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55화
드래곤의 레어는 드래곤의 보물 창고이자 요새이기도 합니다. 레어 없이 떠돌아다니는 드래곤 프로타이스에겐 적을 저지할 강력한 수단 하나가 없 는 셈이지요.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프로타이스가 어떤 드래곤인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친절하고 누구와도 잘 지내냐고요? 존경합니 다. 그게 아니었어요. 프로타이스는 드래곤의 기준에서도 괴물이었습니다.
프로타이스는 반 시간만에 시에프리너 토벌군의 최선봉 여단 하나를 불멸의 존재로 격상시킴으로써 바이서스 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 게 어이없이 사라진 여단은 영원히 전사에 기록될 만하죠. 그 여단에도 고대 유물들이 많이 비치되어 있었지만 프로타이스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습 니다. 프로타이스는 자신에게 보호 마법을 걸고는 빗발처럼 날아오는 총탄과 포탄에 정면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짓밟고 물어뜯고 집어던지 는 등 완전히 비마법적인 수단만으로 여단을 초토화시켰어요. 전투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지휘 비슷한 것도 할 수 없었던 여단장은 그를 전령 으로 쓰겠다는 프로타이스의 결정 때문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날려버리기 전 여단장은 프로타이스의 전언을 토벌군 사 령부에 전했습니다. 그 전언은 사령부를 극심한 혼란에 빠트렸어요.
‘자주 씻어. 양말과 신발은 항상 건조하게 유지해. 그리고 그림자 지우개를 내놔.’
토벌군 사령부는 많은 이들이 의심했던 것처럼 역시 프로타이스는 오래 전에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한편 유명한 드래곤들이 도통 나타나 지 않아서 ‘충격적 의문, 시에프리너는 정말 드래곤일까?’ 같은 기사나 쓸 정도로 타락해 있던 기자들은 십년 치 생일 선물을 한 번에 받은 듯한 느낌 을 받았죠. 춤추는 성좌 프로타이스였어요. 그 유명한 드래곤이 시에프리너 토벌군 앞에 나타나 ‘일단 정지’라고 말한 거였지요. 기자들은 속옷도 제 대로 챙기지 못한 채 전선으로 달려갔죠.
하지만 곧 그들은 골치 아픈 문제에 봉착했어요. 어떻게 하면 프로타이스를 인터뷰할 수 있을까요? 인터뷰 요청을 하면 절대로 안 받아줄 테죠. 논리적으로 볼 땐 인터뷰 요청을 하지 않는 것이 인터뷰를 성공시킬 적절한 방법일 거예요. 프로타이스니까요. 하지만 인간이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드 래곤에게 어떻게 알리죠? 자승자박에 빠진 기자들은 군인들을 귀찮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서스 군인들은 전우들의 시체에 남은 프로타이스의 이빨 자국을 촬영하고 싶다고 말하는 기자들을 잡아먹고 싶은 심정이 되었고, 그 덕분에 프로타이스의 전언 중 일부를 이해하게 되었죠.
“맛있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거였어요. 좋은 고기를……”
예언자는 질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왕비는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죠.
“그림자 지우개가 뭐요?”
“시에프리너가 솔베스 개척지를 내버려둔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몰라요. 출산 후에 솔베스 사람들을 잡아먹으려고. 우리는 고기였군요. 고기들 이 덤비면………
정말 화가 나겠지요.”
“그림자 지우개가 뭐요?”
“전하. 충격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왜 내가 충격을 받아야 하오? 그럼 인간이 고기지 풀이오? 드래곤도 내겐 고기요! 그걸 몰랐소? 그리고 나는 그 노린내 나는 고기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온 세상에 눈을 풀어서 찾고 있는 것이 그림자 지우개라는 것을 눈치 챘소. 세 번째로 묻겠소. 그림자 지우개가 뭐요?”
예언자는 왕비를 직시했습니다. 한 때 살갗을 맞댔던 여자를 그런 식으로 볼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을 거예요. 지독한 증오나 혐오의 눈으로 볼 수 야 있을 테지만, 미련과 질투가 많은 남자는 예언자가 왕비를 보듯이 위화감 가득한 눈으로 사랑했던 여자를 볼 수는 없죠. 하지만 예언자는 그렇게 왕비를 보았습니다.
예언자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어조로 말했습니다.
“왕자와 하루만 같이 있게 해주십시오.”
왕비는 몸을 뒤로 약간 젖혔습니다. 예언자는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어요.
“지금껏 제…… 왕자를 십분 이상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왕자를 처음 안아본 것은 떨어지는 그 분을 붙잡았을 때였습니다. 하루만 같이 있게 해주 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그림자 지우개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을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왕비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다른 미소들은 근연 관계를 부정할 테지만.
“한 시간.”
“전하.”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아직 강보에 싸여 있는 아기를 하루 종일 타인에게 맡기는 짓은 속가에서도 하지 않는 짓이오. 하물며 그 아기는 바이서 스의 왕자요. 한 시간.”
“……그림자 지우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언자의 비통한 얼굴에 아주 살짝 승리감이 비쳤어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말씀드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림자 지우개에 대해서는 예언할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그럴 리가 없소! 드래곤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소. 있지도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고? 드래곤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다시 보시오, 똑똑히 보시오!”
“말씀하시는 뜻은 알겠습니다만 보이지 않는 걸 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왕비 전하께서 지금 속단하시는 것과 달리 그 사실이 중 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그림자 지우개라는 것이 실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언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요?”
“왕비님께 어쩌면 희소식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 예언된 미래를 바꾸는 기적이 가능하다면 그건 그 그림자 지우 개라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왕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