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그림자 자국 – 52화


인류는 코를 킁킁거렸어요.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났거든요.

어쨌든 매일 아침 밥을 먹으면서 ‘인류가 공존 번영해야 할 텐데.’ 같은 생각을 하는 이는 별로 없지요. 오늘 사업상 만나야 하는 빌어먹을 녀석에 대 한 생각이나 하게 마련이죠. 아니면 오늘 미장원이 붐빌까, 머리가 말도 아냐. 같은 생각일 수도 있겠네요. 예. 사람들은 바이서스에 대해 자기 돈 나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동정과 우려를 표했고 그걸로 만족했죠. 남들보다 머리 더 쓰라고 세금으로 월급 받는 자들도 바이서스 유민에 대해 조금 고 민하는 정도였죠. 모든 이들은 바이서스 앞에 ‘고’자를 붙이는 일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죠. 드래곤과 싸우겠다니, 미쳤나 봐요. 뭐, 바이서스가 드 래곤 때문에 끝장난다는 예언이 있다니 별 도리는 없겠군요. 천 년 동안 세계를 제패한다는 손녀요? 그건 좀 신경 쓰이지만, 드래곤의 손녀라면 한참 후의 일이잖아요………… 그 정도로 입장을 정리한 이들은 잔혹한 호기심을 만족시킬 채비를 갖췄죠. 인간 대 드래곤 전쟁이라니, 정말 센세이셔널하지 않습니까. 용감한, 혹은 돈에 눈이 먼 기자들이 바이서스와 솔베스로 쇄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자들은 ‘바이서스 임펠의 현장 분위기’, ‘바이서스의 최신형 기관총에 대해’, ‘사람들이 떠난 솔베스의 쓸쓸한 정취’ 같은 기사들밖에 생 산할 수 없었어요. 정말 중요한 기사거리가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드래곤들이죠.

젊은 드래곤들이 시에프리너를 위해 솔베스로 움직이긴 했습니다. 사진기자들은 평생 자랑할 만한 근사한 사진도 몇 장 찍었죠. 드래곤은 정말 기가 막힌 피사체니까요. 하지만 그 이름을 죽 늘어놓으면 고전문학 선집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나이 많은 드래곤들, 강력한 드래곤들이 보이지 않았어요.

설명 못할 일은 아니지요. 그 강대한 드래곤들은 바이서스가 너무도 가소로워서 움직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춤추는 성좌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 외한다면 사실 드래곤들은 보물이 쌓여 있는 자신의 레어를 떠나는 것을 내켜하지 않습니다. 젊은 드래곤들이야 아직 보물도 적고 영토에 대한 애착 도 그리 크지 않아서 쉽게 행동에 나설 수 있겠지만 늙은 드래곤은 그러기 어렵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갑자기 전세계에 출몰하기 시작한 이상한 괴수들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건 정말 이상했습니다.

새의 다리 같은 두 발 위에 눈만 달려 있어서 쳐다보는 것 이상의 해는 끼칠 수 없는 괴이한 것들이 골목을 깡총깡총 달리고 창문 안쪽을 기웃거렸습 니다. 어처구니없는 것들이었죠. 눈만 있고 입이 없다 보니 먹을 수가 없어서 걸핏하면 픽픽 쓰러졌거든요. 물론 생식기도 없다 보니 종족 번식도 못 했죠. 생물이 그 정도로 엉망일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엔 많이 놀라고 무서워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아이들은 새로운 장난감에 열광했고 어른들은 그 것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지요. ‘누가 급조한 거야.’ 예. 그게 타당한 해석이었지요.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급하게 만들어낸 것들이 분명했어요.

그 누군가는 얼마 후 솜씨가 좀 나아졌나 봐요. 잠자리 날개 같은 것이 달린 눈들이 나타났죠. 역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이상의 해는 끼칠 수 없었 죠. 아이들은 새총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눈 떨어뜨리기는 전세계적인 놀이가 되었죠. 한편 낚시꾼들은 물속에서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눈들에 짜증 을 냈죠. 입이 없어서 낚시를 물지도 않는 것들이―걸린다 해도 당혹스러운 일이지요. 그걸 어떻게 먹겠어요. 눈에 지느러미만 달려 있는 것을.—다 른 물고기를 다 쫓아버렸거든요. 눈알들이 여러 개 몰려서 헤엄치면 주위의 물고기들은 기겁하게 되나 봐요. 하긴 물 속에서 수십 개의 눈이 자기를 물끄러미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람도 기분이 더러워질 만하죠.

‘드래곤이야.’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드래곤들이 마법을 써서 다급하게 세상을 조사하고 있는 거죠. 나타나지는 않은 채 눈만 내민다? 그런 것을 가 리키는 비유나 속담은 많지요. 비유가 많은 것은 직접적으로 말할 경우 무례가 되기 때문에, 한 대 맞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죠.

‘드래곤들이 겁을 먹고 있다? 그것도 그 사실을 들켜도 상관없을 정도로 겁을 먹고 있다?’

사람들은 새로운 눈으로 바이서스를 보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위를 걱정해야 했던 바이서스의 왕이 정말로 생애 최후의 승부에 성공한 걸 까요? 그 믿기 힘든 가설이 사실일 경우의 전망은 사람들을 아찔하게 만들었습니다. 시에프리너의 영토를 두고 전쟁이 벌어졌던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것도 그 땅을 한시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전쟁이었죠. 만일 드래곤들에게 앞을 막지 말고 비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새로운 길이 열 리는 겁니다. 새로운 항로가 열리는 겁니다. 하늘이 인간의 손에 들어오는 겁니다.

사람들의 흥분은 솔베스를 찾았던 젊은 드래곤들 중 일부가 어느새 자기 영토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을 때 극에 달했습니다. 국가란 좀 뻔뻔 해도 된다고 믿는 이들이 많죠. 많은 국가들이 위대한 전쟁에 동참하겠다면서 바이서스에 원군 파병을 제안했지요. 드래곤에 대한 오래된 공포 때문 에 아직 그 정도까지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라들도 바이서스로 질문을 무차별 난사했습니다. 당신들 도대체 뭘 가지고 있는 겁니까? 무언가 끝내 주는 것이 있어서 드래곤과 싸우겠다고 한 것이었군요? 그게 뭐죠?

그 모든 관심과 응원, 질문 속에서 바이서스는 돌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들도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궁금했거든요. 다른 나라들은 절대 믿지 못 했지만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바이서스의 수뇌부는 아침에 눈 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어요.

도대체 우리가 뭘 가지고 있는 거지?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