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89화
시에프리너는 한량키 어려운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또한 같은 크기의 기쁨도 느꼈어요. 지금껏 자신이었던 것이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아니게 되었거 든요. 고통의 파도 속에서 부침하며 그녀가 무의식 중에 뿜어내는 마법들이 시에프리너 주위에 온갖 기현상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광원을 알 수 없는 빛이 음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바닥에서 천장으로 가느다란 벼락이 치기도 했습니다. 벽면에 물결이 치고 돌멩이들이 그 위를 물수제비 치듯 튕겨 천장까지 올라가기도 했지요. 생물인지 아닌지 뚜렷하게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이리저리 거닐었고 그 주위엔 물질인지 아닌지 말하기 어려운 것 들도 배회했지요.
산란이 임박했습니다.
시에프리너가 느끼는 자기 분리의 감정은 흥미로운 진실을 품고 있습니다. 출산과 산란은 조금 다르죠. 출산하는 동물들의 새끼는 모체에서 분리되 자마자 이미 독립적인 개체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연결되어 있지만 애초에 둘이었던 것이 서로 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알은 조금 어 정쩡합니다. 산란의 순간 모체와 분리되긴 하지만 알이 깨지는 그 순간까지는 알을 독립적인 생물이라고 부르긴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가 둘이 되는 분리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요.
그리고 감각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완벽한 진실이었습니다. 시에프리너는 자신이 쪼개지는 듯한 격통을 느꼈어요.
드래곤이든 인간이든, 셋 빼기 둘이 뭔지 아는 모든 종족들의 여성들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지요. 이것이 창세 이래로 계속된 일이라는 것을 떠올리 는 것 말입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냈던 수많은 여성들 덕분에 마침내 태어날 수 있었음을 몸으로 깨달을 수 있지 요. 생명은 그렇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다시 이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애석하게도 영영 그런 느낌을 체험할 수 없지요. 남 자들이 제 잘난 줄 알고 허영심이 심한 건 그 때문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떤 남자가 지금 시에프리너 앞에서 참 부럽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드래곤 이든 인간이든 시에프리너가 내뿜는 벼락에 구워질 겁니다. 시에프리너는 이대로 죽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끝없이 느꼈습니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몇 번인가 했지요. 그러다가,
찢어졌습니다.
찌이이이잊어어어졌지요.
말 그대로 드래곤을 때려눕힐 만한 거대한 통증이 몸에 남아 있었지만 시에프리너는 급히 목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고통에 못 이긴 정신이 만들어낸 착각이 아니길, 정말로 끝이 났기를 애타게 바라며. 물론 정말 끝이 났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요. 그녀의 소망과 두려움은 적중했습니다. 산란은 끝났습니다. 그녀의 피와 체액에 젖은 커다란 알이 있었습니다.
시에프리너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겼습니다. 그 따스함과 축축함에 흠칫흠칫 놀라며. 드래곤의 알은 도마뱀이나 뱀의 그것처럼 말랑말랑하진 않습니다. 하늘을 날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드래곤의 알은 새의 그것처럼 딱딱한 편이지요. 그렇게 큰 알이 단단하지 않다면 그것도 문제겠지요. 내부의 압력과 무게 때문에 당장 내려앉아 찢어질 테니. 그 안에는 뼈대라 할 만한 것이 없거든요. 예.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아직 독립 된 생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시에프리너가 들으면 기겁할 일이지만, 만약 그것을 지금 당장 깨트린다면 그 안에선 흐느적거리는 여러 빛깔의 걸쭉한 액체 외엔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겠지요. 아직까진 생명이 이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다시 연결점을 만들었습니다. 딱딱한, 견고한 연결점이지요.
그렇지만 깨질 수도 있는 연결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