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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37화


군림천하 (937)

진산월은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이정문을 바라보며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나를 생각해 주는 이 공자의 정성에 감복했소. 수하들을 시켜 말을 전하기만 했어도 충분한 일을 불원천리 직접 달려와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소.’

진산월은 고맙다고 말하는데, 듣고 있는 이정문의 표정은 조금씩 구겨지더니 무언가 불만과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변해 버렸다.

“허! 진 장문인은 참으로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오. 이미 잘 알고 재삼재사 되새긴 사실이건만, 이리 또다시 놀라게 되는구려.”

한탄인지 넋두리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던 이정문이 한 줄기 고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진 장문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지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소.”

진산월은 이번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이정문의 말을 기다렸다.

이정문은 다시 한차례 나직한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의 행방을 쫓고 있소. 그를 찾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고, 마침 진 장문인에게 전할 말도 있어서 겸사겸사 진 장문인을 찾은 것이오.’

“보아서는 안 될 사람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사람을 얼핏 봤으니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소.”

그제야 진산월이 짤막하게 물었다.

“그가 누구요?”

이정문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오. 직접 그자를 한 번이라도 더 내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거요.”

“그 사람이 이쪽으로 왔다는 말이오?”

“그렇소. 워낙 갑작스럽게 보았던 터라 그자의 행적을 찾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끊어질 듯한 흔적을 간신히 쫓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구려.”

“당신이 잘못 본 건 아니고?”

“아직까지 내 눈은 그런대로 쓸 만하다고 생각하오.”

이정문은 까다로운 성격만큼이나 자신의 안목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의심이 든단 말이오?”

이정문의 얼굴은 어느새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소. 게다가 워낙 짧은 순간에 스치듯 지나간 터라 만에 하나라도 착오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겠소.”

진산월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정문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자신이 잘못 보았거나 다른 사람일 가능성을 거론하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출현이 이정문조차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 그자가 누구이기에 냉정하기 그지없는 이정문이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진산월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정문이 그자에 대해 알려 줄 생각이었으면 벌써 입을 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자의 정체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한 이상 누구도 그의 입을 열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들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셈인가?’

이정문이 쫓고 있는 자와 무림맹주, 무단주가 모두 비슷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산월 또한 그 방향을 목적지로 두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진산월은 모쪼록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이정문이 입을 열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정문은 마음이 급한지 진산월과 전흠이 식사를 마치자마자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낙빈루는 뒤쪽의 널찍한 공간에 개방을 두고 있기에 두 사람은 식사를 끝낸 후 낙빈루 후원의 객방에 여장을 풀었다. 오늘 하루쯤은 이곳에서 여독을 푼 후 내일 오전에 마시장에서 말을 사서 이동할 계획이었다.

야심한 시각, 전흠은 이미 깊은 잠에 빠졌고 진산월도 잠자리에 들려 할 때였다.

톡.

진산월이 묵고 있는 방의 유일한 창문 밖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조그만 소리였으나, 사위가 고요한 밤이었는지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진산월은 침상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공간에 짙은 어둠만 장막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하나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창문에서 삼장쯤 떨어진 곳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구불구불한 가지를 검은 하늘을 향해 뻗은 채 자리하고 있었다.

그 가지들 중 하나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물건이 진산월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물건에 새겨진 십여 개의 장미 문양이 달빛을 받아 이리저리 알록달록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진산월이 한차례 손을 흔들자 매화 가지에 걸려 있던 물건이 허공을 날아와 그의 손에 내려앉았다.

진산월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그것이 여인들이 사용하는 머리띠임을 알 수 있었다.

열여덟 개의 장미 문양!

한쪽에 새겨진 ‘영옥’이라는 두 개의 글자!

글자의 음각을 어루만지는 진산월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예전에 쓰여 있던 ‘월광천추’라는 네 개의 글자는 지워져 보이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한눈에 이것이 임영옥의 머리띠임을 알아보았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꽃다운 열여덟 살의 그녀에게 자신이 선물했고, 그것은 위관의 손을 통해 그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진산월은 사 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에게 이 머리띠를 돌려주지 않았던가?

그때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진산월에게 머리를 묶어 달라 부탁했고, 진산월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를 단정하게 가다듬어 머리띠로 조심스레 묶어 주었다.

그날 밤의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설레던 분위기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자리에 없는데, 머리띠만 홀로 남아 또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머리띠를 만지는 진산월의 두 눈이 더할 나위 없이 깊게 침잠되었다.

임영옥의 머리에 있어야 할 머리띠가 이곳 낙빈루의 후원 한구석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성락중과 낙일방 등 종남파의 제자들과 함께 돌아가 지금쯤은 종남산의 품속에서 몸을 쉬고 있어야 할 그녀의 물건이 어째서 천리만리 떨어진 오촌의 개방 뒤뜰에 걸려 있게 되었을까?

진산월은 지금까지 임영옥이 종남파의 제자들과 함께 종남파로 돌아가 있으리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기에 마음속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좀처럼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냉정함을 잃지 않는 그였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안위가 의심되자 불안함과 근심으로 솟구쳐 오르는 격동을 참기 어려웠다.

‘침착해라, 진산월. 아직은 아무것도 밝혀진 바 없다.’

진산월은 속으로 그 말을 끝없이 되뇌며 평정심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흔들리면 안 된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건 내가 흔들리지 않아야 잘못된 걸 제대로 바로잡을 수 있다.’

진산월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은 임영옥의 머리띠를 계속 어루만지고 있었다. 손길을 따라 머리띠에서 전해진 따스한 기운이 몸속으로 퍼져 가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다시 평정을 찾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머리띠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머리띠를 보낸 자가 아무 의미 없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진산월은 냉정해진 눈으로 머리띠가 걸려 있던 매화나무를 쳐다보았다.

매화나무 주위에는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던 진산월이 문득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의 신형은 방을 나와 매화나무 아래에 내려섰다.

진산월은 머리띠가 걸려 있던 나뭇가지를 가볍게 손으로 쓸었다.

그 가지는 어린아이의 손목 굵기 정도 되었는데, 매화나무 특유의 굴곡지고 거친 껍질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껍질의 한 부분에 언뜻 보아서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작은 글씨 몇 개가 새겨져 있었다.

춘행기흥(春興)

누군가가 봄날의 여흥을 즐기다 흥취를 이기지 못하고 새겨 놓은 것일까?

그럴 리가!

임영옥의 머리띠가 걸려 있던 나뭇가지에 글귀가 새겨진 것이 결코 우연일 리는 없었다.

춘행기흥이란 네 글자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이런 글자를 새겨 놓은 자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그녀와 종남파의 제자들이 종남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임영옥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까?

그리고 이런 일을 저지른 자는 진산월이 이곳에 머무르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수많은 질문과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혔으나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휘이잉!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진산월의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진산월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언제까지고 매화나무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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