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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45화


“그 망할 자식이 내 뒤통수를 쳤어.”

드래곤 레이디 아일페사스가 더 이상 분노도 느끼기 어렵다는 듯이 중얼거렸습니다. 사실 분노보다 경악이 더 컸지요.

모든 드래곤의 조언자이자 후원자로서 그녀가 그때껏 집중한 것은 새로운 드래곤의 탄생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래곤의 탄생은 대단히 희귀한 사건이지요. 드래곤들은 서로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짝짓기도 잘 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 경계심은 짝짓기의 결실에도 해당하지요. 새로운 드래곤 은 새로운 경쟁자다, 이 말이에요. 어차피 드래곤은 엄청난 세월을 살아가기 때문에 후손을 만드는 일에 그리 열의를 느끼지도 않지요.

시에프리너의 회태는 그 모든 난관을 돌파한 끝에 가까스로 일어난,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어요. 그나마도 시에프리너의 혈통에 얽힌 비극적 역 사가 없었다면 일어나기 힘들었을 겁니다. 시에프리너의 아버지 지골레이드는 한 때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거든요. 그래서 지골레이드는 후손에 일 종의 강박관념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어요. 시에프리너는 그런 아버지의 성격을 이어받았지요. 어쨌든 그토록 어렵게 일어난 일이기에 카르 엔 드 래고니안의 주인이자 모든 드래곤의 후원자를 자칭하는 아일페사스로서는 반드시 시에프리너를 보호해야 했지요.

드래곤 레이디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의 아버지 드래곤 로드를 떠올렸어요. 드래곤 로드의 전성기였다면 일처리는 훨씬 쉬웠을 거예요. ‘아무도 시 에프리너를 건드리지 마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됐을 테니까요. 하지만 고대의 영웅 루트에리노가 그 드래곤 로드를 패퇴시키고서 바이서스를 건국한 이래 드래곤은 인간의 주인에서 인간과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이웃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물론 여전히 공포와 절망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극복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드래곤 레이디는 보다 조심스러운 방법을 써야 했어요. 비밀주의 말이에요. 그녀와 시에프리너는 새 로운 드래곤이 태어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자고 결정했지요. 그러니 두 드래곤은 예언자의 존재에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그 예언자가 시에프리너의 회태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 드래곤이 바이서스의 종지부임을 선언해 버린 겁니다. 기 가 막힌다는 말도 모자랄 상황이었지요. 아일페사스는 험악하게 말했어요.

“드래곤을 거역하며 일어선 나라가 드래곤에게 멸망당하는 것도 어울리는 일이긴 하겠지. 그래. 잘된 일이군. 그 녀석이 바이서스를 파괴한다는 말 은, 바꿔 말하면 그 녀석이 안전하게 태어나서 충분히 성장한다는 말이잖아. 이거 희소식인걸. 시에프리너에게 말해줘야겠어. 이봐. 그 표정 좀 순화 된 판본으로 대체해주지 않겠어?”

“한 나라가 사라지는 것을 희소식이라 말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일페사스는 긴 세월 동안 여러 번 아쉬워했던 사실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비록 그녀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며 심지어 다른 드래곤들보다 더 신뢰하 는 상대지만, 이루릴 세레니얼은 드래곤이 아니었죠.

“나는 당신이 최악의 경우 바이서스를 편들어 드래곤에게 대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당신과 싸우겠지만 그것 은 우정의 포기가 아니라…………”

“그만해요. 펫시. 나는 아직 예언하지 않은 예언자를 살해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마찬가지로 바이서스를 파멸시키기는커녕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드래곤은 내 행동이나 경계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런 상황을 가정한 약속도 별로 듣고 싶지 않아요.”

아일페사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부드럽게 말했어요.

“당신의 태도는 온당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에서는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닐지도 모르잖아.”

이루릴은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피에 흠뻑 젖어 목이 꺾인 들꽃, 불꽃에 그슬려 땅에서 파닥거리는 나비들, 시체에서 시체로 종종걸음치는 까마귀들, 연기로 뒤덮인 검붉은 하 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어. 전쟁은 이제 기정사실에 가까워. 오래 전 7주 전쟁을 1차로 본다면 제2차 드래곤인간 전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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