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33화
‘이건 예언이 아니야.’ 예언자는 이미 몇 번째인지도 잊어버린 말을 또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현재야. 미래가 아니야. 따라서 예언이 아니지.’
당신도 현재를 본다고요? 음. 당신이 정말 현재를 직시하는지에 대해선 당신 친구들과 좀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눈 후에 판단하겠지만, 넓은 의 미에선 부정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당신과 예언자가 보는 현재는 같지 않아요. 다행히 예언자가 하고 있는 일을 가리키는 말은 이미 있 으니 신조어는 필요 없겠군요. 천리안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드래곤 레이디의 예측은 틀렸습니다. 예언자는 감시를 예지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도보로 하루 거리 이내의 모든 장소에서 일어나는 감시를 제자리 에서 보고 있을 뿐이죠. 어떻게? 예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단순하게 말하면 미래를 보는 거죠. 조금 복잡하게 말하면 미래의 공간을 보는 것이 고요. 그러니까 예언자는 내일의 이 공간이든, 한 달 후의 저 공간이든, 일 년 후의 그 공간이든 볼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예언자는 이 공간, 저 공 간, 그 공간의 어떤 시점이라도 볼 수 있지요.
즉 예언자는 어떤 장소든 그 현재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하지만 극도의 긴장과 도망치겠다는 의지, 탈출로를 찾아내는 생존 본능 등이 어우러져 예언자 는 그런 도약을 시도했고 성공하고 말았죠. 감시를 뻔히 보고 있었으니 그것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언짢아할 드래곤 레이디에게 작게나 마 위로가 될 일이 있다면 예언자가 치르는 대가가 만만찮았다는 거죠. 온갖 장소를 보느라 예언자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었어요. 심지 어 자기가 존재하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아, 이런. 당신도 그렇다고요? 술을 좀 줄이세요.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극도의 긴장감 때문에 천리안은 눈꺼풀처럼 바뀌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의도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아도 몇 초에 한 번씩은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말이죠. 전혀 원하지 않는 시점에 갑자기 어딘지도 모를 장소가 보이는 것은 혼란스러운 것을 넘어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예언자는 다치거나 미칠 것을 각오하고 계속 천리안을 쓰느냐, 그렇지 않으면 잠시라도 천리안을 감은 채 도박을 하 느냐를 놓고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예언자는 더 이상 감시의 눈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예언자는 온힘을 끌어 모아 주위를 살폈지만 어디에도 이상한 거동을 보이는 짐승이나 새, 벌레, 괴물 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무나 바위, 시냇물 도 완전히 자연스럽게 보였고 구름에 기이한 그림자가 비치지도 않았으며 어처구니없는 장소를 흐르는 안개나 느닷없이 땅을 후려치는 벼락도 없었 습니다. 감시가 사라진 것이 분명했죠.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언자는 천리안을 억눌렀습니다. 한참을 노력한 끝에 어딘지도 모를 장소가 눈앞에 나타나는 일이 조금씩 줄어들었어요. 예언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곤 왜 감시가 사라졌는지 고민했어요. 여러 가지 가설이 떠올랐지만 가장 그럴 듯한 것은 한 가지였죠.
‘이루릴 세레니얼이 바이서스 임펠에서 기다리고 있겠군.’
예언자는 이루릴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 궁금했습니다. 예언자가 지금껏 보아온 바에 따르면 이루릴의 최우선 목표는 시에프리너의 보호였어요. 그 리고 예언자는 시에프리너에게 확실한 위험 요소였지요. 이루릴은 그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공격할까요?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예언자를 뒤흔들었습니다. 미래를 보라는 강요와 미래를 보지 말라는 강요가 일으키는 회오리 속에서 예언자는 발에 땅 디딜 겨를도 없이 휩쓸려 다니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언자를 정말 분노케 하는 것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는 그들 모두가 미래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른다는 점이었습니다. 예언자는 누가 예언자냐고 외치고 싶었어요.
그들이 미래가 뭔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예언자에게 미래를 보라고 강요하거나 예언자가 미래를 볼까봐 걱정하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