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25화
예언자가 어딘지 모를 장소에서 역사상 딱 한 번밖에 노출된 적이 없는 경이의 두 번째 목격자가 되고 있던 시각, 솔베스에선 화가가 웃다가 탈진한 상태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어요.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잠든 것은 아니지만 꿈을 꾸고 있었죠. 그녀가 잠꼬대처럼 말했어 요.
“왜 묻지 않았지?”
화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문의했고 그러자 그녀의 내부에 있는 약간 겁먹은 화가가 대답했지요.
“당신 등에 남긴 내 손짓이 무엇인지?”
화가는 뜨고 있던 눈을 떴습니다.
화폭에 담긴 솔베스의 풍경들이 보였지요. 대부분 소품이었지만 그 중 한 점은 상당한 대작이었습니다. 야외에 가지고 다닐 크기가 아니었죠. 그 그 림은 기억과 인상을 토대로 그려진 것이었고 그래서 그림 안에는 화가 자신도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녀 곁에는 예언자도 있었지요.
그 그림은 깊은 계곡 아래를 걷고 있는 두 남녀였습니다. 주위엔 유백색 안개가 자욱했고 따라서 그들의 앞쪽이 개활지인지 막힌 절벽인지 알 수 없 었습니다. 좌우를 막은 절벽은 칙칙하고 거친 빛깔이었고 조그맣게 그려진 하늘엔 흐릿하지만 대단히 큰 낮달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낮달이라기보다 는 태양의 시체 같았죠. 그림 전체에서 생기에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꿈틀대는 안개뿐이었습니다. 그 안개는 정말 대단했어요. 격분한 것처럼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그 쓸쓸하면서도 정체 모를 열기가 넘치는 풍경을 걷고 있는 남녀의 표정은 알 수 없었습니다. 둘 다 뒷모습이었거든요. 그림 속의 예언자는 초를 들 고 있었는데 그 자세가 기묘했습니다. 나이프를 거꾸로 쥐고 찌르려 할 때 어떤 자세가 되는지 아시죠? 예. 칼이 수평으로 머리 옆에 오게 되죠. 예언 자가 쥔 초도 그랬어요. 초는 수평으로 머리 옆에 있었고 그 때문에 불꽃은 초와 직각을 이루며 타오르고 있었죠. 그 곁에 있는 화가는 책을 펼쳐 들 고 있었습니다. 두꺼운 갈색 표지는 평범하지만 안쪽의 페이지들이 완전한 검정색이었습니다.
분명상상화라 해야겠지만 화가는 그것을 풍경화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본 솔베스가 그러했으니까요. 그림을 쳐다보던 화가는 긴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조금 후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옹송그렸어요.
“그래. 원하던 소재는 찾았어. 작품도 만들었고, 가자.”
화가는 일어나서 계곡 그림을 포장했습니다. 계곡의 그림을 치워둔 화가는 나머지 작은 그림들을 바닥에 죽 늘어놓았습니다. 가로 세로를 맞춰 빈틈 없이 바닥에 그림을 깐 화가는 검은 물감을 잔뜩 준비했습니다. 잉크까지 풀어 검은 물감을 한 동이 만든 화가는 그것을 바닥에 뿌렸습니다. 예. 그림 들 위에 시커먼 얼룩들이 생겼죠. 화가는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움직이며 그림 전부를 꼼꼼하게 훼손했습니다.
다음 날 화가는 솔베스를 떠났습니다. 그녀의 짐 중 특기할 만한 것은 대형 그림 한 점뿐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