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그림자 자국 – 49화


이루릴은 고글을 밀어올리고는 안장 위에 섰습니다. 그 옛날 말 위에서도 그런 재주를 부리던 그녀였지만 이젠 수준이 더 높아졌다고 하겠지요. 바 이크의 안장은 말의 등보다 훨씬 좁으니까요. 하지만 달리는 바이크 위에서 그런 위험한 자세를 취한 이루릴은 땅 위에 서 있듯 평온했습니다. 엘프 의 눈으로 먼 곳을 살펴본 이루릴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다시 정상적인 라이딩 자세로 돌아왔습니다. 사이드카에 앉아 있던 오크가 투덜거렸죠. “꼭 그러고 싶으면 그냥 멈춘 다음 올라가면 안 됩니까? 혼자 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바이크는 말과 다르단 말입니다.”

젊은 오크의 말투에는 불만과 함께 늙은 종족에 대한 경멸도 약간 묻어 있었습니다. 그 오크는 이루릴이 말채찍으로 바이크를 때리지 않는다는 사실 엔 아직도 충격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루릴은 자신이 이파실졸란 랠리에 네 번 참가했고 세 번 완주했다는 것을 알려주면 오크가 안심할까 생각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포기했어요. 허풍으로 받아들여질 것이 뻔했으니까요.

“비행기에 대한 소문이 있죠. 원동기가 이렇게 이륜차에 달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된 것도 오래되었는데, 역시 비행기는 완성된 것 아닐까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오크 기술자의 눈에 놀라움과 함께 약간의 존경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많죠. 예. 당신이 말한 것처럼 기술적인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어요. 사람들은 뭐 놀라운 신기술을 생각하지만 사실 비행 자체의 기 술적 원리는 어려울 것이 없죠. 그보다는 전통적인 야금학의 지독하게 오래된 모순이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뿐이죠. 더 가벼우면서 더 단단한 금속, 그게 핵심이지요. 그런데 이젠 신뢰할 만한 합금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번 전쟁 때 비행기가 공개될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기술자 도 있었죠. 나타나진 않았지만, 아마 전황상 비행기가 필요 없어서 그랬을 거예요. 나는 그게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로서 말해줘요. 비행기가 드래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까요?”

오크의 존경심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드래곤이오? 어림없어요. 엔진의 힘만으로 하늘을 날려면 그건 가벼워야 합니다. 강도도 약할 테고 무기도 별로 실을 수 없을 거예요. 실물을 보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부활한 고대 마법으로 움직이는 비행기가 아니라면야 드래곤은 파리 잡듯이 그걸 떨어트릴 수 있을 거예요.”

이루릴은 그 정보를 마음에 새겨두었습니다. 고대의 마법이 사라진 지금 당분간 인간은 하늘에서 드래곤과 상대하는 것을 포기해야겠지요.

하지만 지상에서 인간이 다루고 있는 힘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대포에 직격당한다면 드래곤이라도 무사하긴 어려울 테지 요. 물론 드래곤들은 매보다 빠르게 하늘을 날고 애초에 그들의 것이었던 마법 또한 아직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기에 포탄이 그들에게 진정한 위협은 되지 않겠지만, 전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진 알 수가 없지요. 인간에겐 분명히 날카로운 가시 하나가 있는 셈이죠.

그렇다면 반대로 드래곤은 인간에게 얼마나 위협이 될까요? 이루릴은 상상 자체가 인간에 대한 폭력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법을 잃 은 인간들은 마법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잊어버렸지요. 하지만 이루릴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뜨거운 화염도, 무서운 힘과 자유자재로 하늘을 나는 비행 능력도 필요 없어요. 지휘관들의 정신을 뒤틀어버리는 주문 한 마디면 드래곤은 인간들끼리 싸우다가 전멸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더 잔인 하게 굴고 싶다면 그렇게 죽은 군대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 바이서스로 돌려보낼 수도 있겠지요. 죽은 가족과 친구들이 돌아와 자신을 공격하면 바이 서스 인들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시라면 드래곤에겐.. 드래곤이 있었죠. 예, 드래곤으로 다른 것을 비유 할 수는 있지만 드래곤을 다른 것으로 비유하긴 어렵습니다. 드래곤이란 그런 압도적인 존재입니다.

‘대결은 안 돼.’ 이루릴은 생각했습니다. ‘드래곤과 인간이 정면 대결해선 절대로 안 돼. 드래곤 라자가 사라진 후에도 인간과 드래곤이 공존할 수 있 었던 건 드래곤들이 자기 영토 바깥엔 관심이 없어서일 뿐이야. 하늘을 마음대로 나는 자유로운 생물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드래곤은 자기 영토에 얽 매인 존재야. 프로타이스 같은 경우가 특별한 예외지. 전근대적인 장원의 영주. 그래. 드래곤에겐 그런 면도 있지. 그런 드래곤들이 자신의 영토를 넘 어선 가치를 위해 연대할 수 있는 빌미를 줘선 안 돼. 시에프리너에 대한 공격은 바로 그런 짓이야. 바이서스는 자신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를 파멸로 끌고 갈 거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하지만 시간에서조차 풋내가 났던 것 같은 옛날, 사람들은 경이적인 힘을 휘두르며 드래곤과 대결하기도 했고 가장 강대한 드래곤을 거꾸러뜨리기 도 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힘들은 현대까지 남아 있기도 했고 이루릴은 그 중 몇 가지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위기의 접근을 느끼며 이루 릴은 그것들을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그 또한 대결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그런 것들 중 어떤 것이 인간의 손에 들어간다면 인간은 당장 대결의 불꽃 을 튕겨 올릴지도 모르니까요. 다행히 주의 깊게 보관된 그 고대의 힘들은 모두 안전했습니다. 점검을 끝낸 이루릴은 그녀가 가장 큰 책임감을 가지 고 있는 마지막 물건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고대의 힘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곳에서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조차 위험하기에 이루릴은 마법으로 휙 날아가는 대신 현대의 철마를 이용해야 했지요.

잠시 후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