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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39화


나방이 창밖으로 날아간 후 예언자는 잡동사니를 뒤져 찾아낸 천쪼가리로 이마를 감쌌습니다. 수갑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죠. 처치를 끝낸 예언자 는 바닥에 누웠습니다.

‘설득하라고?’ 예언자는 이루릴이 권유하는 일과 장님에게 시각을 설명하는 일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흔한 비유지만 적절한 비유이기도 했죠. 장님에게 보아선 안 된다, 볼 필요 없다 등으로 말하면 화를 내겠지요.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 예언자에게 화를 내듯. 생각할수 록 예언자는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확신만을 느꼈어요.

칭찬과 설득의 공통점이 뭔지 아시죠? 예. 원래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것이지만 자기에게 하는 것이 더 쉽죠.

‘당신들은 미래가 무엇인지 몰라. 죽어도 알 수 없어. 그걸 아는 건 나뿐이지. 그런데 단 한 사람만이 아는 것이 진실일까?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닐까?”

한시간 후 왕비는 갑작스러운 면담 신청에 짜증을 내며 일어나야 했습니다.

입이 무겁다 못해 배꼽까지 늘어질 지경인 시녀가 전달한 쪽지에는 지금 당장 만나야겠다는 예언자의 전언이 씌어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좀 편집증 적인 협박문도 달아놨습니다. 편지 말미엔 자신이 왕비의 알몸을 본 사람만이 아는 비밀을 안다는 암시가 덧붙여져 있었지요.

왕비는 피식 웃었습니다. 바보가 아니었기에 왕비는 자신이 한 일의 위험도 알고 있었고 예언자에 대한 공모자 의식도 가지고 있었어요. 예언자에겐 언제까지나 수탈자인 척할 테지만, 어쨌든 왕비는 예언자가 부르면 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곳으로 부를 수야 없었지요. 왕비의 침소에 외인이, 그것도 한밤중에 들어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이번에는 복도 또한 적합하 지 않았습니다. 밤의 궁성 복도엔 낮에 쓰였던 것들과 내일 낮에 쓰일 물건들을 가지고 바쁘게 오가는 사용인들이 넘쳐나거든요. 왕비가 선택한 곳은 소도서관이었습니다. 예. 흔히 그렇듯이 책장 하나를 당기면 비밀 통로가 나타나는 그런 도서관이었습니다.

왕비는 느긋하게 도착할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소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예언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여유 있게 보이려면 책이라도 한 권 붙 잡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곤 가까운 곳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것은 고전 추리 소설이었습니다. 궁성에는 보다 딱딱한 책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엄숙주의자들도 책의 저자가 신관임을 알면 한 마디 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겠지요. 예. 저자는 테페리의 어느 프리스트였습니다. 성애 문학이나 심지어 신성모독 문학을 쓴 사제도 있는 파란만장한 테페리의 종 단 역사를 떠올리면 그건 파격도 아니었습니다. 종단 본부에서도 그런 사제들에게 ‘지독한 비평’이상의 견책처분은 내린 적이 없지요. 어쩌면 작가 에겐 최악의 처벌인지도 모르지만.

소도구 삼아 펴든 책이지만 그 서두가 제법 흥미로웠기에 왕비는 독서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책에 빠져든 모습이 더 여유 있게 보일지도 모르죠. 왕비가 보기에 침버라는 이름의 저자는 작가의 근육이라 할 수 있는 문장에선 그저그런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피인 경험은 꽤 있어 보였지 요. 왕비는 작가의 뼈는 어떨지 궁금해하며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침버가 선택한 탐정은 특이하게도 초를 만드는 소년이었습니다. 잔혹하다기보다 연민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묘사된 살인 사건이 벌어지자 소년은 상 당히 좌충우돌하는 방식으로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침버는 서술하지 않았지만 왕비는 범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소년이 상당히 성가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소년이 특별한 영민함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란을 만드는 그 자체가 정황상 범인을 귀찮게 하는 것이었죠. 따라서 왕비 는 탐정에 대한 살해 시도가 묘사되기 시작했을 때 완전히 수긍하며 몰입했습니다. 소년이 어떻게 당하게 될지 궁금해하던 왕비는 헛기침 소리를 들 었어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예언자가 병사 두 명에게 부축된 채 왕비 앞에 서 있었습니다. 치료를 받느라, 또 수갑 외에 묵직한 족쇄까지 차느라 늦게 도착 한 것이었지요. 왕비가 손짓을 보내자 병사들은 족쇄를 찬 예언자를 바닥에 앉힌 후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습니다. 왕비는 책상에서 서 표를 집어 책에 끼워놓은 후 예언자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예언자는 왕비를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은 책을 향했죠. 왕비가 의아하여 쳐다보았을 때 예언자가 책을 보며 말했습니다.

“범인은 영주의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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