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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53화


왕비는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위태로웠던 바이서스의 민심이 놀랄 정도로 호전했거든요.

드래곤들은 확실히 무서워하고 있었어요. 드래곤을 상대로 한 첩보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느라 머리가 셀 지경인 바이서스의 정보 전문가들 도 모두 그 결론에 동의했죠. 그것은 사실 바꾸어 말하면 드래곤들이 바이서스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죠. 상대가 될 만한 적수에겐 함부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법이잖아요. 거리낌 없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바이서스가 드래곤의 안중에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바이서스 아닌 무엇을, 드래곤들은 확실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드래곤 레이디조차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서 침묵하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이라면 왕비 아닌 누구라도 오만해질 만하죠.

발탄은 바이서스가 솔베스에서 전투 행위를 벌이는 것을 완전히 묵인하기로 결정했어요. 시에프리너의 아들이 바이서스를 파괴한다면 그들은 전쟁 까지 벌였던 이웃의 강대국이 없어지는 것이니 나쁠 것은 없었죠. 그리고 바이서스가 정말로 드래곤이 무서워 할 만한 뭔가를 가지고 있어서 시에프 리너를 제거한다면, 그때는 솔베스의 임시 소유권이 아니라 영구 소유권을 두고 한 판 붙어주면 되는 거죠. 이미 한 번 이겼던 상대인데다 시에프리 너와 싸우느라 힘이 다 빠졌을 테니 승리하는 건 간단할 테죠. 발탄이 솔베스 사람들을 황급히 대피시키기 시작하자 모든 이들이 시에프리너바이 서스 전쟁이 곧 시작될 거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물론 시에프리너도 그랬지요.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쟁쟁한 드래곤들이 전혀 오지 않고 기껏 찾아왔던 젊은 드래곤들도 다시 도망쳐버린 절망 적인 상황이었지만, 시에프리너는 얌전히 당할 생각은 없었어요. 사람들이 떠난 솔베스에 괴수들과 코볼드들이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목 격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서스 육군은 걱정하지 않았어요. 코볼드들의 총기야 빈약하기로 유명하잖아요. 지하라는 곳은 시야가 형편없고 교전 거리 는 극단적으로 짧기 때문에 코볼드는 사람을 날려버리는 총 같은 건 쓰지 않아요. 따라서 지상전에서 코볼드들은 화력 열세일 수밖에 없죠. 무서운 걸로 따지면 양손에 대검과 수류탄을 들고 지하와 지상을 은밀히 오가는 코볼드들이 훨씬 무섭죠. 하지만 전쟁의 목표는 시에프리너의 사살이고 솔 베스의 점령이 아니기 때문에 유격전이 골칫거리가 될 일도 없었어요.

바이서스 육군이 정말 신경 쓰는 것은 따로 있었어요. 시에프리너의 마법이죠. 왕비는 이루릴에게 감사하며 그 엘프를 막기 위해 꺼냈던 고대의 유 물들을 역사학자들에게 보냈어요. 역사학자들은 마법에 대해선 알지 못했지만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그 물건들의 내력, 그리고 작용을 어느 정 도 파악했습니다. 왕비가 예상했던 것처럼 마법으로부터의 보호 작용을 하는 것들이 많았어요. 궁성에 둘 만한 물건들이란 보통 그런 방어적인 것들 아니겠어요. 공격적인 물건들은 전용이나 오용의 우려 때문에 왕 가까이에 둘 수 없죠. 내력이 파악된 그 마법 방어 도구들은 즉각 시에프리너 토벌 군에 인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전쟁 준비는 예언자에게 아무 감동도 주지 않았습니다.

“예언에 번복은 없습니다. 그는 바이서스를 파멸시킬 겁니다.”

왕비는 뭔가를 집어던질 듯한 눈으로 예언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겁에 질렸죠. 왕비의 품엔 젖을 먹고 있는 어린 왕자가 있었거든 요. 다행히 왕비는 품 안의 왕자를 던지진 않았습니다.

“드래곤들은 두려워하고 있소. 솔베스까지 찾아왔던 드래곤들마저 다시 도망치고 있소. 그곳에 있는 건 출산을 앞둔 무력한 드래곤 하나뿐이오. 도 대체 왜 왕께서 패한단 말이오?”

“드래곤들이 뭘 두려워하는데요?”

“말하시오! 예언자는 당신이잖소.”

“나라의 힘을 모두 끌어 모아 제 예언을 무시하려 애쓰시는 줄로 압니다만. 제 예언을 믿지 않으시면서 저에게 예언을 요구하시는 겁니까?”

왕비는 이 패러독스가 지겨웠습니다. 증오스러울 정도였죠. 두렵기도 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거요? 드래곤의 씨를 말려도 결국 왕의 나라는 파멸된다는 거요? 운명은 우리가 개척할 수 없단 말이오?”

예언자는 음울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죠. 운명 개척론을 믿는 사람이 나를 그렇게 고문하고 억압했느냐는 문장 정도로 번역이 가능할 거예요. 그리고 예언자는 바닥으로 몸을 날렸습니다.

왕비의 품에서 빠져나와 바닥으로 자유낙하하던 왕자는 제 때 움직인 예언자의 품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아기는 약간 놀란 것 외엔 아무 해도 입지 않았지요. 예언자는 쿵쾅거리는 심장 가까이로 왕자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가 죽일 듯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왕비는 싸늘하게 말했어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어떻게…………”

“미래를 본 거지? 내가 왕자를 놓칠 것을 예지한 것 아니오? 고맙소.”

왕비는 한 손을 홱 내밀었습니다. 예언자는 움찔하며 아기를 더 바짝 끌어안았지만 곧 비참한 얼굴로 아기를 내밀었지요. 왕비는 능숙한 동작으로 왕자를 다시 안았습니다. 어머니답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젖을 물리며 짓는 그녀의 짜증스러운 얼굴을 보면 그렇게 말하기도 힘들었어요.

“옛날처럼 유모가 있으면 좋을 텐데.”

왕비는 마치 거머리가 자신의 피를 빨고 있는 듯이 말했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들끓는 살의에 공포를 느낄 지경이었지요.

“드래곤들이 뭘 두려워하는 거요?”

예언자는 비참한 심정으로 말했어요.

“별자리가 알려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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