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1부 – 106화


또 얼마가 지났을까.

눈을 뜨고도 또 한참을 껌벅이며 멍하니 있고서야 나는 비로소 손발의 감촉이라던가 조금씩 현실적인 느낌을 찾을 수가 있었다.

잠깐씩 정신이 들었던 건지 아니면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건지 모를 애매모호한 의식 속에서 별의별 경험을 다한 것 같은데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 누워있는 장소의 분위기가 의식을 잃기 전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 날 혼란스럽게 했다.

뭐랄까… 엄청나게 술을 퍼마신 다음날 슬며시 눈을 떠보니 너무나 낯선 장소이고 그 장소에 가기까지의 기억이 전혀 없을 때의 지극히 막막하면서도 더러운 기분이랄까?

아아- 또 머리 속이 몽롱해지기 시작한다.

아… 뭐냐 이 기분은… 다시 어딘가로 내 의식 전체가 끌려가는 듯한 느낌… 낯익은 과거의 기억 속이나… 아니면 다른 차원의 장소를 먼발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이 야릇한 기분……

…그가 몸을 숙여 얼굴을 담근 곳은 보통 사람도 한 걸음에 뛰어넘을 수 있는 작은 시내 물이었다.

그래도 계곡 깊숙한 곳으로부터 시작된 물줄기여서인지 지극히 맑고 청량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얼굴 전체와 머리의 반 이상을 그 물 속에 담근 후 그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물방울이 요란하게 따라 올라오며 영롱한 보석처럼 허공에 흩날린다.

물이 가에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이마며 머리카락 사이로 깨끗한 물줄기가 여러 갈래로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굳게 닫힌 그의 두 눈과 앙 다문 입술이 가는 경련을 일으키며 흘러나오는 음성에는 그의 격정이 숨김없이 담겨져 있다.

“…강호의 소문대로 당신은 역시 그런 추악한 본성을 가진 여인이었단 말이오?”

천천히 떠지는 그의 두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에 우선한 서글픔이 있었다.

“그런… 것이오. 모용란……?”

차가운 계곡의 물줄기가 눈물처럼 후두둑 그의 앞에 뿌려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뇌리 속으로 별안간 뚜렷이 떠오르는 비열한 3인의 얼굴이 있었다.

“비인사기… 너희들이 감히……!”

문득 그의 두 눈가가 모아지며 싸늘한 한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떨리듯 달싹이던 그의 입술 사이로 무언가 말이 되어 새어나온다.

“…무엇보다… 너희들이 우선이다. 너희들을 찾아내어… 하나하나… 죽기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천천히… 숨통을 끊어 놓겠다. 맹세하거니와… 그 일에 누가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그의 고개가 쳐들어지더니 하늘을 향한다.

“나 진유준은……”

그토록 냉철하고 무심하던 그의 두 눈동자가 시뻘건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음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에 관계된 모든 인간들의 흔적까지 없애버리겠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부서져 사라진다 해도 태연할 이 강철의 사내가 드디어 이성의 껍질을 깨고 분노한 것이다.

이 단 한 명의 사내가 한 맹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아는 이는 아직 없었다.

만일 이 순간, 이름 모를 골짜기 한 장소에서 아무도 듣는 이 없이 행해진 그의 말을 누군가 들었다면, 그리고 그의 일신상에 담겨진 가공할 능력을 알았다면… 다행이랄까?

그 모든 것을 보고들은 것은 감정 없는 대자연의 소산물들뿐이었으니……!

푸~핫-!

우우~! 어이없는 탄성(?)과 함께 나는 눈을 떴다.

엄청 오버에 오버를 거듭한 망상에 스스로 놀라서 깨어나 버린 것이다.

“하, 하아~ 핫,하… 우이-쒸! 뭐야, 여긴.”

내가 들어도 이상한 소리를 흘린 끝에 겨우 ‘여긴 어딜까’를 말하는 나니, 비로소 확실히 제정신이 든 실감이 났다.

나는 지금까지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킨 다음 최후의 ‘무협지 꿈’을 꾸기 전에 보았던 주변 풍경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가 누워있었던 풀밭은 보기 좋게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발 밑으로 보기 좋은 천연의 바위들 사이를 유리알 같은 물줄기가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흐르고 있고 머리맡으로 울창하게 우거진 숲을 따듯하고 정겨운 느낌의 햇살이 감싸고 있었다.

한가할 때, 아니 바쁠 때 땡땡이 쳐서라도 놀러오고 싶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경치의 계곡이었다.

군대에서 훈련하다가 접하곤 했던 산 경치의 아름다움이 연상되어 순간적으로 이 것도 꿈 속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훗-! 이게 꿈이라면 나와 숲 사이에 그린 듯 앉아있는 저 인간이 대답을 할지도 모른다.

“어이- 흑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야?”

음… 확실히 현실이군. 또 씹혔어.

“사영은… 에, 됐다 됐어.”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새삼 내 차림과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가장 중요한 몽몽은 팔목에 잘 채워져 있고, 입고 있던 옷도 그대로였다.

다만 차림새는 좀 개판인 것이 한 번 다 풀어헤쳤다가 다시 대충 추스려 놓은 것이 역력한 상태여서, 내가 여자였으면 ‘아… 나 당했나 봐.’라고 의심해 볼 만한 상태였다.

그러나 현재 내가 가장 불안한 건 따로 있지?

톡!톡!톡!

“몽몽… 너 무사하냐?”

[ …모든 기능 손실 없이 기동 가능합니다. ]

“헷-! 짜식, 그럼 나 깨어났을 때 말이라도 좀 하지, 걱정되게스리……”

[ 주인님의 신체 상태가 양호하여 특별히 정보제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정신적인 공항에 대한 조치는…… ]

“새꺄, 나 말고 너 말야. 니가 괜찮은가 걱정했다는 말이야.”

[ …이상 없습니다. …주인님의 현재 신체 상태에 대한 정보를 종합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

“됐다, 야. 그건 좀 있다 하자. 그보다 내가 정신을 잃은 후의 상황을 좀 알려 줄래? 아, 아니 전에 사영은?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는 거지?”

[ 해당 인물의 현재 위치는 불명이나, 1시간 42분 전 현 장소를 떠날 때까지 신변의 문제는 없었습니다. ]

후우- 다행이다. 당장 어디 갔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 아저씨도 무사한 모양이다.

“그럼, 이제 얘기해봐. 내가 배에서 의식을 잃은 후 무슨 일들이 이어진 건지 말이야.”

[ …주인님이 탑승한 배에서 발생한 다수 인간들 간의 트러블은…… ]

…몽몽의 이야기는 꽤 한참 이어졌는데, 대충 줄거리는 이랬다. 비인사기 일당들과 우리측의 싸움은 내가 맛이 간 다음에도 얼마간 계속되었는데 그 싸움의 흐름을 한 순간에 우리 쪽으로 돌린 것은 역시 사영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팽팽한 접전 끝에 비인사기 중 무공 서열 2위인 탐동음마의 오른 손목을 잘라버렸던 것이다. 몽몽의 말대로라면 내가 의식을 잃고 15분 45초가 경과했을 때 발생한 일이라고 하는데… 그 한방의 영향은 상당히 커서 비인사기가 일제히 물러나 버렸다는 것이다. 생사를 건 패싸움치고는 어째 시시한 결말이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사실 비인사기의 특징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조금 불리하면 잽싸게 튀기. 그것이 그들의 그동안의 장수비결이었던 것인데 다른 시합도 아니고 음혼귀모의 애정행각(?) 좀 도와주러 온 친선시합에서 상대의 거친 플레이에 한 명이 불구가 되어 버렸으니 시합할 맛이 안 나기도 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후의 상황이었다. 비인사기가 일제히 물러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배로 돌아간 후, 곧 보복 포격이 시작되더란다. 아마도 그들의 배는 대포까지 장비한 전투선이었던 모양이다. 강호의 비주류치고는 뜻밖의 장비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하여간 그래서 우리 측 배는 순식간에 거덜나 침몰해 버렸고 그 전에 사영과 흑주는 날 끌고 배에서 탈출했던 것이다. 음… 아까까지 꾸었던 무수한 꿈 중에 물 속에 서 깜장 돌고래 타고 드라이브하던 꿈도 있었는데 그게 그 때 꾼 꿈이었나보다.

나도 참 어지간히 속 편한 놈이지, 사영과 흑주는 나 데리고 탈출하느라 뺑이 치는데 난 계속 그 상황을 꿈으로 즐겼던 모양이다. 강에서 나온 후에는 둘이 번갈아 가며 한 명은 계속 내공을 내 몸에 주입하며 응급조치를 하고 다른 한 명은 근처에서 자잘한 짐승을 잡아다 피를 뽑아 나에게 먹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절친한 동료들의 격려를 받으며 험준한 산을 기어 오르는 인간승리 서바이벌 드라마를 찍었던 것 같고… 결국 회복되기 시작한 날 이 경치 좋은 장소에 눕혀 놓은 후에는 예의 ‘무협지 꿈’을 꾸었던 것이다. 음… 그냥 읽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많이 읽었던 무협지에 나 자신을 대입시킨 꿈을 꿔보니 정말 장난 아니게 닭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부서져 사라진다 해도 굳건할 강철의 사내가 뭐 어째…? 으… 누가 알까 두렵군. 잊자, 잊어.

지난 사정을 대충 알고 난 나는 주춤거리고 일어나 물가로 내려갔다. 우푸~! 차가운 계곡 물에 세수를 하니 한결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다. 대충 세수를 하고 돌아서니 어느 사이에 흑주가 내 뒤에 서있었는데 그의 발 밑에 놓여져 있는 상자… 그건 내 옷가지와 화장품 등이 들었던 그 상자였다.

“하여간, 이런 건 잘 챙긴다니까.”

나는 공연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상자를 열어 거울을 먼저 꺼내 날 비추어 보았다. 에… 거의 예상했던 꼬라지로군. 화장은 당근 다 지워져 있는데 옷은 여자 옷,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얼굴이 아~ 쓰바, 뭐야 이게!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깨어나셨군요. 곡주님.”

뒤에서 들려온 반가운 음성에 돌아보니 사영이 계곡 건너편 숲에서 나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양손에 꿩으로 보이는 새를 들고 오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 또 사냥을 나갔었나 보다.

“걱정했었는데… 다행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이 것으로 식사를 하도록 하죠.”

사영과 흑주. 말하자면 한 명은 전직, 한 명은 현역 킬러들인데 대한민국 특공대 못지않게 서바이벌에는 일가견이 있는지 한 명은 불을 피우고 한 명은 사냥한 새를 해체 작업하고 하는데 손발이 척척 맞는다. 그나저나… 이거 참, 온갖 아동틱한 꿈도 그렇고 그 전에 있었던 사건들도 갑자기 실감이 안 난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더니 별안간 경치 좋은 계곡에서의 캠핑 분위기라니……

“…곡주님.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불에 구운 새고기를 씹고 있는 나에게 사영이 물어왔다. 그에게 내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리바이벌로 들은 후였다.

“음… 그 모용세가와 무림맹 사람들도 생존해 있을 거라고 했죠?”

“예, 다들 포격이 심해지기 전에 강으로 뛰어드는 것을 확인했었습니다. 헤엄을 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면 별개의 문제겠지만……”

“그래요…? 예정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마침 잘 되었네요. 이쯤에서 ‘진하연’은 강에 빠져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 거로 합시다.”

“그럼 이제 곡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시렵니까? 아직 신수성녀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말입니까?”

“여자 행세를 하고 다녀도 말썽은 끊이질 않고… 이제 신수성녀가 머물고 있다는 곳까지 얼마 안 남았다니 그냥 갑시다.”

얼마 안 남은 것도 말 타고 하루 정도여서 부담은 되지만 정말이지 지금까지처럼 문제가 많으면 여장을 하고 다닐 의미가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지금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진하연에서 진하운으로 돌아갈 적기인 것 같았다. 나중에라도 그녀(?)가 위태로운 상태에서 강물에 빠졌다는 사실은 모용세가와 무림맹에서 알아서 소문 내 줄 것이고 말이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린 잠깐 산길을 타고 이동해 근처의 대로를 찾아 나왔다. 난 이미 준비해 두었던 남자 옷으로 갈아입은 후였고 머리는 일단 올백으로 뒤로 넘겨서 묶은 상태였다. 사영은 그 사이 주변 지리도 다 파악해 놓았는지 말과 마차를 구해오겠다고 나섰고 그 동안 나는 흑주와 함께 대로변에서 조금 벗어난 숲 속에서 사영을 기다리기로 했다.

사영이 떠난 지 한 20분 정도나 되었을까? 조금 지루해진 내가 하품을 쩌억- 하고 있는 때, 갑자기 어디선가 우두두~하는 땅울림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음… 이거 말이 달려오는 소리 아닌가?

“아악-!”

어? 왠 여자의 비명소리? 놀라서 앉아있던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나 보니 저만치 대로에서 한 여자가 말 위에서 땅 위로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달려내려 갔는데… 내려가다 보니 상황이 좀 심각했다. 여자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는 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흑주처럼 검은 복면을 한… 척 봐도 살수 같은 이미지의 사내였다.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여자의 등에 작은 칼 같은 것이 꽂혀있는 것으로 보아 저 놈이 도망치는 여자의 등에 단도를 던진 모양이다.

이거, 내가 끼어 들어도 되는 상황인지…라고 망설이는 건 벌써 늦은 상태였다. 나는 얼결에 숲에서 빠져 나와 있었고 그리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여자 쪽으로 옮기던 걸음을 멈출 생각도 없었다. 아무리 시대 상황이 달라도 그렇지 눈앞에서 칼맞고 쓰러진 여자를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놈! 나서지 마라!”

짧은 외침과 함께 복면 사내는 말 위에서 그대로 몸을 날려 내 쪽으로 맹렬하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음, 그 다음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멋있게 허공을 가르던 복면 사내는 우리 쪽 복면 흑주의 저격(?)을 받아 그 대로 땅으로 추락해 버린 것이다. 습격 받은 여인을 구해주는 전형적인 장면이긴 했으나… 제기 불행히도 한발 늦었다. 내가 다가가 뭐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몽몽이 먼저 그녀의 상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알려왔던 것이다. 으으… 정말 공연히 나선 건가? 간신히 고개를 든 여자가 피를 줄줄 흘리는 입을 달싹이고 있는 모습을 가까이 보면서도 대책은 없으니…..

“아, 아가씨… 우리… 아가씨를 구해… 주세……”

그게 여자의 유언이었다. 고인에게 할 말은 아니지 만… 당신, 그런 말 전하고 죽는 전형적인 엑스트라셨군요. 나는 잠시 불쌍한 여자의 명복을 빌어 준 다음 그녀가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가리켰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사영이 간 반대 방향으로 주욱 이어진 길… 저 길을 따라 올라가 보면 어떤 귀하신 아가씨가 습격을 받고 있다는 그런 스토리인가 본데, 가볼까 말까…? 웬만하면 가보고는 싶지만 사영이 곧 돌아올 텐데 엇갈리면 일정에 또 차질이 빗어질 거라는 생각에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난 아무래도 무협지 속의 ‘정의의 주인공’은 못 되나 보다.

“으… 감히 천인군도의 일에 끼어 들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

좀 전의 복면 사내였다. 흑주가 죽이지는 않았는지 상체만을 힘겹게 일으킨 사내는 나와 흑주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감히… 라고 하셨소, 형씨?”

“그, 그렇다. 우리 천인군도를 모르지는 않겠지?”

“알지. 살수계의 개방(幇)이랄까? 머리 수만 무지하게 많은 살수집단이지 아마?”

“다, 닥쳐라 이놈!”

“이놈… 나보고 이놈이래. 잠깐 잠재워 놔, 흑주.”

“뭐, 뭐…? 자, 잠깐. 지금 누구라고? 서, 설마……!”

그 정도에서 복면 사내의 말이 멈추었다. 흑주가 그의 목 뒤를 검 집 끝으로 쿡 찍어 눌러 기절시켰기 때문이었다.

“가보자, 흑주.”

나는 흑주와 함께 녀석이 타고 왔던 말에 올라 출발했다. 한 5분 정도를 달린 후에 흑주는 말을 멈추고는 날 등에 업고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사건 현장에는 일단 몰래 접근하라는 내 명령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음, 부하에게 업힌 채 등장하는 주인공이라는 건 아무리 어쩌니 해도 폼이 안 날 텐데 걱정이다.

대로 한가운데 한 대의 호화로운 마차가 세워져 있었고 몇 명의 사내들이 그 마차를 에워싼 상태… 우리가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거목 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한 차례의 상황이 마무리 된 듯, 마차를 포위한 검은 복면의 사내들과 마차 앞에서 홀로 버티고서 그들과 대치한 청년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에… 마차 주위에 여기저기 널부러진 시체들의 일정한 복장을 보면 그들이 마차를 호위하던 사람들인 것 같은데, 저 정도 인원을 해치우는 동안 복면 쪽은 피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면 천인군도의 살수들도 상당한 것 같다. 음… 우린 지금 저들이 고개를 한껏 쳐들어야 볼 수 있는 높은 거목의 가지 위에 서 있는 상태이고… 일단 사태를 좀 더 관망해 보기로 할까? 이미 상황은 한 쪽의 일방적인 도살로 끝난 후였고, 혼자 남아서 마차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한 청년 또한 결코 그들의 적수가 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대치한 채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천인군도의 살수들이 청년을 해칠 뜻이 없는 것 같았다. 자- 몽몽, 음성 증폭에 화면 부분 확대 마우스 커서 대기… 관람 준비 끝.

“이…. 이놈들… 네놈들은 도대체 누구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하얀 얼굴의 청년은 떨리는 음성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검을 빼들고 있기 는 하나 그가 그것을 휘둘러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나약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거의 원판 수준의 도련님 얼굴이랄까? 뭐… 그래서인지 포위한 천인군도의 살수 10인 중 누구 하나 입을 열어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네, 네놈들은 누구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대, 대답해라.”

청년이 다시 외쳤지만 또 씹히고 있다. 저 기분은 내가 잘 알지. 음… 그나저나 무림인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벼슬아치의 자제라도 되는 건가? 도무지 비벼볼 여지가 없는 상대들에게 ‘감히’라는 말을 쓰다니… 여전히 아무 말이 없는 살수들의 차가운 반응과 살기 어린 기운에 점점 더 기가 죽어 비지땀만을 흘리고 있는 청년.

쯧쯧- 불쌍한 걸? 도와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참에 복면 사내들 중 한 명이 한 걸음 성큼 나서 청년의 앞에 선다.

그가 나서자 청년은 마치 저승사자라도 대한 듯 질린 표정이 되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음… 복면은 같은 복면인데, 내가 봐도 특히 살벌한 분위기의 사내이긴 했다. 근데 복면의 이마 한 가운데에 무슨 무늬 같은 것이 있다 싶어 확대해 보니, 뭐야 이거 웬 작대기 무늬? 니가 이등병이냐?

“금상보(金商堡)의 대공자 왕정치… 우린 당신에게 볼일이 없소.”

이등병(?)의 음성은 매우 굵고 살벌했고 순간 청년은 뜨끔한 기색을 보이더니 더욱 사색이 된다.

그나저나 또 낯익은 이름이 나와 버렸다. 왕정치…? 설마 외다리 검법을 쓴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내가 금상보 사람인 것을 알고도 이런 짓을…..? 너희들은 후환이 두렵지 않으냐?”

“그런 것은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닌 것. 우리는 소설아가씨를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그리 할 뿐이오.”

“뭐, 뭣이?”

청년, 아니 금상보의 대공자는 그 말에 완전히 실색하여 낯빛이 아예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다.

그는 등뒤의 마차를 흘끔 돌아보고는 다시 외쳤다.

“이놈들이 이제 보니 감히-!”

분노가 용기를 만드는가 왕정치의 이번 일갈에는 떨림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눈치는 디게 없는 친구로군. 애초에 이 분위기가 금품을 터는 산적 분위기냐? 당연히 중요한 인물 납치 분위기지?

“물러서세요. 오라버니”

어랏? 마차 안에서 지극히 청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협지 표현을 빌리자면… 은으로 된 방울을 살짝 흔들었을 때 울리는 소리가 이러할까 싶은, 맑고 깨끗한 목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을 안으로부터 들추는 작고 하얀 손이 있었다.

이윽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마차 밖으로 완전히 자태를 드러내자 한 순간, 천인군도의 살수들마저 조금 동요하는 듯했다.

그 만큼 마차에서 나온 소녀의 아름다움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변에 꽃잎이 사라라~ 날리는 분위기의 청순한 얼굴도 얼굴이지만, 연한 개나리꽃 빛깔의 치렁한 정장이 바람에 하늘거리다가 일부 살짝 휘감긴 부분이 감추어진 그녀의 몸매가 얼마나 빼어난 것인지를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우~ 남자로 돌아오자마자 이게 무슨 사태란 말인가.

안돼, 진유준. 난 지조 있는 남자. 한눈팔지 말자. 한눈… 음, 하지만 보는 거 정도야 뭐… 흠, 흠!

“설아야! 너는 그대로 있으라고……”

청년이 입을 열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자 설아라 불린 소녀는 그녀의 유약해 보이는 오라버니에게 시선을 주었는데 어딘지 서글픈 미소가 그 입가에 서려 있었다.

“오라버니. 이들은 처음부터 제게 목적이 있어서 온 사람들이에요.”

소녀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주위의 시체들을 돌아보며 그 고운 얼굴에 침통한 표정을 떠올린다.

“그러니 결국 소녀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희생되었군요.”

처참한 시신들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또한 사내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애절한 매력… 미염당 주 고리라와 쌍벽을 이룰 것 같은 소녀였다.

세외미라 불리는 고당주와 맞먹는… 에? 그러고 보니 저 소녀 이름이 소설이라고 했지? 집은 금상보이고 오빠 성은 왕씨고… 왕소설…? 천하제오미 중 4번째인 그 왕소설? 어쩐지.

나는 저항하기 어려운 그녀의 매력에 일단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세웠다. 대교 자매를 비롯한 무수한 미녀들에 둘러싸여 있던 나인데도 저 소녀에게서는 뭔가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이거 매력이 아니라 ‘마력’이 아닐까?

사실 미모의 여인이 풍기는 매력은 악마의 유혹에 가장 가까운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옛 사람들 이 여인의 미색을 표현함에 있어 경국지색(나라 단위로 놀래켜 그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뜻이지 아마?) 이라는 말을 만들어 후대의 인간들을 경계시킨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난 그런 깊은 뜻을 지니고 마음을 다잡은 것이 아니었다.

자아- 그녀의 이상한(?) 명호를 떠올리며 잠깐 웃음으로 마음을 돌리자. …대교야. 나 갈대 아니다. 알지?

“소녀는 금상보의 왕소설입니다. 대협께서는 혹 천인군도의 혈월(血月)님이 아니신지.”

오호~ 혈월? 어쩐지 분위기가 남다르다 싶더니 천인군도의 그 많은 살수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그 살수로군.

야황살후 소진광과 사영 은퇴 후 그 뒤를 이을 유망주라 평가되는 인물인데 이런 곳에서 만날지는 몰랐다.

“대협이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으나 본인이 혈월인 것은 틀림이 없소이다.”

근데…

왕소설이 지극히 공손한 어조로 고개를 숙이며 예를 차리자 사내 혈월은 조금 당황한 태도로 급히 두 손을 모아 마주 예를 취하고 있었다.

쯧~! 혈월도 미녀 앞에선 별 수 없구먼.

어쨌거나 지금 왕소설의 옆에 서 있던 청년 왕정치의 얼굴은 더더욱 바래져 절망이라는 두 글자를 인쇄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일견 산들바람에도 훌쩍 바람 타고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냘픈 분위기의 왕소설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표정이었고, 오히려 혈월의 반응을 주시하며 희미한 미소마저 띄우고 있었다.

“정교하면서도 극쾌를 잃지 않는 고도의 살검술(殺劍術)을 보고 짐작했을 뿐입니다. 실례를 범하지 않게 되어 다행입니다.”

조용한 그녀의 말에 혈월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엔 자신이 먼저 포권하며 입을 연다.

“과연 삼수생(三秀)이라는 명호가 허전되지 않았음을 새삼 느끼오.”

그래, 저게 바로 그녀의 명호다. 뭐… 물론 어감은 좀 그래도 뜻은 좋다. 세 가지가 아주 뛰어나다는 뜻인데 우선은 눈부신 미모와 학문… 그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낭랑 18세가 되는 그녀를 한 번이라도 목도하면 이후 꿈에 그리며 마음의 병을 앓지 않는 젊은이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천하에 공인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뭐 그러니까 천하제오미 중 한 명이겠지만, 거기다가 그녀 나이 불과 12세 때, 대학자로 천하의 존경을 받는 고죽 선생이라는 인물로부터 더 이상 가리킬 것이 없다는 말을 하게 한 천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끝에서 연주되는 모든 악기는 그 순간 천상의 음률을 가지게 된다고 전해지는 놀라운 음악성. 이 세 가지를 들어 삼수라는 명호가 생긴 건데 문제의 ‘재물 생’자는 그녀의 아버지 금상보의 보주가 붙여 버린 거란다. 자기 집 안에서 돈을 빼놓을 수 없다는 의미인 모양이다.

“헌데… 명성 높은 혈월님께서 수하를 아홉이나 이끌고 소녀를 찾은 뜻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왕소설의 말에 혈월은 대답에 약간 뜸을 들였다.

“…본인의 주인께서 아가씨를 모시고 싶어하십니다.”

“혈월님의 주인이시라면… 혈해삼사왕(血海三邪王) 세분 중 금검사왕(金劍邪王) 임무석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금검사왕 정도의 분께서 저같이 보잘것없는 어린 여자에게 무슨 용무가 있으신지 모르겠군요.”

이건 왕소설의 아부성 발언이다. 뇌전사왕. 규모로 보면 확실히 전국구인 천인군도의 짱이긴 하지만… 명호의 거창함에 비하면 유명도는 오히려 삼수생 왕소설보다도 밀리는 편이다.

“저는 다만 명령을 받들 뿐이니 아가씨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닥쳐라!”

흠, 갑자기 왕정치가 끼어드네?

“금검사왕, 그자의 검은 속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안 된다. 이 아이는 아무도 데려갈 수 없다.”

왕정치는 자신의 동생 앞을 가로막아 서더니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혈월의 시선을 맞받기 시작했다. 왕소설은 순간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이내 당혹한 목소리를 낸다.

“오라버니…”

“설아를 데려가려거든 그 전에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왕정치는 그러며 두 손으로 검을 모아 쥐고 혈월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혈월의 눈가가 꿈틀하는가 싶더니 싸한 냉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무공도 담력도 약해 보이는 친구가 동생을 지키려는 마음만은 강한 것 같은데, 역시 성의(?)를 봐서 도와줄거나?

“오라버니!”

갑작스런 왕소설의 외침에는 노기마저 서려 있어 오히려 어리둥절한 것은 주위 사람들이 더했고 왕정치도 당황한 표정으로 동생을 돌아본다.

“오라버니는 가문의 대를 끊으시려는 것입니까?”

그 말에 왕정치의 안색이 급격히 일그러지며 고통 어린 표정을 만든다.

“설아야, 나, 난…”

“오라버니… 제발 혈기를 누르세요. 오라버니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왕소설이 몇 걸음 나서 왕정치를 지나친다. 왕정치는 흠칫 놀랐으나 그녀를 제지하지는 못한다. 왕소설은 왕정치를 뒤로 한 채 혈월에게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소녀는 여러분들을 따라 가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조건이 있습니다.”

사실 그녀가 무슨 조건을 내세울 입장이겠는가마는 혈월은 그대로 고개를 끄덕인다.

“말씀하시지요.”

“제 오라버니를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저희는 아가씨를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구태여 아가씨의 오라버니를 해칠 이유가 없지요.”

말은 그래도 과연 정말 살려 줄 생각일까? 해칠 이유가 왜 없겠어. 기껏 납치해도 저 친구가 돌아가서 떠벌이면 삼수생 추종자들이 떼거지로 몰려들 텐데 말이다.

“물러서라, 설아야!”

거의 절규에 가까운 사내의 목소리였다.

왕정치의 그런 반응은 그녀도 예상 못했는지 놀란 기색을 하고 고개를 돌린다. 오옷~! 왕정치의 분위기가 초왕정치로 바뀌어있다.

“나는…. 분명 쓸모 없는 놈이다. 그러나 동생을 담보로 목숨을 구걸하는 놈은 아니다.”

이글거리는 목소리와 그의 눈동자에 차오르기 시작한 ‘광기’를 보았음인지 왕소설은 입을 열었으되 쉽게 말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자아- 여기부터는 무협지식 중계방송.

“나 왕정치! 오늘 여기서 죽는다.”

일갈과 함께 그는 벼락치듯 앞으로 뛰쳐나왔다. “안 돼요!” 하는 소녀의 절규가 뒤따랐으나 버티고 선 사내 혈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왕정치가 크게 검을 휘두르며 근접하는 순간이었다. 번쩍하는 검광과 쩡! 하는 괴음이 그 사이에서 일었다.

“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은 왕소설의 것이었다. 극쾌의 살검으로 쾌살귀라고도 불리우는 혈월이다. 우연이라도 왕정치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그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살수들을 따라나선다고 하면서도 그토록 침착하던 그녀였으나 혈육의 처절한 죽음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던지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헌데… 어찌된 일인가. 헛-! 하는 억눌린 듯한 신음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것이다. 그 소리의 주인공들이 바로 주위의 살수들임을 느끼며 왕소설은 떨리는 눈꺼풀을 들었다. 설마… 하던 그녀의 시선 속으로 약간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왕정치가 들어선다. 그리고 그 앞에 입술을 깨물고 선 혈월의 가슴 옷 위에 그어진 한 줄기 검흔……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안도감과 의혹이 뒤섞여 떠오른 것과 천인군도의 살수들이 일제히 긴장하여 몸을 굳힌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어 넋을 잃은 것은 오히려 왕정치였다. 그는 조금 전 극도로 흥분하여 그나마 알고 있던 검술의 어느 부분도 아닌 그저 감정 대로 크게 상대에게 휘둘렀을 뿐이었다. 두 눈마저 질끈 감은 채 마구 휘두른 엉성한 검이 저 살인귀의 몸에 검흔을 내다니… 왕정치가 아무런 이상 없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더욱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 되었을 때였다.

“어느 방면의 고인이시오.”

혈월이 노기를 억누른 채 일갈하자, 왕정치가 능력을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어떤 수를 쓴 것으로 생각했는지 그에게만 살기를 집중시키던 살수들이 일제히 경계하며 사방을 살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머리 위 거목의 가지 위에 올라선 두 명의 심상치 않은 인물들을… 음, 중계방송 끝, 이제 주인공 등장 실황 중계이다.

“흑주… 이대로 내려가자.”

흑주는 별다른 예비 동작도 없이 슬쩍 발을 앞으로 내딛더니 한 3, 4층 정도의 높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땅바닥에 내려선다. 물론… 등에 날 업은 채. 경공술 하나만 봐도 상대가 보통 고수가 아님을 직감했는지 조금 전과는 판이한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 음… 살기 등등한 자들의 포위망 한가운데에 서있자니 나도 좀 긴장되는 걸?

“암중에 본인의 검을 막은 수법은 잘 보았소. 본좌의 일에 끼어 들려면 먼저 신분을 밝히시오.”

그럴 용기가 있다면… 하는 말이 그 뒤에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그냥 지나던 사람이지 뭐.”

“흥! 후환이 두렵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까 흑주가 기절시킨 그놈처럼 천인군도의 이후 보복이 두려워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는 말투다.

“후환이라… 훗-! 정말 내 신분을 알고 싶은가? 후회할텐데?”

경공 하나도 못하여 남에게 업혀 내려온 주제에 웬 똥폼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것도 나 나름대로는 머리를 쓰고 있는 거다. 혹시라도 번드르~한 원판의 외모에 저 왕소설이 달라붙기라도 하면 곤란한 관계로 좀 유치한 모습을 보일 생각인 것이다.

“어쨌든 난 자네들 보단 저쪽이 더 인상이 좋아.”

그러며 빙긋이 웃음 띤 얼굴로 왕정치와 왕소설에게 시선을 주었다. 시선이 만나자 왕소설의 하얀 피부에 살며시 홍조가 피어오른다. 홍조… 엑! 뭐야, 닭살 버전으로 느끼게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통한 거야 설마? 어, 어…? 이봐 그렇게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외로 꼬으면 어쩌자는 거야?

“쳐라!”

“응? 자, 잠깐, 잠깐! 나 실은……”

“이미 늦었다. 네가 누구든 살려보내지 않겠다.”

돋됐다. 왕소설의 반응에 당황해서 진짜로 신분을 밝힐 기회를 놓쳤다. 아무리 흑주라도 이 정도 인원의 전문살수들의 동시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으으… 이 녀석들 움직이는 폼을 보니 아무래도 어떤 검진(劍陣)을 펼칠 것 같은걸? 야, 몽몽. 분석, 분석~! 윽~!

우… 별안간 흑주가 내 머리를 찍어누르는 바람에 난 그대로 제자리에 쭈그리고 앉게 되었고, 그 다음 순간 머리 위로 까깡! 깡! 하는 쇠붙이들의 파열음이 쏟아졌다. 제기… 뭔 일 당할 때 당하더라도 구경은 해야지. 터보 모드 ON!

오오- 이거 대단한 걸? 저 무수한 검을 막아내는 흑주의 동작… 이제까지는 한 칼에 상대를 해치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몇 가지 움직임의 흑주만을 보아왔는데, 지금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현란한 모습이다. 마치 테크노댄스를 추는 듯한 경쾌함이라고나 할까? 몽몽의 안내 메시지로도 나오고 있지만 지금 천인군도의 살수들이 펼치는 검진은 인원들마다 고유의 방위를 점하여 끊이지 않는 흐름을 형성하는 수법인 것 같았다. 몽몽의 데이터에 있는 검진이라 그 흐름을 끊는 포인트를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음… 아무래도 흑주도 이미 그걸 아는 것 같다.

여유를 찾은 나는 휘익~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흑주의 활약을 감상하기 시작했는데… 한 3-4분이나 지났을까? 한순간, 흑주는 내 터보모드로도 놓칠 만큼 폭발적으로 빠르게 사방으로 검기를 뿌렸다. 검의 파찰음과는 다른 퍼벅! 하는 둔탁한 괴음과 여러 명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성이 이어지고… 사방으로 흩어진 살수들은 저마다 한 군데씩의 검상을 입은 채 비틀대고 있었다. 와우! 역시 대단한 흑주. 나는 짝짝짝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이- 이제 그만 들 하지. 내 신분을 알게되면 더 이상 싸울 일도 없을……”

“아아~ 오라버니! 저는 저 분이 누구인지 이제 알 것 같아요!”

나를 가리키며 외친 왕소설의 감탄 섞인 음성 때문에 내 말이 끊겼다. 혈월까지 나서기 전에 내 신분을 밝히고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더니… 음, 삼수생 왕소설. 흑주의 무공을 보고 이미 내 정체까지 알아낸 건가?

“천인군도의 연합검진을 와해한 저 사람의 검법은… 분명 만무일류(萬武一流)의 도를 따른 것… 그런 고수의 호위를 받는 저 분… 저 분은 분명… 분명……”

만무일류? 그런 검법도 있었나?

“아… 강호의 천인이 삼가 황실의 삼태자님을 뵙습니다.”

에? 뭐가 어째? 태자…? 이 아가씨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이봐요. 내가 뭐라고요?”

어이가 없어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버리는 왕소설을 말릴 생각도 못하고 그렇게 물었다.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사옵니다. 삼태자, ‘조명환’님께서 최근 신분을 감춘 채 중원을 유람하고 계셨다는 것을… 하지만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더구나 소녀의 생명을 구해주셨으니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환장하겠구만. 너 이 삼수생(三秀) 맞아? 혹시 이 삼수생(三受生)에 결국 포기하고 시집갈 준비하는… 그런 거 아냐? 여기서 황실이 왜 나와?

“흐, 흠… 혹시……”

혈월이었다. 결국 왕정치까지 함께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을 우리와 함께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조심스럽게 흑주에게 물었다.

“그대의 사부가 거두마군과 소살파파 부부 아니시오?”

어랏? 이 친구가 더 똑똑하네?

“아… 그, 그렇다면 그대는, 그리고 이분은……?”

흑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혈월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져갔고 나는 재빨리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혈월은 눈치 빠르게 내 신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수하들과 함께 땅바닥에 엎드려 예를 표한다.

“아, 됐어. 모두들 일어나.”

혈월들은 그렇다 치고 왕씨 남매를 보니 한숨이 먼저 나온다. 확, 구해주지 말까 보다.

“이봐, 이 아가씨를 데려오라던 자가 누구라 했지?”

“…금검사왕 임무석님입니다.”

“이유는?”

“그건……”

“말하기 싫다는 건가? 아니면 모른다는 건가?”

음… 이 말투 오랜 써 본다. 남자로 돌아온 실감이 나는 걸?

“됐어!”

나는 입을 열려는 혈월의 말을 끊어 버리고 내 할 말을 해버렸다.

“모르는 걸로 하지. 어쨌건 지금부터 자네들은 다른 일을 해야 할 테니까. 그 일은 잊어버려 알겠나?”

“…존명!”

흠-! 아무리 비화곡주라도 독립적인 조직의 일을 이유 없이 중지시킨다면 군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혈월의 태도에는 불만의 기색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가지 사실이 줄줄이 떠오르는군. 어쩐지 흑주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저들의 복면… 흑주가 처음부터 주저 없이 날 데리고도 이들을 상대하려고 했었던 점… 아무래도 거두마군과 소살파파 부부가 천인군도 출신이었나 보다. 실은 나도 그들 부부의 출신은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제 왕소저는 안심하고 가던 길을 가시오.”

“강호의 야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삼태자께서는 참으로……”

“됐소. 그리고… 어디 가서 내가 삼태자라는 둥 그런 말하지 말기 바라오.”

“아, 소녀가 생각이 얕았습니다. 태자님의 신분은 어디에서도 밝히지 않겠습니다.”

“도대체, 왜 날 태자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야 호위무관께서 황실무공을 쓰시고… 최근 근방에 태자께서 납시었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황실무공…? 아, 그러고 보니 만무일류라는 건 무공 명칭이 아니라 황실무공의 이념이랄까? ‘모든 무공은 하나로 흐른다.’라는 개념을 말하는 거였다. 황실무공이 본래 강호의 무공을 잡다하게 끌어다가 짜집기 한 거라 그런 그럴듯한 명분을 붙였다고는 한다. 하지만 그건 살수들의 무공도 마찬가지이다. 특정 유파의 흔적을 안 남기기 위해 살수들은 자신이 아는 무수한 검법을 짜집기 하거나 아예 틀이 없는 자유분방한 수법을 쓰는 것이다.

으음… 왕소설의 추리에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혈월처럼 자기 유파를 알아보고도 확인해 보는 신중함도 없이 대뜸 자신의 판단을 믿어버리다니, 그 것도 어느 정도의 인물이래야 지, 원.

“흠, 내게 무슨 볼일이 남았소? 이만 가보시오.”

내 퉁명스런 말에 왕소설은 귀밑까지 얼굴을 붉혔지만, 그래도 웬지 미적미적댔고 결국… 혈월 일행을 이끌고 내가 자리를 떠버릴 수밖에 없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