문은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이 진 장문인을 찾아오는 것이든, 아니면 낙양을 향해 가는 것이든 그들과 진 장문인은 조만간 만나게 되어 있소. 그러니 진 장문인은 주의해야 할 거요. 만약 그들의 목표가 진 장문인이라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진 장문인을 상대할 완벽한 자신이 있기 때문일 테니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