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29화
예언자는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원하고 강요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루릴은 당신의 신병은 시에프리너에게 달려 있다고만 말했지요. 대신 이루릴은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동원하고 필요하다면 드래곤 레이디와 공조해서라도 왕비에게 엄중하게 경고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곤 일방적으 로 대화를 끊었습니다. 예언자는 허공을 향해 목이 찢어져라 외쳤지만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는 격분한 채 뒤를 앞으로 끌어왔습니다.
초현실적인 풍경이 사라지면서 현실이 펼쳐졌습니다.
그 풍경도 보통 사람 눈엔 꽤 초현실적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곳은 지하에 있는 거대한 굴이었지요. 반구형 천장의 최상부는 힘센 이가 돌을 던져도 절대 닿지 않을 높이에 있었고 넓이는 열병식이 가능할 정도인지라 굴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규모 때문에 초현실적이라는 표현을 쓴 건 아니에요. 사실 그 굴은 그 말도 안 되는 규모에도 불구하고 그리 커 보이지 않았습니다. 굴 가운데 웅크리고 앉아 안개 같은 빛에 감싸여 있는 거대한 드래곤 때문에.
“시에프리너! 이야기 들으셨지요? 부탁합니다. 저를 놓아주세요. 제 아들과 그 어머니를 걸고 절대로 예언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함께 있었기에 예언자는 추락하지 않는 시에프리너의 무서운 얼굴에 약간의 동정심이 비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기대 감에 차서 대답을 기다렸죠. 시에프리너가 말했습니다.
“유감스럽게 생각해. 하지만 너의 약속이나 맹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런 번거로운 감금도 필요 없었을 거야. 그러니 그 요구는 거절 하겠어. 이루릴 세레니얼의 호의를 믿고 차분히 기다려. 그것은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강대한 호의야. 그래도 믿을 수 없다면 위대한 드래곤 레이디를 믿도록 해. 나도 드래곤 레이디에게 부탁하겠어.”
“시에프리너!”
“이 어리석은 것. 모르는 거야? 왕비가 왜 너를 그렇게까지 불러내는 건지 몰라? 예언을 강요하기 위해서잖아. 그런데 예언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가 무슨 소용이야! 충격 때문에 혼란스러운 건 알지만 앞뒤가 맞는 소리를 해!”
부정하고 싶은 충동에 몸이 덜덜 떨렸지만 예언자는 시에프리너의 지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충격적인 소식을 잇달아 들었기에 정신에 빗질을 좀 할 필요도 있었죠. 예언자는 다시 주위를 회전시켰습니다. 이젠 익숙함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는 털의 들판이 나타났지요. 예언자는 그대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하지만 깜빡이는 태양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기에 곧 돌아누웠죠.
침착을 되찾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한 끝에, 프로타이스하게도 예언자는 자신이 침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에겐 아들이 있었어요. 처음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다 물어보다가 나중엔 당신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남자가 있었어요. 얼마나 멋집니까. 아직도 그 아이의 얼 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아니, 그 이름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예언자는 순수한 공포를 느꼈어요. 이름? 그래. 이름을 정해야 해. 그 아이가 평생 듣게 될 특별한 소리. 어떤 발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어떤 부분에 강세를 주는 것이 좋을까? 아니, 그녀가 정했을까? 그래도 할말은 없지만. 그렇다면 그 이름은 뭐지?
예언자는 자신이 무엇을 할지 깨달았습니다. 그는 탈출할 겁니다. 이루릴은 왕비에게 엄중히 경고하겠다고 했지요. 직접 나서서 예언자를 탈출시켰 던 것에 비해 보면 퇴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자는 그 불공평함에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결국 이루릴의, 그리고 드래곤 레이디의 관심사는 시에프리너뿐이었던 거죠. 시에프리너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예언자가 억류되어 있는 이상 그 아들의 생사야 관심 밖인 것입니다. 그의 아들을, 그 리고 화가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예언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까요? 이곳은 보통의 레어보다 더 엄중하게 격리되어 있습니다. 물론 예언자가 다른 레어를 본 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에프리너가 어떤 방해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요. 이루릴처럼 고도의 마법을 자유로이 쓸 수 있어서 공간을 희롱할 수 있 지 않은 바에야 이곳을 탈출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는 자가 있다면…………
순간 예언자는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습니다. 자신이 엎드려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예언자는 털 속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 쳤지요.
‘코볼드의 통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