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46화
왕비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습니다.
“왕의 나라를 파멸시킬 드래곤이 태어난다고? 막을 수 없는 거야?”
예언자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채찍이란 묘한 무기죠. 어지간해선 뼈나 장기를 상하게 하지는 않기 때문에 인도적인 무기랄 수 있지만 그걸 맞아본 사람 중엔 그 말에 동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예요. 예언자의 경우 채찍질 세 번만에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게 되었지요. 하지만 왕비가 예 언자 옆의 바닥을 세차게 후려치자 기적처럼 예언자의 입이 열렸습니다.
“때리지 마요! 때리지 마세요.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제발………… 막을 수 없습니다. 왜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하라고 하십니까? 그런 방법이 있다면 바이서스는 멸망하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저는 바이서스가 멸망한다고 예언할 리가 없습니다. 모순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이미 말했지만 왕비는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죠. 예언자가 지적한 패러독스 정도는 이미 무의식 중에 깨닫고 있었지요. 그녀가 그 정도로 전락한 것 은 역시 예언 내용의 심각성 때문일 겁니다. 왕비는 그 예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그 알을 깨버린다면! 시에프리너를 죽인다면! 시에프리너가 두려워한 것도 그것이잖아. 임신으로 무력해진 상태에서 꼼짝없이 당할까봐 무서워서 널 감금한 거잖아. 그 두려움을 사실로 만들어준다면! 그런 시도는 모두 실패하게 되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몰라요. 하지만 그런 시도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것 같아요. 전쟁이, 드래곤 대 인간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숨이 막힌 왕비는 컥 하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어요. 예언자가 고통에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시에프리너의 뒤에는 드래곤 레이디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시에프리너를 공격한다면 시에프리너는 드래곤 레이디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예요. 무 슨 대가든 지불하고서 그럴 겁니다. 드래곤 레이디는 그에 응할 테고요. 그녀는 모든 드래곤의 후원자입니다.”
“그래서? 아일페사스가 모든 드래곤을 대 바이서스 전쟁에 소환한다는 건가? 아일페사스는 그 아버지가 아니야! 드래곤 로드마저도 그 옛날의 7주 전쟁 이후론 그러지 못했어!”
“드래곤 라자가 있었으니까요.”
“뭐?”
“모르십니까? 드래곤과 바이서스를, 드래곤과 인간을 잇던 끈 말입니다. 7주 전쟁 후 바이서스에는 그런 인물들이 있었어요. 그 옛날 지골레이드나 캇셀프라임, 크라드메서 같은 드래곤들은 드래곤 라자와 함께..
“나도 알아! 오래 전에 사라진 그 전설적인 인물들에 대해선!”
“예. 오래 전에 사라졌어요. 드래곤의 기준으로 봐도 오래된 사건입니다. 드래곤과 인간의 관계는………… 다시 7주 전쟁 이전으로 돌아간 거란 말입니 다. 이런 상황에서 왜 아일페사스가 드래곤들을 소환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임산부를 위협하는 해충을 퇴치하자는 요청 정도는 왕의 권위가 아 닌 후원자의 권위로도 가능합니다.”
왕비가 얼빠진 목소리로 반복했습니다.
“해충? 해충이라고?”
“드래곤 라자는 사라졌어요. 교류는 끊어졌어요. 세월이 흐르고 흐른 지금 우리는 드래곤을 맹수로 보죠. 그렇다면 드래곤이 우리를 해충으로 여기 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시에프리너의 태도 자체가 우리에 대한 드래곤의 시각을 드러낸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기회만 오면, 가능성만 있으면 자신이나 아이를 해칠 유해한 동물로 여기지 않았다면 왜…………”
채찍이 바닥을 후려쳤습니다. 예언자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침묵했어요. 그 몸이 푸들푸들 떨렸죠. 왕비는 경멸감과 동정심이 뒤섞인 괴상한 감정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언자의 지적은 날카로웠습니다. 서로 대립하거나 협조할 일이 별로 없었기에 관계 정립이 되지 않았을 뿐 오래 전부터 드래곤과 인간은 데면데면 하다는 말도 쓰기 어려운 관계였지요. 그런 상태에서 인간이 그들 중 한 여성을 공격한다면 드래곤들은 인간을 말살해야 하는 적으로 규정하는 것에 아무런 심적 저항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드래곤 라자는 오래 전에 사라졌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