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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47화


군림천하 (947)

손검당의 얼굴은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진산월은 왠지 그의 얼굴 한편에 보이지 않는 그늘이 짙게 드리운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셨지만, 그 후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잔이 차면 다시 술을 마실 뿐이었다.

그러다 손검당이 술병을 흔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술이 벌써 떨어졌군.”

“한 병 더 사올까?”

진산월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손검당은 그를 제지했다.

“아니, 됐네. 오늘은 이 정도가 딱 좋은 거 같아. 모처럼 술을 마셨더니 적당히 취기가 도는군.”

그는 히죽 웃으며 빈 술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거 아나, 자네 명성이 올라갈수록 내가 점점 더 술꾼이 되었다는 거?”

“아니. 술을 왜 그렇게 마신 건가?”

“안 마실 수가 없었네. 자네의 이름이 대강남북을 뒤흔드는 게 마치 내 일처럼 자랑스러웠지. 그런데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쾌의당 소속에다 강호의 구석진 곳을 기웃거리는 한낱 살수 나부랭이에 불과한데, 신검무적이 내 친구라고 떠들어 봤자 누가 믿어 주겠는가? 그저 혼자 골방에 처박혀 술병을 벗 삼아 자네와의 우정을 되새기는 수밖에.”

“술꾼이 된 핑계로는 조금 어설픈걸.”

손검당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네 말이 맞아. 사실 그건 핑계이고, 그저 술을 마시고 싶었을 뿐이네. 팔이 잘리지 않았다면 정말 지독한 주당이 되어 버렸을지도 몰라.”

“정 소저가 있지 않은가? 그녀라면 내가 자네 친구라는 걸 알 텐데.”

진산월은 무심결에 정난향을 거론했다. 그 순간, 지금까지 웃고 있던 손검당의 얼굴에서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지며 차갑고 냉랭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이내 다시 억지로 미소를 지었으나, 진산월은 정란향과 그 사이에 심각한 일이 생겼음을 짐작했다.

“그게 문제였지. 그녀가 자네와 나 사이의 일을 알고 있다는 게…….”

손검당은 독백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으나, 진산월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생각해 보니 정난향과 손검당의 관계는 손검당의 일방적인 짝사랑일 뿐이었다. 오히려 정난향은 그의 감정을 이용하여 그에게 임무를 내리고 그를 조종하는 상황이었다.

진산월은 손검당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게.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그의 모습에 손검당은 다시 웃으려 했으나 미소가 지어지기는커녕 살짝 일그러진 얼굴이 되고 말았다.

“꼭 알아야겠나?”

“자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말해 주게.”

“그건 너무 가혹한 말이로군. 자네마저 내 친구가 아니라면 나는 이제 누구와 술을 마시겠나?”

그 말을 할 때 손검당의 표정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서 하마터면 진산월은 고개를 돌릴 뻔했다.

그는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결연한 눈빛으로 손검당을 응시했다.

“말해 주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손검당이 핏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꼭 알아야겠나?”

“그래.”

“별로 대단할 건 없네. 듣고 나면 실망할지도 몰라. 틀림없이 그럴 걸세.”

“그건 듣고 나서 판단하겠네.”

손검당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네와 내가 제법 친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네. 자네가 강호의 고수들을 연파하여 혁혁한 명성을 쌓을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술상을 차려 주었지. 축하한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그때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따스했네.”

그 말을 할 때의 손검당의 얼굴엔 꿈을 꾸는 듯 엷은 홍조가 어렸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심지어 같은 쾌의당의 천살령주인 당각이 자네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와도 그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네. 그런데 무당산에서 종남파가 형산파를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조금씩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네.”

“어떻게 말인가?”

“우선 술상이 더 이상 차려지지 않았네. 굳이 자네 때문이 아니더라도 일을 마치면 가벼운 술상 정도는 꼭 준비해 주었는데, 그런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말일세.”

행복한 듯 보였던 손검당의 미소가 씁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변했다.

“나를 대하는 태도도 점차로 차가워졌지. 나는 원래 구박받는 데 도가 터서 그런 냉대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좀 쓰라리더군.”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지.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녀가 나를 찾아왔네. 무슨 일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는데, 평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었지.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소?”

“당신에게는 좋은 일이에요.”

“그게 무엇이오?”

“당신에게 마지막 임무가 내려졌어요.’

“마지막 임무라니?”

“그 임무를 완수하면 당신은 당을 떠날 수 있어요.”

“나보고 쾌의당을 떠나서 어디로 가란 말이오?”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이 당신 품속이라면?”

“그것도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듣고도 참는다면 그건 남자가 아닌 거지. 그렇지 않나?”

손검당은 진산월을 향해 물었고,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손검당은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었다.

“역시 자네는 내 마음을 알아줄 줄 알았네.”

“그래서 그 마지막 임무란 게 무엇이었나?”

“내가 늘 하던 일이지.”

“누군가를 죽이는 것 말인가?”

“맞았네.”

“그가 누구였나?”

“석곤.”

손검당의 대답에 진산월은 나직하게 한숨을 토해 냈다.

“석가장의 장주를 죽이라는 청부가 내려왔던 말인가? 자네의 큰아버지를?”

“그렇네.”

“자네는 그 청부를 받아들였고?”

“어쩔 수 없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그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네.”

진산월은 비어 있는 손검당의 오른쪽 팔소매를 바라보다 물었다.

“그 팔은 석 장주를 암살하려다 당한 것인가?”

“그래.”

“석 장주가 비록 석가장의 장주라고 해도 석가장에서 자네의 팔을 자를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손검당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중요한 건 누가 내 팔을 잘랐느냐 하는 것이 아닐세. 나는 청부에 실패했고, 당연히 그 대가를 받았을 뿐이지.”

진산월이 돌연 그들 사이의 탁자를 한쪽으로 밀고 손검당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옷을 벗어 보게.”

손검당은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남자에게 알몸을 보여 주는 취향은 없네. 아무리 유일한 친구라도 말이지.”

“벗어 보게.”

“괜찮네, 산월. 나는 정말 괜찮아.”

“벗어 보게.”

손검당은 복잡한 눈으로 진산월을 가만히 응시했다.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그의 두 눈만큼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빛을 번쩍이고 있었다.

손검당은 한참이나 진산월의 그런 얼굴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드러난 그의 상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잘린 오른쪽 어깨의 상흔만을 바라보았다.

그 상흔은 정말 독특했다. 팔이 잘려 나간 부위가 대리석처럼 매끈하고 핏기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몸은 피육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아무리 예리한 칼에 잘렸어도 혈관과 근육이 수축되어 그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손검당의 어깨 부위는 마치 나무토막을 자른 듯 너무도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사람의 몸은 나무토막이 아니거늘 어찌 이토록 완벽하게 자를 수 있단 말인가?

진산월이 자신의 잘린 어깨 부위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자 손검당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거 보게, 별거 없지? 상대의 솜씨가 좋아서 깨끗하게 잘린 바람에 후유증도 거의 없네.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니까.”

진산월은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팔이 잘려 나간 부위를 손으로 쓸어 보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피는 흘리지 않았지? 처음 잘릴 때부터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않나?”

손검당은 한차례 움찔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것 같군. 운이 좋았지. 이렇게 깔끔하게 잘라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낄 정도였네.’

그는 이죽거리며 농담처럼 말했으나,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잘린 부위의 피부가 완전히 죽어서 새살도 돋아나지 않겠군. 아마 통증도 거의 없었겠지.”

“아까 말했지 않나,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고.’

“왜 그런지 아나?”

진산월의 물음에 손검당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네. 팔이 잘린 고통스러운 기억은 더 이상 되새기고 싶지 않아.”

손검당이 도리질을 해도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자신이 할 말을 계속했다.

“그건 극한(極)의 음공(陰功)으로 피부는 물론이고 혈관과 근육까지 동시에 얼려 버렸기 때문일세. 그래서 팔이 통째로 잘렸어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고,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던 걸세.”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로군.”

“그래도 들어야 하네. 강호에 이토록 지독한 위력의 음공은 결코 많지 않네. 그리고 마침 나는 석가장에 이러한 음공을 익힌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손검당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사정하듯 말했다.

“나는 듣고 싶지 않네. 정말이야. 제발 부탁하네.”

진산월은 금시라도 무어라고 말하려다 손검당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옷을 입게.”

손검당이 드러난 상반신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약속해 주게, 그 이름을 절대로 내 앞에서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네.”

진산월의 말을 듣고서야 손검당은 천천히 상의를 다시 입었다.

한쪽 팔만으로 옷을 입는 모습이 어색할 법도 했으나 진산월은 묵묵히 그걸 지켜보기만 했다.

손검당은 비어 있는 오른쪽 소매를 허리춤에 꿰고 나서야 비로소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는 좋은 사람일세.”

“그렇지 않네.”

“아니야. 자네는 정말 좋은 사람일세. 왜냐하면 내게 친구는 자네뿐이거든.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친구라면 당연히 좋은 사람이 아니겠나?”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만 말해 주게.”

손검당은 그가 무엇을 물을지 조금 걱정되는 모습이었으나,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물어보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답해 주겠네.”

진산월의 음성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손검당의 귀에는 어느 음성보다 크게 들렸다.

“자네가 그런 일을 당한 후 그녀는 어떻게 되었나?”

손검당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한동안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한참 후에야 손검당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곤란한 질문이로군.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건 취소일세. 자네는 아주 고약한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 때로는 고약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

“그렇게 궁금하다면 말해 주지. 그녀는 팔이 잘린 채 찾아간 나를 보더니 딱 한마디를 했네.”

“뭐라고 하던가?”

“이제 당신은 자유예요.”

“그게 끝인가?”

손검당은 활짝 웃었다.

“그래. 나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 마음껏 갈 수가 있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자네를 찾아올 수 있었지.” 진산월은 안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손검당을 쳐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 뒤로 그녀를 만난 적은?”

“없네. 그녀와 나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난 걸세.”

손검당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진산월은 왠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검당의 말끝이 살짝 떨린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진산월은 더 이상은 그녀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손검당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깊은 밤, 낯선 객관의 작은 거실 안에서 희미한 유등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언제까지고 그렇게 조용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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