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40화
군림천하 (940)
제383장 상옥추제(上屋抽梯)
산해루에서 대왕루까지는 걸어서 일각 가까이 걸렸다.
제법 떨어진 거리여서인지 근처에 도착해 보니 확실히 산해루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산해루가 건물 자체는 제법 커도 아기자기하고 잘 꾸며진 주루였다면, 대왕루는 무조건 널찍하고 거대해서 웅장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배송은 대왕루 앞까지 와서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멈추었다.
“이곳이 대왕루요. 이 층이라 산해루보다 한 층 낮긴 하지만, 옆으로 널찍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훨씬 더 크게 느껴질 거요.”
확실히 대왕루는 밖에서 보기에도 산해루보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한창때보다 붐비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들락거리고 있었다.
위고릉과 강패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대왕루를 올려다보다가 이 층의 한쪽에 유난히 커다란 외등(燈)이 달린 방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방은 겉으로 보기에도 무척이나 화려하고 거대한 것 같군.’
“바로 보았소. 저곳이 바로 철면호가 기거하는 곳이오.”
배송은 철면호의 집무실까지 알려 주어서 자기가 할 일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위고릉과 강패를 향해 포권해 보였다.
“이제 안내를 끝냈으니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
위고릉이 짐짓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무슨 말인가?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어딜 간단 말인가?”
배송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철면호가 있는 대왕루로 두 분을 모시고 왔고, 철면호가 기거하는 곳까지 알려 드렸지 않소?”
“저곳에 철면호가 있다는 걸 어떻게 보장한단 말인가?”
배송은 위고릉이 생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걸 왜 내가 보장해야 하오?”
위고릉은 돌연 정색을 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우리의 목적은 철면호를 찾는 것이고, 자네는 그 안내를 해 주기로 했네. 그러니 우리가 직접 두 눈으로 철면호를 볼 때까지 자네는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네.”
“아니, 그게 무슨…….”
배송은 너무 억지스러운 일 아니냐고 따지려 했으나, 위고릉의 두 눈에 진득한 살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는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위고릉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자네는 우리와의 약속을 조금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군.”
옆에 있던 강패가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서려 했다.
“내가 가벼운 교육을 시켜 주는 게 어떤가?”
배송은 질색을 하며 황급히 대왕루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교육 같은 건 필요 없소. 어서 따라오시오, 철면호는 틀림없이 대왕루에 있을 거요.”
위고릉과 강패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배송의 뒤를 따라 느릿느릿 대왕루로 들어섰다. 대왕루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실제로 안에 들어와서 보는 것이 훨씬 더 크고 화려했다.
단순히 면적만 넓은 게 아니라, 층고 또한 여타의 주루보다 반 배 가까이 높아서 광활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게다가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사방에 크고 작은 유등油燈)을 걸어 놓아 한층 더 운치가 있어 보였다.
지금 대왕루 안에는 상당수의 손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대부분이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저녁 시간이 지나다 보니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술 마시는 취객들만 남은 모양이었다.
개중에는 여인들도 적지 않아서 서안의 밤이 얼마나 화려하고 사람들이 풍류를 즐기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 주었다.
배송은 신기한 듯 대왕루의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위고릉과 강패를 향해 약간은 의기양양하고 약간은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소, 서안의 명소인 대왕루를 본 느낌이? 정말 근사하지 않소?”
위고릉이 대수롭지 않은 듯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쓸데없이 크기만 하군. 이래서야 사람 찾기가 쉽지 않겠는걸.”
“그거야 이 층으로 올라가면 될 일 아니겠소? 철면호의 집무실은 그곳에 있으니 말이오.’
위고릉은 배송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는 철면호가 집무실에 있으리라고 확신하나?”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이 야심한 밤에 어딜 가겠소? 아마 오늘 하루의 매상을 보고받느라 정신없을 거요.”
위고릉의 얼굴에 알 듯 모를 듯,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 말이 맞기를 바라네. 그래야 우리도 쓸데없는 수고를 덜 테니 말일세.”
“만약 철면호를 찾게 되면…….”
“사례도 톡톡히 하고, 자네도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네.”
그제야 안심한 듯 배송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알겠소.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저쪽에 있으니 따라오시오.”
배송은 계단을 통해 이 층으로 올라갔다.
대왕루의 이 층은 산해루보다 훨씬 넓었고, 복도도 길었다.
이 층의 절반은 일 층처럼 손님을 받는 탁자들이 놓여 있고, 나머지 절반은 기다란 복도 양쪽으로 방이 배치되어 있었다.
배송은 위고릉과 강패를 데리고 복도 쪽으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복도는 끝부분에서 급격히 꺾어졌는데, 배송이 그 꺾어지는 부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위고릉과 강패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 다른 신중한 빛이 어려 있었다.
“여기를 돌아서 조금만 더 가면 주렴이 쳐진 커다란 방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철면호의 집무실이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리듯 말하자 위고릉이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자네는 마치 가지 않을 사람처럼 말하는군.”
배송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면 안 되겠소? 굳이 내가 두 분을 따라 집무실까지 쳐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겠소?”
위고릉의 얼굴이 점차 무표정하게 변했다.
“우리가 철면호를 공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군.”
“산해루에서 그런 일을 당했는데, 그 정도도 짐작 못 하겠소? 나는 무공도 변변치 않고 잔재주도 없어서 두 분의 행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만 될 거요.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두 분이…….”
위고릉은 아무 말이 없는데, 옆에 있던 강패가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목덜미를 잡혀 끌려가고 싶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 주지.”
배송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 발로 가겠소.”
그러고는 먼저 복도를 돌아갔다.
“제길. 망할 놈의 점쟁이. 이게 뭐가 일진이 좋은 날이란 말인가?”
그의 투덜거리는 음성을 들으며 위고릉과 강패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를 뒤따랐다.
배송의 말대로 복도를 돌아가니 멀지 않은 곳에 주렴이 늘어진 방이 보였다. 그 방을 향해 가던 위고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앞서서 걷고 있던 배송이 용케도 그 말을 들었는지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위고릉은 턱으로 주렴이 쳐진 방문을 가리켰다.
“서안을 주름잡고 있는 철면호가 집무를 보는 곳인데, 지키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배송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문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어? 그러고 보니 이 앞에는 늘 한두 명의 점원들이 서 있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구려.”
성미 급한 강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찌 된 일이냐? 사실대로 말해라! 네놈이 우리를 속인 것이냐?”
배송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소? 내가 두 분을 속여 무슨 이득을 보겠소?”
“그럼 왜 철면호의 방을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냐?”
“그건・・・・・・ 아마도 철면호가 이곳에 없는 모양이오.”
배송이 기어들어 가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자 강패는 물론이고 위고릉의 눈에도 살벌한 빛이 감돌았다.
강패가 노성을 내지르기도 전에 위고릉이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를 놀리는 게 아니라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줘야겠군.”
위고릉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배송은 그 안에 담긴 진득한 살심을 생생하게 느꼈는지 몸을 덜덜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아무래도 철면호는 오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간 모양이오.”
“그곳이 어딘가?”
“아마 하선루일 거요.”
“장담할 수 있나?”
“장담까지는…… 아니, 장담할 수 있소! 철면호는 산해루와 대왕루, 하선루 중 한 곳에 머무르니, 산해루와 대왕루가 아닌 이상 반드시 하선루에 있을 거요.”
배송이 위고릉의 살기 어린 눈을 감당하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으며 주절거렸다.
“하선루는 철면호가 가장 최근에 입수한 주루라서 다른 어떤 곳보다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들었소. 그러니 그는 틀림없이 그곳에 있을 거요. 믿어 주시오.”
위고릉은 한참이나 배송을 응시하고 있다가 그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짤막한 음성을 내뱉었다.
“안내해라.”
이제는 완전히 말투까지 달라졌으나, 배송은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강패는 허겁지겁 걸어가는 배송의 뒷모습을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다가 살기가 가시지 않은 음성을 토해 냈다.
“이게 진짜 우연히 벌어진 일 같나? 그놈의 거처 두 곳을 찾아갔는데 두 군데 모두 그놈이 없다는 것이?”
위고릉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러다 배송의 몸이 꺾어진 복도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에야 중얼거리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곧 밝혀지겠지. 똑같은 일이 세 번이나 벌어지는 경우는 없으니 말일세.”
하선루는 서안의 남문대로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다행히 대왕루 또한 남문대로 끝 쪽에 있었기에 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배송은 위고릉과 강패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서 사방에 유등이 내걸려 있었다.
하선루는 대왕루와 같이 이 층으로 된 주루였는데, 웅장하고 화려한 대왕루에 비해 아기자기하고 수수해 보였다.
하나 실제로 다른 주루에 비해 그다지 작은 편은 아니었다. 그저 대왕루가 워낙 거대해서 대왕루에 비해 아담해 보이는 것뿐이었다. 대왕루를 보고 난 후 바로 왔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위고릉은 하선루의 앞에 선 채, 한동안 날카로운 눈으로 하선루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철면호가 이곳에 있단 말이지?”
배송은 그건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위고릉과 강패의 인상이 워낙 살벌해서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럴 거요.”
“아니라면 우리는 무척 실망할 거고, 그 대가를 받아 낼 것이다.”
배송은 묻기가 두려웠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 말이오?”
위고릉의 칼날 같은 시선이 그의 얼굴에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누군지 상상해 보거라.”
이제는 완연히 아랫사람을 대하듯 말투가 거칠었으나, 배송은 따지지도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구려.”
“철면호는 이곳 이 층에 있겠지?”
“이 층이 아니라 일 층이오. 입구에서 가장 먼 쪽에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하선루에 오면 철면호는 그곳에서 업무를 보곤 했소.”
위고릉의 눈에 의아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기이하군. 원래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이 전망 좋은 이 층에 자신의 거처를 잡기 마련이거늘.”
“듣기로는 하선루의 구조가 조금 특이해서 이 층 한쪽을 막아 방으로 만들기가 힘들다고 했소. 그렇다고 뜯어내고 다시 지을 수는 없으니 그냥 일 층의 가장 구석진 방을 사용한다고 말이오.”
위고릉은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배송을 쳐다보았다.
“용케도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군.”
배송이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서안 토박이라서 말이오.”
“토박이라도 모두 그런 세세한 일들을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귀가 좀 밝다고 해 둡시다.”
위고릉은 새삼 배송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나름 한 수를 가진 친구로군. 서안 토박이에 귀도 밝고, 눈치도 비상한 것 같고, 배짱도 두둑한 듯하고…….”
배송은 그제야 위고릉이 자신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듯 찔끔하는 기색이었다.
“눈치야 변변치 않은 무공을 지닌 자들이라면 누구나 갖추기 마련이고, 배짱은 좀 타고난 면이 있는 것 같소.”
“흐흐. 입담도 대단하군. 확실히 보기와는 달리 재미있는 친구야.”
위고릉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배송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어떤 인물과 비슷한 특징을 지녔군.
“누굴 말하는 거요?”
“철면호 노해광. 그자가 자네처럼 귀도 밝고, 눈치가 빠른 데다 담대한 성격을 지녔다고 들었네. 게다가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군.”
배송은 펄쩍 뛰었다.
“나 같은 걸 어찌 철면호에 비할 수 있겠소! 게다가 그는 양쪽 귀가 짝짝이라서 누구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을 못 들었소?”
“그래서 그냥 비슷하다고 한 걸세. 철면호는 구레나룻이 짙고 두 귀의 크기가 확연히 달라서 인상이 뚜렷하다고 들었으니 말이지.”
아닌 게 아니라, 배송은 두 귀의 크기가 별로 다르지 않았고 구레나룻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