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36화
그날 밤, 바이서스 임펠의 어느 건물 지붕 위에서 이루릴 세레니얼은 용마루에 걸터앉은 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궁성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낮에도 그녀는 그 지붕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로와 골목을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도 절규하는 예언자를 어렵잖게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인파 때문에 이루릴은 예언자에게 다가갈 수 없었지요. 드래곤 레이디의 견해는 그렇지 않았지만.
“일부러 놓아준 거지?”
드래곤 레이디는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 앉은 채 바이서스 임펠의 건물 지붕에 있는 이루릴을 힐난하고 있었어요. 이루릴은 왕비의 수하임이 분명한 이들이 인파 속에서 나타나 예언자를 끌고 사라지던 모습을 떠올리며 대답했지요.
“예언자를 데려갈 땐 데려가더라도 두 사람이 만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문제에서 나도, 그리고 당신이나 시에프리너도 제삼자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당신 정말이지…. 그런데 그 예언자도 정말 이해할 수 없군. 미래도 볼 수 있으면서 어떻게 자기를 고문한 여자는 알아보지 못한 거지?”
“인간들의 이야기나 소설엔 교묘한 변장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의 눈을 가장 쉽게 속이는 방법은 지위나 신분의 변화인 것 같아 요. 상당수 인간들이 지위를 개인의 생래적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가지고 있거든요. 왕비는 그것을 알고 있었겠죠.”
“하긴 상상하기 쉬운 일은 아니지. 정말 대단한 여자야. 어떻게 왕비가 화가로 변장할 수 있었던 거지? 귀족은 예술의 수요자지 생산자가 아니잖 “아?”
“아니오. 최고의 수요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쉬웠을 거예요. 가장 높은 수준의 안목을 가진 수요자는 어설픈 생산자 정도는 된다는 거죠. 그녀도 전 문 화가 노릇은 할 수 없겠지만 간판이나 표지판, 벽장식 등을 그릴 정도의 교양은 가지고 있는 것이겠죠.”
“그렇게 해서 예언자를 속였다는 거지. 하지만 왕은? 왕은 어떻게 속인 거지?”
“왕은 왕비가 울화병을 다스리기 위해 휴양을 떠났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내가 예언자를 탈출시켰을 때 왕비가 부린 난동 기억하죠? 나를 도와주기 위해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때부터 계획이 진행 중이었던 모양이에요.”
“정말 무서운 여자군. 아니, 엽기적이라고 해야겠어. 물론 자식이라면 인질로는 최고이긴 하지. 게다가 그녀의 자식이기도 하니까 다른 사람이 간섭 하긴 쉽지 않지. 자신을 제삼자라고 말하는 당신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군. 하지만 그런 장점들이 있다고 해서 상대방의 아이를 배는 건, 뭐랄까. 정 신이상 같지 않아?”
이루릴은 꼬았던 다리를 풀어 반대쪽으로 꼬았죠. 그러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훌륭한 인질을 얻는 것만이 목적이 아닐 수도 있어요.”
“무슨 말이지?”
“펫시.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은 사람은, 혹 천재적인 문재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라고 불리지는 않아요. 그 남자는 예언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예언자라고, 그것도 탁월한 예언자라고 불리는 거지요?”
“응?”
“그건 그의 증조부와 외조모가 똑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지요. 두 사람은 수십 년 전에 그 남자가 태어날 날짜와 성별을 예언하고 그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예언자가 될 거라고 했지요. 뛰어난 예언자였던 그 두 사람이. 그리고 두 사람이 예언한 바로 그 날짜에 그 남자가 태어났죠. 그래서 그는 천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예언자예요.”
“그래서?”
새하얀 나방 한 마리가 이루릴에게 날아왔습니다. 이루릴은 나방을 물끄러미 보다가 머리를 뒤로 약간 젖히며 눈을 감았습니다. 나방은 주저하다가 이루릴의 콧날에 살짝 내려앉았지요. 이루릴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도 나방은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증조부도, 외조모도, 그 이도 예언자죠. 어쩌면 왕비는 그의 혈통에 예언의 힘이 있다고 가정한 것 아닐까요?”
“뭐라고? 예언의…………”
“혈통이오.”
“그렇다면 왕비는.
“왕비는 자기 말을 잘 듣는 예언자를 원했겠지요. 그런데 그건 자식을 위해 예언하는 예언자일 수도 있지만, 어머니를 위해 예언하는 예언자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서 아일페사스는 거대한 탄식음을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