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37화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지. 나는 당신이라는 자연을 모방해 보았소. 나 자신을 캔버스 삼아. 그 모방이 잘 이루어졌다면 왕자는 미래를 볼 수 있을 거요.”
왕비는 품속의 아기를 내려다보며 속삭였습니다. 예언자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요. 하지만 두 팔이 수갑으로 고정되어 있어 그럴 수 없었습니다. 궁성 임펠리아의 길고 화려한 복도에서 예언자는 왕비와 독대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상당수 건축가들에게 복도는 방과 방을 이어주는 설비겠지만 특수한 지위에 있는 이들에겐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들은 언제나 복도에서 내려졌다고 말하면 물론 과장 일 테지만, 복도에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 미묘한 회담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죠. 왕비와 예언자의 회담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비는 복도에 놓인 벤치예. 궁성의 실내 장식가는 복도의 중요성을 아는 인물임이 분명했습니다.—에 앉아 왕자를 무릎에 내려놓고 있었고 예언 자는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왕비의 시녀들과 예언자를 호송하던 병사들은 복도의 양쪽 끝에서 바깥을 향해 선 채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죠. 예 언자는 충혈된 눈으로 복도 양쪽을 돌아본 다음 힘겹게 속삭였어요.
“그럴 리도 없거니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신과 그 아이는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왕이 의심할 테니까요.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왕에게 자신의 의 심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나와 당신의 악연을 알고 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계보를 의심하려면 먼저 예언의 혈통과 왕비의 외도라는 정말 있음직하지 않은 두 가지 전제를 수용해야 할 거요. 걱정할 필요 없소. 성공한 모험가들의 비결이 무엇일 것 같소? 우리는 자연법칙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고정 관념에 도전했소.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지. 당신만 해도 내가 화가로 변해 당신 앞에 나타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잖소.”
예언자는 수치심과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저를 왜 부르신 겁니까? 원하시던 것을 손에 넣으셨잖습니까. 저를 모욕하고 절망시키는 재미까지 원하신 겁니까? 차라리 알려주지 않으셨다 면…………, 제 핏줄이니까 알아야 하지만…………, 그래도 전하께 동정심이 있다면 침묵하셨어야…………”
“모욕? 그런 쓸데없는 것에 정력을 낭비하는 취미는 없소.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기에 부른 것이지. 우선 왕자가 자라서 예언자가 될 수 있을지 알려주시오. 나는 그러기를 바라지만, 내 기대와 달리 왕자에게 예언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왕자를 대신하여 왕을 도와야 하오. 아들을 대신하는 것이니 아버지의 기쁨이고 보람이지 않겠소?”
예언자는 철로 만든 관에 갇힌 채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왕비는 예언자의 표정이 마음에 든 듯 흡족해했습니다.
“두 번째 요구는 이것이오. 당신은 이루릴 세레니얼을 만났을 거요. 오래 전 당신을 탈옥시켜 솔베스로 도망치게 해준 엘프지. 당신도 이제 알고 있 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대단히 특별한 존재요. 몇몇 드래곤보다 연상인 그 엘프는 긴 세월 속에서 온갖 관계를 맺고 온갖 놀라운 일들을 해왔지. 보통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도 없는 비밀스러운 권세와 협조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했소. 그런 그녀가 당신을 주목했지. 나 는 그녀가 전쟁을 막고 싶어한다고 추리했소.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소. 만약 그렇다면 당신을 탈출시켰다가 한참 후에 감금한 것이 설명되지 않으 니까. 조만간 뭔가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겠지?”
“그래서…………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저를 부르신 것이군요.”
“그렇소. 나는 왕에게 그 이루릴이 감추고 싶어하는 미래가 무엇인지 알려드리고 싶소. 당신이 지난 일 년 동안 어디에, 왜 갇혀 있었는지 말하시 오.”
예언자는 수갑을 휘둘러 왕비의 머리를 부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왕비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기도 했지요.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자존심을 돌보기엔 너무 늦은 것 같지 않소?”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 큰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비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죠. 그녀는 왼손으로 왕자의 배내옷을 헤쳤습니다. 아기의 토실토실하고 부드러운 목과 상체가 드러났죠. 예언자가 호 흡을 멈춘 채 바라보는 가운데 왕비는 왕자의 목을 빈틈없이 붙잡았습니다. 조르지는 않았지만, 그 손아귀는 교수형 올가미도 거미줄로 보일 만큼 단 단하게 굳어있었죠.
기저귀를 적신 것인지, 아니면 어떤 불안을 느낀 것인지 아기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