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0화
냉정히 생각해 볼 때 그날 밤 왕비의 침소를 찾아온 것은 행운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 예언을 할지도 알 수 없는 고집불통 예언가보다는 이루릴 세레니얼에게 빚을 지게 하는 편이 훨씬 낫죠. 왕비가 아는 바론 그 엘프의 행적엔 의문이 많고 행동 기준 또한 파악하기 어렵지만, 공교롭게도 그런 특성은 신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입소문에 따르면 이루릴과 신 사이에는 더 많은 공통점이 있는 듯합니다. 어떤 비관주의자라 하 더라도 이루릴의 호의 하나를 예약해 두는 것이 멋진 일이라는 것에 동의할 거예요.
하지만 이루릴의 방문은 조금 늦은 것이었죠. 왕비는 예언자가 예언을 거부하는 이유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이루릴의 방문은 그 흥미의 불꽃에 기 름을 부은 격이었습니다. 왕비는 뻔하다고 생각했어요. 세계의 수호자인 양 행동하길 좋아하는 그 신비한 엘프는 미처 막지 못했던 지난 전쟁 대신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막으려 결심한 거죠. 예언자가 고문에 굴복하여 바이서스를 위해 예언하기 시작하면 바이서스는 반드시 복수를 감행할 테니까 요. 그리고 복수가 끝난 후에는 세계의 질서가 바이서스의 왕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좋다는 왕비가 보기에는 당연한―주장을 하게 될 테고요. 이루 릴이 저지하고 싶은 것은 그것들이겠지요. 예언자가 예언을 거절하는 이유도 그것일 테고요. 왕비는 세상의 위선자들에게 보내는 저주 문구를 궁리 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단호한 성격 때문에 왕비는 그런 자기 위안에 오랫동안 매달릴 수 없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해 때문에 왕비는 더욱 의욕이 치솟았어요. 프로타이스한 짓처럼 보이지만 그걸 꼭 반골기질로 치부할 수는 없을 거예요. 방해는 그 자체로 가치거든요. 금고가 보이면 안에 귀중품이 들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잖아요. 예. 미래를 알고 싶다는 왕비의 욕구는 그만 더욱 커지고 말았습니다. 왕비는 당장 예언자에게 달려가고 싶어졌습니 다. 그랬다면 아마도 목공예의 새로운 일파가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톱질, 도끼질, 대패질 등의 기술은 그대로인 채 재료만 인간으로 바뀐.
하지만 그것은 전설적인 엘프를 정면으로 적대하는 짓이지요. 이루릴이 전쟁 막기를 취미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그만한 능력과 인맥이 있 다는 말이지요. 바이서스의 왕비라 해도 함부로 적대할 수 없는 힘이 그 엘프에겐 있었습니다. 왕비에겐 다른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이루릴을 거스르 지 않으면서 이루릴을 거스를 방법이 있을까요?
여러분. 웬만하면 자신을 이런 처지에 빠트리지 마세요. 하룻밤이 그냥 날아갑니다. 왕비는 새벽이 방 안을 기웃거릴 때까지 한숨도 못잔 채 고민했습니다.
일출을 인식했을 때 왕비는 느닷없이 결정을 내렸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야겠군요. 왕비는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머뭇거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지요. 그녀는 즉시 사람을 불러 예언자에 대한 고문을 중단한 다음 잘 씻기고 잘 먹이라 말했습니다. 그러곤 잠자리에 들어서 단호하게 잠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