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62화 - 무료소설365

그림자 자국 – 62화

왕지네는 얼어붙었습니다.

창가의 의자에 반쯤 눕듯이 앉아 있는 여자가 바이서스의 왕비라는 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왕지네는 예언자를 탈출시킬 때 별장에서 왕비의 초상화도 봤고 베란다에 나타난 모습이나 무개차량을 타고 바이서스 임펠을 지나가는 왕비도 먼발치에서 보았죠. 왕비가 왜 그 녀를 불러들였을까요? 혹시 정체를 들킨 걸까요?

그때 왕비가 그녀를 돌아보았어요. 잠시 왕지네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손짓을 했어요. ‘이리 와.’

왕지네는 조금 안심했습니다. 왕비는 그녀를 귀머거리로 알고 있었어요. 왕지네는 유모차를 밀며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의자 옆에 선 왕지네는 바이서스의 왕비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보았어요.

묘하게도 혐오감이나 분노가 느껴지진 않았어요. 어떤 위명이나 악명의 주인공들도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후에는 신화적인 위치에서 현실적인 위치 로 추락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죠. 왕지네는 못 믿겠다는 느낌 속에 왕비를 보았습니다. 주위에 검푸른 기운이 떠다니지도 않았고 때때로 눈동자가 가 늘어질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눈앞에 있는 건 극히 정상적인 인간 여자였지요.

그때 왕비는 갑자기 괴상한 짓을 했습니다. 아니, 그리 괴상한 짓은 아니죠. 여러분들도 매일 하는 일이고 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긴장한 왕지네에겐 어이없는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왕비는 자신의 윗옷 단추를 풀었어요.

왕지네의 당혹감은 드러난 왕비의 가슴을 보았을 때 겨우 해소되었습니다. 왕지네는 자기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죠. 예. 왕비는 수유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젖먹일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왕자를 바로 자신에게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린 거였지요. 왕비는 왕자를 받기 좋도록 앉음 새를 고치고 상체를 세웠습니다. 그러곤 왼손을 흥미 없다는 듯이 내밀었습니다. 명령은 없었지만 귀머거리라도 이해할 모습이었기에 왕지네는 주저 없이 유모차에서 아기를 들어올려 왕비에게 건넸습니다.

아니, 건네려 했죠. 하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허리를 숙인 그녀의 관자놀이에 리볼버 총구가 와 닿았거든요.

왕지네는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입술을 축일 순 없었어요. 왕비는 총구를 그녀의 머리에 밀 착시킨 채 속삭였지요.

“왕자를 천천히 내 무릎에 내려놓으시오.”

왕지네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 말을 따랐습니다. 왼손으로 왕자를 붙잡은 왕비가 말했어요.

“저기 있는 의자를 가져와 내 앞에 앉으시오.”

왕지네는 그 말을 무시하고 도망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왕비의 총이 신경 쓰였죠. 그건 숙녀용의 조그마한 권총이 아니라 장교 들의 허리에 매달리는 제대로 된 리볼버였어요. 겉멋을 부리느라 그런 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자에게 겉멋이 필 요할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왕비가 총을 제대로 다루는 명사수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방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명사수를 상대로 술래 잡기를 한다는 건 위험천만한 짓이죠.

왕지네는 얌전히 왕비가 가리킨 의자를 가져와 왕비 앞에 마주앉았습니다. 그러고는 상의를 풀어헤쳐 가슴을 드러낸 채 한 손엔 아기를, 다른 손엔 대형 리볼버를 든 왕비를 마주보았습니다. 젖가슴의 감촉을 느낀 왕자가 꿈틀거리자 왕비는 왕지네에게 눈을 고정한 채 왕자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왕자가 젖꼭지를 찾아 물자 왕지네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습니다.

왕비가 말했어요.

“당신 그 남자와 무슨 관계요?”

왕지네는 지금까지처럼 침묵한 채 왕비를 쳐다보았어요. 왕비는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죠.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조금 전 내 말을 듣고 따랐잖소. 틀림없이 말도 할 수 있을 거라 보는데.”

“그 남자요?”

“계속 그러는군. 알면서. 일 년 전 솔베스였소. 그 남자가 지하에서 길을 잃었던 날 그를 위로하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찾아온 여자가 있었지. 그리 고 오늘, 듣는 데 아무 이상이 없으면서 귀머거리인 척하면서 여기에 나타나 그 남자와 한 시간을 보낸 여자가 있지. 나는 그 두 여자가 동일 인물이 라고 확신하오. 왜냐하면 내 눈으로 본 것이니까. 그러니 서툰 짓은 관두고 대답하시오. 당신 그 남자와 무슨 관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