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8화
왕지네는 뛰어난 싸움꾼이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싸움에 대한 왕지네의 견해를 묻는다면 아마 ‘승리는 도망칠 수 없는 자의 차선 목표’라고 대답할 겁니다. 살아오면서 만난 모든 충돌에서 왕지네는 그 가상의 금언을 충실히 지켜왔지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게 되는 날 이 오는 법이죠.
드러내어 말할 수는 없지만 바이서스의 왕비가 예언자를 쥐어짜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어요. 어떤 주정뱅이가 술자리에서 여왕의 단호함 을 칭송하고 수전노처럼 미래를 꼭꼭 숨겨둔 채 자기 잇속만 챙기다가 큰 코 다치게 된 예언자를 조롱한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죠. 그런데 그 주정뱅 이가 고함을 지르고 있던 탁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왕지네가 앉아 있었지요.
시작은 평범했습니다. 조용히 술 좀 마시자, 그쪽 아가리에 감침질 좀 해드릴까? 그리 듣기 싫으면 그쪽 귓구멍에나 박음질 좀 하시지. 계속 까불면 혀를 확 뽑아서 이마에 아플리케 넣어준다? 하, 이거 오래간만에 창자로 코바늘뜨기 한번 하게 생겼네. 뭐, 이런 식이었죠. 그 다음부터는 주먹과 다 리가 단어 노릇을 하고 술병과 의자가 문장 부호 노릇을 하는 서사시였어요.
왕지네는 혼자였지만 주정뱅이에겐 일행이 많았습니다. 왕지네는 거의 죽을 뻔했지요. 왕지네를 두드려 패던 자들과 흥분하여 고함을 지르던 구경 꾼들 모두가 동시에 동작을 멈추는 기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주점 입구에 나타난 기적은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에 가죽 재킷과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허리엔 고풍스러운 장검을 차고 있었고 그 귀는 맵 시 있게 긴 형태였습니다. 예. 패싸움이 일어난 주점을 예배 중인 신전 같은 분위기로 바꿔버린 기적은 엘프 여인이었습니다. 바이서스의 수도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종족이지요.
경외감과 두려움 때문에 멈춰 선 사람들 사이를 담담히 걸어간 엘프는 구석에 처박혀 있던 왕지네를 일으켰습니다. 왕지네가 혼란스러워하며 일어 나자 엘프는 품에서 조그마한 병을 꺼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병을 조금 높이 들어올렸죠. 사람들의 이목이 병에 집중되자 엘프 는 의미심장한 동작으로 병뚜껑을 열었다가 재빨리 닫았습니다. 그러고는 주점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늦기 전에 회향풀 씨를 먹는 것이 좋을 거예요.”
얼어붙은 듯한 시간이 잠시 흐른 후 필설로 형언하기도 힘든 난동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서로의 다리를 걷어차고 어깨를 떠밀며 주점을 빠져나갔지요. 주점이 텅 비자 엘프는 파랗게 질린 왕지네에게 돌아섰습니다.
“회, 회향풀, 회향풀 씨를 머, 먹지 않으며어어언!”
“여전히 입에서 술 냄새가 나겠죠. 괜찮아요?”
왕지네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먼저 미친 듯이 웃어야 했거든요. 왕지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엘프는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이루릴 세레니얼이라 합니다. 괜한 참견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