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57화
왕비는 선심을 쓰는 기분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특별한 시녀를 구한 다음 그녀에게 왕자를 태운 유모차를 맡겨 예언자에게 보냈어요. 병사들 도 함께 왔지만 그들은 왕자와 예언자가 둘만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지요. 그 때문에 병사들은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격수급의 명사수들이긴 하지만 왕자를 고려한다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함부로 총을 쏘긴 좀 그렇 죠.
예언자는 병사들을 더 긴장시키지 않기 위해 바닥에 앉기로 했습니다. 시녀는 그가 행동하는 것을 보다가 유모차에서 왕자를 들어올린 다음 역시 풀 밭에 앉았어요.
데밀레노스의 후원으로 불리는 그곳은 궁성에서도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바이서스의 긴 역사 동안 궁성 임펠리아도 수많은 개, 증축 을 겪었지만 그 후원에는 변화가 거의 가해지지 않았지요. 그곳을 밀어버리고 유리 식물원이나 테니스 코트 같은 보다 현대적인 시설을 만들고 싶어 했던 왕이나 왕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고대의 데밀레노스 공주처럼 그 후원 역시 외국의 영빈들이 방문하 고 싶어하는 명소였기 때문에 함부로 철거할 수 없었죠. 그리고 자칭 진보주의자인 왕들과 왕비들도 그 후원에서 오후 한 나절 정도를 보내다보면 언 제나 그 아름다움에 굴복하고 말았죠. 내키지 않았지만 예언자는 마음속으로 왕비에게 약간의 감사를 보냈어요. 한 시간 동안 데밀레노스의 후원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평생의 추억이 될 만한 특권이었습니다.
예언자는 시녀의 무릎에 누운 왕자를 보았어요.
시녀는 듣지 못해 그런지 권위에 대한 두려움도 그리 익히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꽤 허물없는 태도로 입술을 삐죽거리거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뗐다 하면서 왕자를 즐겁게 하고 있었지요. 그녀가 바바, 아아 같은 소리를 낼 때마다 왕자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예언자가 십 분 이상 왕자를 본 적이 없다고 한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사실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틈만 나면 천리안으로 왕자를 보았으니까요. 그래 서 그는 왕자의 희미한 눈썹과 통통한 볼, 경이적일 정도로 조그마한 코와 그 아래 투명한 입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요. 당연히 그가 왕비에게 요구 한 것은 시각적 접촉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리고 예언자는 지금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에게도 이 장면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장면이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오후 한참 무렵이었지만 아침에 처음 색을 얻었을 때처럼 산뜻한 빛으로 반짝이는 꽃잎. 누군가의 꿈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바람. 세계는 고요히 잠 든 아기 같았습니다. 그리고 시녀의 무릎에 누운 아기는 미소 짓는 세계였지요. 예언자는 졸음을 느꼈습니다. 그 표면에서 유유히 뱃놀이를 할 수 있 을 듯한 잔잔한 졸음이었지요.
“왕자님. 생물이 고기가 되는 방법을 아세요?”
시녀도 왕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는 잠꼬대처럼 말했습니다.
“죽으면 고기가 되죠.”
시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예언자는 놀라지 않았죠.
“내 말이 맞잖아. 왕지네.”
“죽으면 고기가 된다니. 그런 예언이라면 나도 하겠네.”
왕자를 내려다보던 왕지네가 고개도 들지 않고 속삭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