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4화
솔베스를 찾는 이들은 용기와 모험심이라는 덕목에서만큼은 다른 이들에게 뒤지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의 꿈이나 희망에 관대한 편이지요. 상대방이 몽상가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똑같은 말을 듣게 될 것 같으면 미리미리 말을 삼가야 하는 법이잖아요. 하 지만 사람이란 다양한 법이고 솔베스 사람들도 가끔은 참 현실 감각 없다고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요. 화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 다. 드래곤이 살던 땅을 그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솔베스로 찾아온 그녀를 보며 솔베스 사람들은 자신이 보수주의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화가의 희망이 어떠했건 그 생활 태도는 충분히 현실적이었습니다. 개척지인 솔베스엔 찾기만 한다면 미술 수요는 많았습니다. 화가는 작품 요청만 받는 것이 아니라 간판이나 표지판 같은 것도 거절하지 않고 성의껏 그려서 착실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곤 시간이 남을 때마다 솔베스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그 풍경을 관찰했죠. 어쨌든 솔베스에 토박이는 없으니 소재를 찾으려면 직접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림은 시간이 꽤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밥값을 벌려고 닥치는 대로 그린다면 더욱 시간이 부족하죠. 화가는 얼마 있지 않아 예언자를 찾아 왔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던데 여기 지리를 잘 아신다고요?”
“조금 압니다. 광물 탐사가 취미라서 이곳저곳의 돌과 흙을 많이 보죠.”
“그러려면 굉장히 넓은 범위를 돌아다녀야 하는 거죠? 잘됐네요. 풍경화를 그리고 싶은데 괜찮은 곳에 데려다주시겠어요?”
“당신이 어떤 곳을 좋아할지 알 수 없는데요.”
“그렇겠네요. 그럼 한잔 사도 될까요? 남의 관심사를 예의 바르게 들어야 한다는 귀찮은 조건 하에.”
“술자리에서야 흔한 일이니 납득할 만한 조건이군요. 좋습니다.”
술자리에서 화가가 꺼낸 첫 마디는 예언자를 실소하게 만들었습니다. 화가는 ‘자기 영토를 돌아다니던 시에프리너가 시간이 나면 꼭 멈춰 서 쉬었을 만한 장소’를 보고 싶다고 했지요. 나름대로 구체적이라면 구체적이지만 누가 드래곤의 취향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화가도 예언자의 지적을 인정 했죠. 그래서 그녀의 요구는 ‘여기에 드래곤이 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역시 형식이야 구체적이지만 내용은 추상적인 요구 였지요. 화가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웃어버렸습니다. 예언자가 질문했습니다.
“드래곤이 그렇게 좋습니까?”
“드래곤에 대해선 별 생각 없어요. 드래곤의 처지에 관심이 있지요.”
“처지요?”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제가 집을 골라야 한다고 치죠. 그렇다면 보통 살기 편한지를 살피겠지요. 그래야 똑똑하다는 말도 들을 테고요. 그런데 제가 그 집에서 수백, 수천 년 동안 혼자 살게 될지도 몰라요. 거기를 떠나지도 않을 테고 친구들이 거기로 찾아오지도 않을 테고요. 그래도 살기 편 하다는 이유가 가장 중요할까요?”
예언자는 화가가 ‘그래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언자가 이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 화가는 한결 편안하게 말했죠.
“추락하지 않는 드래곤은 어쩌면 그냥 똑똑한 선택을 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드래곤은 보석을 좋아한다잖아요. 반짝이기만 할 뿐 본질적으론 아 무 쓸모없는 돌멩이를 사랑할 수 있는 감성이 있는 드래곤이면 자기 영토로 그저 살기 편리한 곳을 골랐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 건 싫어요. 그래서 저는 그녀가 수면기에 들어간 사이에 이 땅을 슬쩍 훔쳐보고 싶은 거예요. 왜 여길 골랐나 궁금해서요. 이렇게 말하니 이웃집 아낙네 살림살이는 어 떤지 궁금해하는 여자 같네요. 그게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예언자는 조금 후 말했습니다.
“괜찮은 고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고원은 아름다웠습니다. 화가는 대지에 생긴 흉터 같다며 좋아했지요. 하지만 여러 정황을 놓고 볼 때 화가가 더 흥미로워 한 것은 예언자의 몸에 있는 흉터 쪽이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