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56화
시에프리너는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자신의 영토를 혈혈단신으로 지켜주고 있는 용감한 프로타이스에게 찬사와 경애를 보냈을까요? 시에프리너는 그렇게 어리석진 않았습니다. 아는 이는 많지 않지만 시에프리너는 ‘왜 부르지도 않았는데 남의 땅에 와서 분탕질이야. 내가 몸만 가벼웠어도………… 라는 몰지각한 반응을 보였지요. 의도된 행위였겠지요. 프로타이스는 은혜도 모른다고 바락바락 화를 냈고, 그리고 계속 솔베스를 누비며 바이서스 육군을 도륙했습니다. 그건 정말 찬사와 경애를 받을 만한 장대한 분탕질이었어요. 급히 진지와 참호를 파야 했던 바이서스의 군인들은 그런 걸 보내 기 어려웠지만.
진지는 미약하나마 하늘을 제압한 가공할 적에 대한 방어 수단이 되었지요. 하지만 다른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프로타이스가 조심하라고 경 고했던 참호열이나 참호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시에프리너의 충성스러운 코볼드들이 양손에 대검과 수류탄을 들고 진지 속에 나타난 겁니다.
바이서스의 교리는 종심 타격에서 종심 방어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건 코볼드들에게 보내는 정중한 초대장이나 다름없죠. 쥐도새도 모르게 머리가 달아난 경계병의 시체나 바지 내리고 힘 주는데 폭발하는 화장실 같은 건 결코 즐거운 병영생활 요소라고 할 수 없었어요. 장교들은 후송이나 제대를 노리고 자해를 시도하는 병사들을 감시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었습니다. 시에프리너 토벌군은 와해 직전의 상태가 되었어 요.
하지만 토벌군은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습니다. 평소에 행한 부단한 훈련의 성과라는 논리는 장군들이나 좋아하는 거죠. 그들이 군대다운 모습을 그 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첫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토벌군이 프로타이스와 붙었다 하면 박살났다는 점에 있었어요.
공격 잘 하는 사병은 있을 수 있지만 후퇴 잘 하는 사병은 없지요. 후퇴는 가장 어려운 전쟁 기술이며 군대의 온갖 기준들 중 가장 확실하게 장교감 과 사병감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다른 드래곤들이 괴물이라 부르는 드래곤이 날아다니고 코볼드들이 사방에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솔베스에 서 병사들은 안전한 후퇴 가능성을 약간이나마 제공하는 장교들에게 신앙심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냈지요. 그 증거로 토벌군에서는 온갖 군대 범죄가 다 일어났지만 프래깅은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존경하는 상관에게 점화끈 당긴 수류탄을 증정하는 군대의 아름다운 전통 말이에요.
둘째 이유는 프로타이스가 프로타이스라는 점이었지요. 아일페사스는 언젠가 프로타이스를 둘로 나누면 드래곤과 반항이 된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타이스의 드래곤 부분은 보급로를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별로 하지 못했지요. 눈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마차 행렬이나 임시 철로 부설 현 장을 몇 번 급습하긴 했죠. 하지만 수송 병력의 화력이 전투 병력의 그것보다 부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프로타이스의 반항 부분이 눈을 떴죠. 그는 공격하고 싶은 열의를 잃었어요. 그 때문에 토벌군은, 비록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보급만은 그럭저럭 받게 되었습니다. 군대에 있어 원활 한 보급은 총이나 탄약, 그리고 일부 지휘관보다 더 중요한 요소지요.
그리고 토벌군이 유지되는 마지막 이유는 최고, 최악의 암살자인 희망이었어요. 불가능한 목표에 집착하게 만들고, 위험한 모험에 뛰어들게 만들고, 싫다고 분명히 말하는 이성에게 계속 추파를 보내게 만드는 그 희망 말이에요. 그 희망이 바이서스를 점찍었죠.
“프로타이스가 말한 그림자 지우개를 손에 넣어야 해! 그게 뭔지 모른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
무슨 희극 대사 같지만 정말 비장한 외침이었어요. 드래곤 레이디는 프로타이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요. 아일페사스에게 프로타이 스는 평소 워낙 적극적으로 무시하다 보니 정말로 깜박 잊곤 하는 존재였지요. 그 존재를 잊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고려해야 하는 요소로 떠올리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따라서 프로타이스의 등장은 시에프리너를 도울 방법을 애타게 찾던 아일페사스에겐 깜짝 선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일페사 스는 프로타이스를 ‘위험에 빠진 숙녀를 돕기 위해 나타난 편력 기사’로 칭송할 수도 있었어요. 그 반골 드래곤이 그림자 지우개를 언급하지만 않았 다면 말입니다. 아무리 다른 드래곤들이 입 밖에도 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걸 대뜸 말하다니, 아일페사스는 믿을 수가 없었죠. 아일페사스가 풀어놓은 ‘눈’들은 더욱 그악스러워졌어요.
바이서스의 궁성 후원에서, 예언자는 그 모든 사실을 천리안으로 내다보면서 모두 무시했습니다. 그를 비난하긴 어려울 거예요. 자기 아들을 태어난 후 처음으로 마음 편하게 볼 수 있게 된다면 누구라도 세상 돌아가는 일 같은 건 안중에도 없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