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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11화


얼마 후, 어떤 자들이 감금되어 있던 예언자를 탈출시켰습니다.

순수하게 현상만 놓고 본다면 탈옥사의 한 장을 차지할 만한 대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정식 죄수가 아니기 때문에 예언자가 있던 곳은 정식 감옥의 감방이 아니라 왕비 처가의 별장 지하실이었거든요. 게다가 경비마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이유 때문에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탈 출은 약간의 배짱과 약간의 재치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이었죠. 하지만 시사적인 의미는 대단했습니다. 왕비에 대한 정면 도전이니까요.

왕비는 충분한 격노를 보여주었습니다. 화를 견디지 못하고 가끔 기절까지 하는 왕비에게 시의는 기후 좋은 곳에서 요양하라고, 그러니까 심장 약한 왕 곁에 있지 말라고 충고해야 했습니다. 틀림없이 왕이 시의에게 부탁한 것이겠지요. 가장 열광적인 음모론 애호가들도 ‘감히 왕비의 죄수를 빼낼 자가 있겠어? 왕비의 동의 없이?’와 같은 타당한 의문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엘프 이루릴은 그런 수도의 분위기를 살핀 다음 예언자가 감방을 빠져나온 지 나흘째 되던 날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예언자에게 가볍게 고 개를 끄덕이곤 그 옆에 있던 왕지네에게 말했습니다.

“성공했어요. 내가 추적자가 됐죠. 며칠 있다가 돌아가 예언자가 도망치던 도중 고문으로 상한 몸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보고할게요. 그러니 무리하 지 말고 느긋하게 도망쳐요.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말을 끝낸 이루릴은 길 물어본 여행자마냥 가볍게 몸을 돌려 훌훌 떠났습니다. 왕지네가 이루릴을 그러안고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엘프 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에 홀린 기분이 된 두 사람 중에 예언자가 먼저 정신을 차렸습니다.

“저 엘프 당신이랑 며칠 전에 만났다고? 그리고 당신 이야기 듣고는 바이서스 법률에 구애되지 않는 엘프니 상관없다면서 탈출을 도와줬다고? 그러 곤 추적까지 없애주었다고? 아무래도 행운이 지나치게 많은데.”

“의심하는 거야? 나는 그런 느낌 못 받았는데.”

“당신은 저 이루릴이랑 며칠이나마 함께 지냈지만 나는 결과만 보니까. 좀 이상해.”

“하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갔잖아. 무슨 속셈이 있었으면 얼마든지 우리 옆에 있을 수 있을 텐데.”

예언자도 그 사실을 설명할 순 없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이루릴이 세상사를 쉽게 여기고 남 도와주길 좋아하는 엘프그녀 자신이 보여준 모습 이었죠.—라고 결정했습니다. 이루릴에 대한 판단을 끝낸 예언자는 왕지네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구했지? 당신 쫓기게 될 텐데.”

“나 도둑이야. 원래 쫓기는 몸인걸. 달라질 것 없어.”

“말장난 하지 말고.”

“짜증나잖아.”

“짜증?”

“나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당신 다른 사람들 생각해서 예언 안 하는 거지? 그런데 욕먹고 두드려 맞고 고문까지 당하다니 너무하잖아. 기껏 자기들 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예언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어. 보통 그렇게 살잖아. 그런데 사람을 그렇게 조져대냐. 짜증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끝에 사태를 최악으로 만든 작자들은 수없이 많아. 내 생각이 옳다는 근거가….”

“분명히 없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뭘 하려고 했고 당신은 하지 않으려고 하잖아. 차이가 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은 예언 없이도 잘 살아. 그런 데 당신이 예언을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면, 우리는 모두 잘못 살고 있다는 말이 되겠네? 그런데, 음,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는 멍청한 짓이라면, 그 건 멍청한 짓이 아니잖아. 말을 잘 못하겠는데, 이해가 돼?”

입버릇이 나쁘고 성격도 원만한 편이 아니지만 예언자는 상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구해준 은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 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질문만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내가 예언을 하는 것이 무섭진 않았어?”

예언자는 그래서 예언을 못하도록 구해낸 거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지요. 하지만 왕지네는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무서워? 아, 그 겁탈 이야기? 당신 말이 맞다면 그건 무서워해야 할 일이 맞겠네. 이루릴이 도와준 것도 그 때문인가? 하지만 난 그게 왜 나쁜 건지 이해를 못 했어. 잘됐지?”

“음? 잘되다니, 뭐가?”

“다른 사람한테 설명할 것이 생겼잖아. 설명하는 것 재미있지. 고문에도 꺾이지 않을 만큼 확실히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이라면 더 그럴 테고.” 

“듣겠다는 말인 것 같네.”

“들을 거야.”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예언자는 원하던 대답보다 낫다고 생각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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