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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70화


군림천하 (970)

손풍은 모든 식솔들의 환대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꿈꾸었으나,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입구에서부터 적지 않은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내 친구들이랑 집에 들어가서 밥 좀 먹겠다는데 왜 안 된다는 거냐?”

손풍이 눈을 부릅뜨고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그의 앞을 막아선 무사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장주님께서 예전에 저자들의 출입을 엄금하셨다는 걸 공자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절대로 저자들을 안으로 들일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까지 그놈의 출입 금지 타령이란 말이냐?”

“장주님께서 다른 지시를 하실 때까지는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무사는 오히려 손풍에게 사정을 했다.

“저자들을 들여보냈다는 걸 장주님께서 아신다면 저희는 그날부로 모가지가 달아날 겁니다. 공자께서 저희의 사정을 봐주십시오.”

무사가 이렇게까지 애원하자 손풍도 더 이상 막무가내로 자기 고집만 부릴 수 없었다.

뒤에서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마달이 작은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우리는 괜찮으니 너 혼자 들어가 인사드리도록 해라. 우리는 다음에 만나서 회포를 풀도록 하자꾸나.”

“그래, 그게 좋겠다.”

종화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도 이렇게 말을 하자 손풍은 답답하기도 하고 분기가 솟구쳐서 가슴을 두드리며 한탄을 했다.

“이런 제기랄. 명색이 대종남파의 제자이며 손가장의 유일한 아들인 내가 친구들하고 집에서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는단 말인가? 뭐 이란 개떡 같은 일이 다 있어?”

그가 버럭버럭 노성을 내지르고 있을 때, 갑자기 닫혀 있던 대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의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망나니 같은 놈이 함부로 소리를 질러 대는 거냐?”

그 빙굴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싸늘한 말에 손풍이 움찔 놀라 돌아보니 대문에서 한 사람이 절룩이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손풍은 무심결에 무어라고 쏘아붙이려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그 청년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행동이 그를 살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야수처럼 번뜩이는 두 눈, 이마에 매어져 있는 붕대, 그리고 절룩거리는 걸음걸이!

그것은 요즘 서안에서 손노태야보다 더욱 높은 명성을 올리고 있는 손가장의 상징과도 같은 한 인물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이, 이제 보니……?

손풍이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지금까지 조용히 한쪽에 서 있던 동중산이 재빨리 다가와 그 청년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중산이 응 사숙을 뵙니다. 별래무양하셨습니까?”

눈앞의 청년이 바로 웃을 때마다 더욱 무서워진다는 소벽력 응계성임을 알게 되자 겁이 없고 천방지축인 손풍도 한순간 가슴 한구석이 싸늘해졌다.

응계성에 대해서는 종남파를 나오기 전에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 번 들었던 것이다. 특히 장승표가 그에게 거듭해서 단단히 겁을 주었다.

“너 혹시라도 그 사람 앞에서 지금같이 거들먹거렸다가는 절대 제명에 못 산다.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고 그저 죽었다 생각하고 쥐 죽은 듯 있도록 해라.”

그때 손풍은 거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이래 봬도 소싯적부터 눈칫밥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오. 그분이 소문대로 거칠고 성격이 급하다면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났으니 걱정 따윈 붙들어 매시오.”

그때 장승표는 가슴을 치며 한탄을 했다.

“아이구. 지금 그런 모습이라면 안 봐도 네놈이 무슨 꼴을 당할지 눈에 선하구나. 내가 직접 내려가서 그 광경을 직접 봐야 지금의 답답함이 풀어질 텐데…………. 아예 나도 따라갈까?”

그 말을 할 때의 장승표의 표정이 너무나 실감이 나서 손풍도 왠지 응 사숙 앞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크게 경을 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 응 사숙에게 하마터면 심한 욕설을 할 뻔했다고 생각하니 천하의 손풍도 손발이 떨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동중산이 눈짓을 하자 손풍은 허겁지겁 응계성 앞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손풍이 평소 존경해 오던 응 사숙을 뵙게 되니 기쁘기 한량이 없습니다. 모자란 제자지만 어여삐 봐주십시오.”

동중산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손풍의 태도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과거 그가 노해광을 대할 때의 모습이 생각나 실소가 흘러나왔다.

‘평상시에는 한없이 천방지축인 것 같아도 자기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용케도 넙죽 엎드리는구나. 눈치가 비상하다고 해야 할지,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 해야 할지…………..?

응계성 특유의 성난 듯한 눈이 동중산과 손풍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언지 모를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지 모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내 응계성은 동중산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 사질을 모처럼 보는군, 이번에 장문인을 모시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네. 수고했네.”

담백할 정도로 간단한 인사였으나, 동중산은 모처럼 활짝 웃었다.

그는 일차 중원행 때부터 응계성을 줄곧 보아 왔기에, 그가 좀처럼 남을 칭찬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이런 격려 어린 말을 들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마음 한구석이 흐뭇해질 정도였다.

“고생은 장문인과 사문 어른들이 하셨을 뿐, 저는 그저 두 사제들과 그분들 뒤만 따라다녔을 뿐입니다.”

“그게 힘든 일이지.”

응계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으나,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손풍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유 사형과 나를 완전히 짐짝 취급하는구나. 내가 이번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데. 고생도 내가 제일 많이 한 것 같은데.’

그의 속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응계성의 칼날 같은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너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올 초에 장문인의 눈에 들어 본 파의 제자가 된 손풍이라 합니다. 장문인을 모시고 무당산까지 갔다가 무사히 돌아와서, 부친께 안부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이처럼 당당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본 적이 없는지라 마달과 친구들이 신기한 동물을 보는 사람처럼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응계성은 손풍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았다. 금시라도 흉광이 이글거릴 듯한 그 눈빛에 손풍은 사나운 매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응계성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장주께 못돼 먹은 아들 녀석이 하나 있어서 사람을 만들려고 장문인께 보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 네가 바로 그 손풍이로구나.”

평상시의 손풍이라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참지 못하고 버럭 성질을 부렸을 테지만, 지금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객기로 잠시 좋지 못한 시절을 보냈지만, 본 파에 들어온 후로는 누구보다 충성스럽고 건실한 제자가 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손풍의 태도는 듬직했고, 음성에는 당당함이 서려 있어 누가 보기에도 명문정파의 제자다운 모습이었다.

손풍이 어찌나 진지해 보였던지 손풍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마달과 친구들조차 그가 종남파에 들어가서 정말 사람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응계성은 손풍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다가 특유의 퉁명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장주를 뵈러 왔으면 조신하게 들어가서 뵐 것이지, 무얼 그리 큰 소리를 내며 떠든 것이냐?”

손풍은 바짝 얼은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네 명의 친구들을 슬쩍 가리켰다.

“저 녀석들은 제가 본 파에 입문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던 친구들입니다. 오늘 모처럼 만난 지라 아버님께 인사도 같이 드리고, 간단한 회포라도 풀기 위해서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왜 안 들어오고 소란을 피운 게냐?”

무사들 중 하나가 사정을 설명하려 했으나, 손풍이 재빨리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철없던 시절에 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부친의 속을 썩여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부친께서 많이 노하셔서 당분간 눈앞에 어른거리지 말라고 호통을 치셨는데, 호장무사들이 아직도 그때 일이 마음에 걸리는지 걱정하더군요. 저도 그렇지만 저 녀석들도 이제는 모두 제법 철이 들어 부친의 눈밖에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지난 과오를 정식으로 사과도 드릴 겸 함께 왔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손풍의 조리 있는 말솜씨에 응계성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손풍의 친구들이 손노태야에게 출입 금지령을 당한 건 응계성이 손가장에 오기 훨씬 전의 일인지라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그로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장주님을 만나 뵙는 게 순리겠군. 마침 안에 계시니 들어가 보도록 해라.”

손풍은 넙죽 허리를 조아렸다.

“응 사숙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손풍이 일부러 응계성의 허락을 받았음을 큰 소리로 말하니 호장무사들도 더 이상은 그를 제지할 수가 없었다.

응계성이 회람연에서 화산파의 매화사절 중 북문도를 꺾은 후 그는 서안의 무림인들에게 커다란 칭송을 받았다. 대결 자체는 명문정파의 고수들답지 않은 난폭하고 처절한 것이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일반 무사들 사이에서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로 부각된 것이다.

부족한 무공 실력을 승부에 대한 집념과 투쟁심으로 극복한 그 싸움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많은 이들의 뇌리에 진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더구나 그는 당금 무림의 제일고수인 신검무적의 사제가 아닌가? 신분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그는 현재 손가장의 호장무사들이 가장 믿고 따르는 인물이었다.

사실 응계성은 회람연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에서 누워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야 몸이 어느 정도 회복하여 오늘 모처럼 바깥으로 나왔다가 문밖에서 손풍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응계성의 허락을 얻은 손풍은 기세도 당당하게 네 명의 친구들을 이끌고 장원 문을 넘게 되었다.

손풍이 손노태야를 찾아갔을 때는 마침 손노태야가 느긋하게 자신이 즐기는 백호은침을 마시며 오후의 일과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누가 왔다고?”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손풍이 왔다는 말에 손노태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남파로 끌려갈 때만 해도 집 근처는 얼씬도 안 할 것처럼 소리를 지르더니 별일이군. 들어오라고 해라.”

“예.”

집사가 나간 후, 곧이어 손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손풍의 뒤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끌려오듯 따라오는 네 명의 청년들을 보자 손노태야의 얼굴이 냉엄하게 굳어졌다.

“아버님. 불초자식의 절을 받으십시오. 본 파의 장문인을 모시고 강호를 종횡하며 본 파의 영광을 되찾고 오느라 이제야 아버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손풍이 큰 소리로 외치며 넙죽 절을 하는데도 손노태야는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네 명의 청년들을 싸늘한 눈으로 쏘아보고만 있었다. 그 눈빛과 표정이 어찌나 삭막한지 마달 등 네 사람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안절부절못하며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손풍이 그들을 돌아보며 낮게 속삭였다.

“뭣들 하는 거야? 빨리 나 따라서 절부터 해, 이 바보들아.”

마달 등 네 사람이 허겁지겁 그 자리에 엎드리며 절을 했다.

“노태야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못 뵌 사이에 신수가 훤해지셨습니다.”

“때리지만 말아 주세요.”

손풍이 눈을 부라렸다.

“마지막 말을 한 놈은 누구야?”

갈도가 찔끔하여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맞는 게 제일 싫어.”

손노태야는 그 한심한 작태를 지켜보고 있다가 손풍은 쳐다보지도 않고 집사에게 말했다.

“오늘 정문을 지키는 자들은 누구냐?”

“감응기가 조장으로 있는 병조(丙組)입니다.”

손노태야는 한 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들을 모두 잘라라.”

냉혹한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특히 손풍의 친구들은 핼쑥하게 변한 얼굴로 달달 떨고만 있었다.

감응기는 손가장의 호위무사로 몇 년 동안이나 충성스럽게 일을 맡아 오던 인물이었다. 그동안 몇 번의 사소한 사고는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큰 잡음 없이 일을 처리해 와서 주위의 신망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노태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와 조원들을 모두 자르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는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손노태야의 입에서 일단 명령이 나온 이상 무조건 지켜져야만 한다. 집사도 그걸 알고 있기에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예.”

집사가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던 손풍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 손노태야를 올려다보았다.

“아버님이 그들을 자르려는 건 그들이 제 친구들을 문 안으로 들여보냈기 때문입니까?”

손노태야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에서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머무를 필요가 없다.”

손풍은 손노태야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입을 벌리며 빙긋 웃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곳은 손가장이고, 손가장의 주인은 아버님이시니 감히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가 존재해서는 안 되겠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제가 이곳에서 감히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냐?”

손풍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바로 접니다.”

손노태야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너는 아직도……”

“저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번번이 아버님의 말씀을 어겼을 뿐 아니라 어울리지 말라는 무리들과 어울려 아버님의 명성에 누를 끼쳐 왔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말라는 자들을 만났을 뿐 아니라, 그들을 다시 집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그야말로 천하에 상종 못 할 놈이 아니겠습니까? 정문을 지키다가 제 강압에 못 이겨 문을 열어 주고 만 무사들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손노태야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그래서 네놈도 내쫓으란 말이냐? 원한다면…….

손노태야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손풍은 당당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아버님의 하나뿐인 아들이고, 종남파 장문인의 제자입니다. 제가 쫓겨난다면 아버님은 물론이고 본 파의 명성에도 커다란 흠이 될 것이고, 저는 또다시 아버님께 폐를 끼친 천하에 다시없을 불효자식이 되고 말 겁니다.”

손노태야의 눈빛에 살벌한 안광이 번뜩였다.

“네가 지금 종남파의 위세를 믿고 나를 겁박하려는 게냐?”

손풍은 힘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 현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버님께서 저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시고 저를 믿지 못하는 건 모두 제 과거가 쌓은 업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 모든 업보를 기꺼이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벌하시고 정문의 무사들과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님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시든 저는 기꺼이 받겠습니다.”

“업보라. 말은 잘하는구나.”

“제가 종남파에 들어와 사부님께 배운 것이 많습니다만, 그중 한 가지는 절대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자기가 저지른 일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겁니다. 종남의 제자는 절대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저를 벌해 주시고,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님.”

손풍은 비장하게 외치며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쿵!

어찌나 세게 숙였는지 이마가 바닥에 부딪치며 제법 큰 소리가 났으나 손풍은 숙인 이마를 쳐들지 않았다.

손노태야는 그런 손풍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들 부자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동안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마달과 친구들은 장례식장에라도 온 사람들처럼 침통한 안색으로 가만히 있었고, 진즉에 손노태야의 지시를 따르러 나가야 했을 집사 또한 한쪽에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손노태야는 마음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손풍을 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검무적의 제자란 말이지.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다면 지금의 마음을 변치 말도록 해라.”

손풍은 바닥에 엎드린 채 큰 소리로 외쳤다.

“명심 봉행하겠습니다.”

“오늘만이다. 다음에 저자들이 다시 내 집에서 나를 보는 일은 없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라.”

“예, 아버님.”

손풍은 힘차게 대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이마는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으나, 점차로 가라앉으며 붉은 기도 가시기 시작했다.

손풍은 친구들에게 눈짓을 하고는 방을 벗어났다.

손노태야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종남파에 가더니 말솜씨만 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그래도 조금은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된 모양이구나.”

집사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감응기 조장에게는 제가 따끔하게 말을 해 놓겠습니다.”

손노태야는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집사가 허리를 조아리고 방을 나갈 때까지도 손노태야는 손풍이 사라진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피식 웃고 말았다.

“업보라. 그게 자식이 부모한테 할 소리냐,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아.”

손노태야의 방을 나온 손풍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마달이 한숨 돌렸다는 얼굴로 친구들과 희희낙락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왜 그래? 손노태야께서도 용서해 주시고 일도 잘 풀렸는데?”

사실 손풍은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허풍스러운 마음으로 손노태야에게 큰소리를 친 것이었다. 한데 막상 말을 내뱉고 나니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커다란 울림이 일어났다.

특히 신검무적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잊지 말라는 손노태야의 말이 계속 뇌리에서 맴돌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도가 신나는 표정으로 떠들어 댔다.

“오늘은 노태야께 허락도 받았으니 모처럼 손가장의 특별 음식들을 실컷 먹도록 하자. 정말 기대되는구나.”

손풍은 천연덕스러운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보고 있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야 너희들이지.”

“우리가 뭐 어때서?”

“아니다. 가자, 오늘은 정말 코가 삐뚤어지게 먹고 마시도록 하자.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

손풍은 친구들을 데리고 자신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 손풍과 네 명의 친구들은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손풍이 침상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네 명의 친구들이 어느새 모두 떠났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퍼마시고 아직도 방의 여기저기에 쓰러져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명도 남지 않고 모두 가 버린 것이다.

손풍은 탁자 옆에서 흘려 쓴 듯한 마달의 서신을 볼 수 있었다.

<손가야, 너와 우리 사이는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서로 좋을 것 같구나. 좋은 기억, 아픈 기억 모두 남겨 두고 떠나마. 무운(武)을 빈다.>

손풍은 한참 동안이나 그 서신을 들고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뜨고 식솔들이 부르러 올 때까지도 그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앉은 채 그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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