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104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나름대로 골치 아프게 된 것 같다. 배에서 모용란과 음혼귀모의 살인을 막은 건 사실 내가 그 꼴 보기 싫어서였지만, ‘극악..’으로써의 대외적 아니 사영적 명분은 신수성녀 미스 조를 만날 때를 대비해 내 여동생(?) 진하연과 그 수행원의 행적에 되도록 좋은 소문이 돌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참에 저들의 부탁을 막연히 거부하는 건 좀 그렇고… 뭐 적당한 핑계거리 없나?
“저, 아가씨. 두 분 무사님들이 뵙기를 청합니다.”
이론 제기, 아직 생각도 안 끝났는데 벌써 싸움 끝났어?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전 모용세가의 ‘비검(飛劍) 모용각’이라 합니다.”
할 수 없이 선실 밖으로 나가봤더니 먼저 구레나룻 청년이 그렇게 인사를 해왔다. 대사형이란 소리들을 때부터 짐작은 했다만… 비검 모용각이라면 현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성의 첫 번째 제자이며 차기 가주 후보 1순위인 청년 고수로군. 음… 그 옆의 눈매가 날카로운 청년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걸?
“청성파(靑城派)의 제자, ‘표진검(飄震劍) 상관웅’이라 합니다. 현재는 무림맹 소속으로 비인사기의 일원을 쫓는 임무를 수행중입니다.”
오호~ 역시 두 번째 친구도 꽤 거물일세? 표진검 상관웅이면 청성파 내에서도 손꼽히는 인재이며 무림맹 일급감찰단(一級監察團) 서열 2위 즉, 부 단주이다. 둘 다 젊은 나이에 한 칼 한다고 최근 주가를 높이고 있는 친구들인 것이다.
“알고 보니, 모용 공자님과 상관공자님 이셨군요. 전 대한특공가(大韓特功家)의 진하연이라 합니다.”
“대한특공가……?”
동시에 조금 의아한 표정이 되는 두 사람. 그러나 곧 표정을 수습하며 인사를 받는다.
“아, 알고 보니, 대한특공가의 진소저셨군요.”
알고 보긴 개뿔이 뭘 알고 봐? 니들이 대한민국 특공대를 구경이나 해봤냐?
“후후… 굳이 제 체면을 세워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 가문은 변경에 위치해 있고 오래 전부터 강호에 나서는 일이 없었으니 모르시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짐짓 친절한 음성으로 말을 받자, 모용각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지만 상관웅은 자세를 더욱 똑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견문이 넓지 못해 세외의 신비문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적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이 번에 처음 강호에 나온 터라 모용세가의 대제자 모용각 공자님과 무림맹 감찰단의 부 단주이신 상관웅 공자님처럼 유명하신 분들 몇몇 밖에 모른답니다.”
통하려나 이런 노골적인 아부가…? …음. 통하는군. 특히 모용각은 내 예상보다 훨씬 오버해서 기뻐하는 기색이다. 옆에서 비교적 표정 관리를 잘 하고 있는 상관웅보다는 아무래도 이 친구가 다루기가 쉬울 것 같다.
“헌데… 두 분께서는 소녀에게 대체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아, 그 것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서로를 마주보며 잠시 뜬금없는 눈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
“모살부취와 음혼귀모에 관한 일입니다.”
간발의 차로 모용각이 앞섰다!
“저희 세가와 무림맹에서는 공동 추적대를 조직해 이번에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두 요녀들을 쫓던 중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두 요녀들은 그 음악한 행실로 오랜 세월 동안 무림의 공적(公敵)이었습니다. 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번에야말로 지난 세월 동안 요녀들이 쌓아온 악행을 기필코 청산시킨다는 각오로 나섰으며……”
…모용각은 말을 좀 주저리주저리 길게 늘어놓는 타입인가 보다. 아니, 날 의식해 조금 들뜬 상태인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이미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를 지루함을 참아가며 들을 수밖에 없어서 조금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어제 놓친 모용란과 음혼귀모를 찾아낼 수 있도록 제가 협조해 달라는 말씀이로군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10여 분에 걸친 자신의 장황한 설명을 내가 몇 마디로 압축해 되묻자 모용각은 공연히 당황하여 버벅댔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상관웅이 나섰다.
“말씀드리기 민망하나, 어제 목격자들에 따르면 음혼귀모가 진소저께 흑심을 품고 있다 하고… 그 요녀의 집요한 성품으로 미루어, 반드시 진소저 앞에 다시 나타날 것으로 판단되기에 협조를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상관웅의 끼어들기 성공. 나와의 대화권(?)을 빼앗긴 모용각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해있었다. 음… 내가 지금 두 남자 신경전 감상할 때가 아니지? 어쩐다… 방금 한 가지 생각이 나긴 났지만 조금 무리한 수인 것 같기도 하고, 이거 갈등되는데?
“물론 어려운 부탁인 줄은 압니다. 그 요녀들은 무공이 고강한 편인데다 악명이 높으니 진소저께서 두려워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만… 소저의 안전은 저희 모용세가의 명예를 걸고 보장하겠으니 부디 강호의 정의를 생각하시어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나선 모용각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두려워하긴, 짜샤. 너희들이 한 칼 하면 내 호위 사영과 흑주는 최소 서너 칼은 한다.
“뭐… 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결정적으로 이 친구들보다는 모용란 언니(?)가 더 맘에 들어서 협조할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당장 달리 거절할 명분도 잘 생각 안 나고 해서 일단 그렇게 대답을 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우선 저는 어떤 사람과 약속이 있어서 반드시 배로 강을 따라가야 해요. 이 배에 여러분들이 타는 것을 말리진 않겠지만 그럴 경우 인원을 최소한으로 해주었으면 하고… 반드시 모용공자의 사매가 함께 타야 해요.”
“예…? 다른 조건은 그렇다 치고 사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건……”
“이보게, 모용각. 크지도 않은 배 안에 온통 사내들뿐이면 소저께서 불안해하시는 건 당연하지 않나. 훗~! 어차피 자네 소매도 결코 자네 혼자 보내지 않으려 하겠지만 말일세.”
상관웅은 역시 넌 안 돼…라는 표정으로 슬며시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여자 앞에서 분위기 주도하기, 토탈 성적, 상관웅 WIN~!
음… 내 일행 한 명이 돌아오면 출발할 테니 그동안 마음대로 매복이든 뭐든 준비하라고 해놓고, 나는 뱃머리 부근에서 바람 쐬는 척하고 앉아 있었다.
추가 탑승 불청객 수는 총 8명. 모용각과 그의 귀여운 사매를 포함한 모용세가 식구들 5명. 상관웅과 무림맹 고수들 3명이었다. 이 중 각 팀의 대빵인 모용각과 상관웅은 어찌 어찌 변장을 하고는 선원들의 옷을 빌려 입고 선원 행세를 하기로 한 듯했고 나머지 쫄따구들은 배 아래쪽의 창고에 짱 박히는 것 같았다.
나는 몽몽을 4번 두드려 ‘마우스 입력 모드’로 바꾼 다음 약간의 망설임 끝에 터보 메뉴를 눌렀다. 예의 깡 술을 대접으로 원샷 한 느낌… 제기, 어쨌든 초고수 못지 않은 이목을 가지게 되었지? 그럼… 음… 저 친구들이 날 찾아 올 수 있었던 시간이면 그보다 앞섰던 모용란과 음혼귀모는 벌써 도착해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근거리는 몽몽의 스캔 기능으로, 원거리는 내 터보 시력으로… 그래도 발견되지 않으니 일단 없다고 봐야할 것 같다.
모용란이 음혼귀모를 막았거나 음혼귀모에게 딴 일이 생겼나? 아니면 나와 사영에게 당한 것에 질려 포기하고 그냥 제 볼일 보러 간 걸까? 내 입장에서야 계속 안 나타나 주는 것이 더 좋지만… 음… 그보다, 제기. 터보모드는 몽몽이 알아서 5분만에 끊어주었는데도 꽤 어지럽다. 으… 돌아가는 사정은 대충 파악했으니 선실에서 좀 쉴 꺼나?
“저-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음? 일어서려던 참이었는데 모용각의 사매가 다가왔네? 내가 굳이 이 아이를 태우라고 한 건 잘 꼬드겨서 몇 가지 물어볼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게 매우 적대적인 소녀여서 어떻게 말을 거나 걱정했었는데 어쩐 일로 먼저 접근을 해왔군.
“물론이에요. 이쪽으로 앉아요.”
“안색이 좋지 못해요. 어디 아파요?”
“아, 그게… 제가 본래 몸이 약해서 피곤하면 어지럼증을 느끼곤 해요.”
남자로써 계집아이에게 이따우 소리하는 건 죽기보다 싫지만 어쨌건 지금의 난 여자니까… 에구, 이제 이럴 땐 아예 도피성 여자 자처 심리가 되는군 그래.
“음, 그래도 조금은 얘기할 수 있어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아, 그보다 아직 이름도 묻지 않았네?”
“…난 모용세가의 ‘모용사랑’이에요. 댁은 대한특공가…라는 가문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사랑…? 웬지 특이한 이름이군. 그나저나 이거, 역시 친해지자고 온 분위기는 아니지?
“미안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가문은 들어보지도 못했었어요. 그런데 비인사기, 특히 모살부취와 혼자서 맞상대할 수 있는 고수가 둘이나 되고 그들의 수행을 받으며 여행이라니, 도대체 진정한 정체가 뭐죠?”
한 대 쿡 쥐어박고 싶어질 정도로 댁댁 거리는 말투였지만… 까짓 거, 귀여운 애니까 봐준다.
“음… 정말 내 정체가 궁금해요?”
“그, 그래요.”
내가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반문하자, 모용사랑은 조금 기가 죽는 기색이었으나 애써 목소리를 위협적으로 가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난, 대사형처럼 무르지 않으니까. 쉽게 생각하지 말아요!”
“사랑 아가씨처럼 야무진 소녀를 누가 쉽게 생각할 수 있겠어요. 음… 내 정체로 말하자면 별다른 건 없고, 그저 변두리의 이름 없는 가문 출신의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번에 강호에 나온 건 두 명의 남자를 만나기 위함인데 그 중 한 명은 오래 전에 헤어진 오라버니이고, 또 한 명은 저와 정혼한 사람이죠.”
미리 그려놓았던 시나리오를 조금 들려주자 모용사랑의 눈이 대뜸 커지고 있었다.
“약혼…자요?”
“그래요. 이름은 진유준이라 하는데, 같은 진씨이지 만 친척은 아니고… 후우~ 강호로 나온 지 벌써 반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어 직접 찾아 나선 참이에요.”
언제는 내가 내 의형제도 되었다가 이제는 내가 내 약혼자라… 이 시대 와서 정말 별 짓 다해본다.
“아-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임자 있는 몸이라니까 바로 표정이 느슨하게 풀리고 있군.
“헌데, 어째서 약혼자는 혼자 강호에 나선 거죠? 진 소저 같은 분을 두고?”
“…그건 어떤 못된 여자 때문이에요. 제 약혼자는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라 어떤 여자가 위기에 처한 것을 도와주었는데 그 여자는 도리어 그 분을 함정에 빠트렸던 거예요. 결국… 지금은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상태로 어딘가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에요.”
상당한 각색을 거치긴 했지만 뭐, 아주 틀린 말들은 아니지. 훗-! 짜식, 표정을 보니 이미 내 정체를 파헤치고 어쩌고 할 마음은 사라진 것 같군. 그럼 마무리!
“우린… 결코 헤어질 수 없는, 둘이 아닌 하나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되찾고 말 거예요.”
오옷~! 말하다 보니 정말 감정이 복받친다. 암, 꼭 찾아야지. 그게 내 몸인데.
“아- 이제 보니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군요.”
도도히 흐르는 양자강을 내려다보며 얼음 구덩이 속의 불쌍한 내 육체를 떠올리느라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 사랑하는 약혼자(?)를 그리는 애잔한 여인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는지 모용사랑의 음성에는 어느 사이 소녀적인 감성이 담겨져 있었다.
“죄송해요. 전 그런 것도 모르고… 함부로 군거 사과 드릴게요.”
어쭈구리, 음성에 물기가 조금 느껴지는 걸?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는 소녀였군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