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52화
군림천하 (952)
가장 젊어 보이는 장한이 바로 옆의 콧수염을 기른 장한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둘째 형의 말이 사실입니까?”
“무엇 말이냐?”
“공가장의 셋째 여식이 파혼당했다는…….”
젊은 장한이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어 묻자 콧수염 장한은 피식 웃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느냐?”
“궁금하다기보다는・・・・・・ 공가장의 셋째 여식은 재색을 겸비한 보기 드문 미녀라는데, 그런 미녀가 파혼을 당했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 않아서 말이죠.”
“이제 보니 우리 막내가 공가장의 셋째 여식에게 관심이 많구나.”
젊은 장한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때 아래턱에 수염을 기른 장한이 히죽히죽 웃으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젊은 사내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관심이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냐?”
“아니, 부끄럽다기보다는…………….
“넌 여자를 사귀고 싶으면 그 머뭇거리는 말투부터 바꿔야 한다. 세상 어떤 여자가 말을 그렇게 얼버무리는 녀석하고 사귀려고 하겠느냐?” 젊은 장한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대뜸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래서 셋째 형은 장가라도 갔습니까?”
“뭐라고? 이 자식이 기껏 자기를 생각해서 진지한 충고를 해 주니까…….”
젊은 장한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턱수염 장한을 쳐다보았다.
“셋째 형, 솔직히 말합시다.”
“뭘 말이냐?”
“셋째 형은 지금까지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소?”
이번에는 턱수염 장한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내가 소싯적에 사귄 여자가…….”
“코흘리개 꼬맹이 시절에 같이 놀던 동네 여자애들 말고 말이오. 형이 턱에 수염이 난 후에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있느냔 말이오.”
턱수염 장한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돌연 손을 내밀어 젊은 장한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잡았다.
“막내야.”
젊은 장한은 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 찔끔하여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턱수염 장한은 조금 전과는 달리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젊은 장한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의 과거사는 묻는 게 아니다.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남자란 말이다……………’
젊은 장한은 재빨리 대답했다.
“압니다,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는 거.”
“그래, 용케도 잊지 않았구나.”
젊은 장한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데 잊었으면 천하에 다시 없는 바보 천치죠.”
“그래, 너는 꼭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다.”
“예?”
“그런 예감이 든다. 머지않아 오늘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감.”
“너는 오늘 일을 까맣게 잊고 다시 또 나의 숨기고 싶은 과거사를 들추려 하겠지. 그러니 오늘 미리 맞도록 해라.”
“아닙니다, 형님. 저는 절대로 안 잊을 겁니다. 저 그렇게 바보 아니에요.”
“바보 맞아.”
“둘째 형, 셋째 형 좀 말려 주세요.”
콧수염 장한이 짐짓 점잖은 음성으로 말했다.
“셋째야, 막내는 그만 놀리고 똑바로 앉도록 해라. 음식 나온다.”
그러고 보니 저쪽에서 두 명의 점원이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산더미처럼 들고 낑낑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제야 턱수염 장한은 젊은 장한의 목을 놓아주었다.
“오늘 보니 몸이 많이 부실해 보이는구나. 많이 먹고 살을 좀 찌우도록 해라.”
네 명의 장한이 시킨 음식이 넓은 팔선탁을 가득 채웠다. 그나마 진산월과 전흠이 식사를 마치고 산매탕만을 남겨 두고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탁자가 비좁을 뻔했다.
음식이 차려지자 네 명의 장한들은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들처럼 정신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때문에 가려는 건 아니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던 장한들 중 처음에 인사했던 털복숭이 장한이 그에게 넌지시 묻자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진즉에 식사를 마쳤소. 맛있게 드시오.”
“고맙소. 잘 가시오.”
진산월은 그들 형제를 한 번씩 차례로 본 후 몸을 돌렸다. 전흠은 진산월의 뒤를 따르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산을 마치고 만화루를 벗어날 즈음, 전흠이 참지 못하고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혹시 그들 형제를 전에 보신 적이 있습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냐?”
“장문 사형의 반응이 꼭 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처음 보는 자들이다.”
“제가 잘못 생각했군요.”
“그렇지는 않다. 비록 처음 만나는 자들이지만,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다.”
진산월의 말에 전흠은 눈을 크게 떴다.
“역시 그렇군요. 어쩐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당금의 무림맹주인 위지립에게는 몇 명의 믿을 만한 심복들이 있다. 그들을 쌍수사겁(雙叟四劫)이라고 하는데, 하나같이 무서운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라고 하더구나.”
진산월이 이 상황에서 그들의 이름을 거론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는가?
전흠이 알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바로 사겁이로군요.”
“그런 것 같다.”
진산월의 말에 전흠은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장문 사형께서도 아직 확신은 없으신 거로군요.”
“직접 만난 적이 없으니 단지 짐작만 할 뿐이다.”
“왜 그들을 사겁이라고 의심하셨습니까?”
진산월의 대답은 전흠이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늘 만난 사람들 중 나를 유인한 자들은 그들뿐이기 때문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제 이 공자의 수하가 찾아와서 무림맹주 위지립과 무단주 사효심이 낙양으로 들어왔다고 알려 주었다. 그들이 어디에 숙소를 정했는지 아느냐?”
전흠은 무림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무림맹주와 무단주가 자신들이 있는 낙양으로 왔다는 것에 놀랐으나, 진산월의 질문에 나름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러다 무언가를 느낀 듯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아, 혹시 만화루가 아닙니까?”
진산월이 모처럼 전흠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는 제법 강호인다워졌구나.”
“장문 사형께서 식사를 거의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이곳을 찾아온 것이 단순히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부터 그 이유가 무얼까 하고 나름대로 궁리하고 있었는데, 마침 장문 사형의 말씀을 들으니 짐작이 되더군요. 장문 사형께서는 위 맹주와 사 단주를 만나기 위해서 만화루를 찾으신 것이지요?”
“그래. 그들이 내가 머무르는 객잔 건너편에 숙소를 정한 것에는 나를 초대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럼 초대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모양새가 더 좋지 않았을까요?”
“초대장 같은 것은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는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전흠이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이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찾아간 것입니까?”
“그들도 내가 가리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만화루에 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로부터 접촉이 올 거라고 짐작했지.”
전흠은 진산월이 위지립을 만나기 위해 왜 이런 복잡한 방식을 택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위지립이 무림맹주라고 해도 진산월 또한 무림맹 소속의 선반을 이끄는 사람이 아닌가? 위지립이 진산월을 만나고 싶었으면 정식으로 초대하면 되는 것이고, 진산월 또한 배첩을 보내 정식으로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진산월은 아무 통보도 없이 만화루로 향했고, 그곳에서 식사만 하고 나온 것이다.
전흠은 진산월과 위지립 사이에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렸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전흠은 진산월의 말을 이리저리 되짚어 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장문 사형께서는 만화루에 가 있으면 위지립의 수하들이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화루에서 만난 자들은 심일원 일가와 노부부, 네 장한밖에 없으니 그들 중 누군가는 반드시 위지립이 보낸 자들일 거라고 생각하신 거로군요.”
진산월은 전흠이 평소와는 달리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대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
“그들 중 심일원 일가와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노부부와는 산매탕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네 명의 장한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공가장의 셋째 여식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들으라는 듯이 말입니다.”
“계속해 보아라.”
“그래서 장문 사형이 그들 네 사람을 위지립이 보낸 자들로 판단하신 겁니다. 네 명이라는 인원과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세를 보고 위지립의 측근인 사겁이라는 신분을 짐작하신 것일 테고요. 아닙니까?”
“그렇다.”
진산월이 계속 자신의 말에 수긍하자 전흠이 더욱 열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야기를 꺼낸 공가장이야말로 위지립이 장문인을 초대한 장소가 되겠군요.”
“맞다. 이제는 제법 정확하게 일의 내막을 꿰뚫어 볼 줄도 알게 되었구나.”
진산월의 칭찬에 한순간 전흠은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듯한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성격이 급하고 행동이 거칠어서 엉뚱한 판단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던 자신이 어느덧 노련한 강호인처럼 예리한 추측으로 장문인의 행동과 생각을 맞혀 낸 것이다.
흥분과 고양감으로 잔뜩 상기된 전흠의 얼굴을 묵묵히 보고 있던 진산월은 그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다른 점들에 대해서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오늘은 전흠이 생전 처음으로 자신도 생각이란 것을 할 줄 아는 존재임을 깨달은 날이다. 이런 좋은 날의 분위기를 굳이 깨고 싶지 않았다.
전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은 오늘 만화루에서 진산월을 찾아온 위지립의 수하들이 사겁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겁 외에 몇 사람이나 목적을 가지고 진산월에게 접근했는지는 진산월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위지립이 공가장으로 진산월을 초대한 이상, 공가장은 다른 어떤 장소보다 더욱 무서운 용담호혈(龍潭虎穴)로 변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