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9화
가이너 카쉬냅이 말하길 망막은 배반의 살갗이라지요. 피부의 존재 의미는 자신을 외부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격리지요. 그런데 망막은 외부를 자신 안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배반의 살갗이라는 겁니다. 해부학적으론 거의 무의미한 말이지만 금언이란 것이 원래 비유적 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저 말은 상대방을 더 알려하면 할수록 자신도 변화한다. 뭐 대강 그런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이서스의 왕비 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기에도 적절한 말이지요. 예언자에게서 향후 몇 년 동안의 기상 정보를 짜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왕비도 고문 기간이 길어지자 예언자가 예언을 거부하는 이유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답니다. 늦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단호한 왕비니까 양해해 줍시다.
“도대체 왜 미래를 보지 않겠다는 거요? 내가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당신은 개인의 숨기고픈 부분이 무차별하게 노출된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는 것 같더군. 고상한 태도라 하겠소. 하지만 나는 의사에게 몸을 보여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는 사람이오.”
예언자는 폭소했습니다. 고문으로 몸이 상한 사람치곤 대단한 웃음이었지요.
“의사요? 의사라고요? 장의사나 역사가라면 모를까 의사는 절대 아닙니다.”
“무슨 말이오?”
예언자는 웃기만 할 뿐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예언자에게 한 번 속셈을 들켰던 왕비에게 그 웃음은 대단히 기분 나쁜 것이었습니다. 왕비는 고 문의 강도를 높이는 것을 고려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침실에서 홀로 고민하고 있는 왕비 앞에 전설적인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세상의 최고위층 인사들과 최고로 인생 고달픈 인물들 사이에서는 어떤 독특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귓속말로 전해 지고 있지요. 해당 인물에 대한 평을 종합해 보면 그 인물은 자서전을 썼다간 세계대전을 일으키거나 신흥 종교를 만들고 말 자였어요. 왕비 또한 엄 중한 궁성의 왕비 처소에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나타난 자가 바로 그 인물이라는 사실에 더 놀랐어요.
“정말 당신이 이루릴 세레니얼인가요? 아프나이델을 데려간?”
“그렇습니다. 전하.”
“왜 나를 찾아온 거죠? 전쟁을 막으러 온 거라면, 그것이 당신 취미라고 들어서 하는 말인데, 늦었어요. 이미 끝났으니까.”
“바이서스의 패전에 심심한 위로의 뜻을 표합니다. 전하. 전쟁에 대한 내 견해를 아시는 것 같으니 다음엔 이기실 거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 다. 패전에 상처 입은 국민들을 잘 다독이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왔나요? 고맙군요. 하지만 편지라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냐고 묻고 싶어지는군요.”
“아니오. 이런 결례를 범하게 된 것은 조만간 예언자를 탈출시킬 것을 알려드리고 몇 가지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왕비는 주먹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래요? 막을까요?”
“아니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에 대한 고문을 중단하거나 약화시켜 주세요. 도망칠 힘은 있어야 하니까요. 경비를 줄여주 세요. 쓸데없이 사람들이 많이 다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요. 예언자가 탈출하면 그 추적은 나에게 맡겨주세요. 물론 나는 추적에 실패할 겁니다. 그 리고 이상의 이야기를 그 누구에게도, 예언자 자신에게도 비밀로 해주세요.”
왕비는 목덜미를 벌겋게 물들인 채 말했습니다.
“잘 알았다고 대답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 것 같군요.”
“전하께 빚 하나를 남겨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이루릴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 다음 왕비의 침실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