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110화
내가 그냥 말 타고 가자고 해서 우리 일행은 나 빼고 각자 말 타고 갈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못한 말안장에 앉아 있는 건 정말 고역이어서 군에서 60트럭 타고 가는 것보다도 힘든 것 같았다.
이걸 반나절이나… 으~ 이럴 줄 알았으면 곡에서 승마도 좀 연습하고 나올 걸 그랬다.
내가 직접 말을 몰수만 있다면 재미는 있을 것도 같은데 말이다.
그나저나 왕정 그 친구, 사영과 흑주에게 쫄아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곡에서 나올 때 이화에게 단단히 군기를 잡히고 나온 건지 몰라도 내가 있는 동안 정말 말 한마디도 못하고 얌전했다.
소호루에서의 그래도 나름대로 당당했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동정심이란 것이 들기까지 한다.
그의 과거 미성년자 납치 및 강간 미수의 죄상은 당근, 용서받기 어렵겠지만 6년 동안이나 한결 같이 저렇게 지극 정성인데 이화는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걸까?
뭐… 꼭 이화가 부담스러워서라기보다, 저렇게 실제로는 본래 알맹이(영혼)가 있지도 않은 곡주만 바라보고 살게 하는 것도 보기 안쓰럽고… 그렇다고 내가 원판을 대신할 마음도 없고, 그러니까 왕정이나 누구든 괜찮은 남자 있으면 엮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음- 곡에서 내가 아는 젊은 남자라면… 제기,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괜찮은 놈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하나같이 한 칼, 한 주먹, 한 살인하는 인물들뿐이니 원.
물론 조폭 소굴에 조폭들이 득시글거리는 건 당연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덜 범죄적인 성향의 청년 없나?
쳇-! 지루함도 덜 겸해서 한참을 이런 저런 인물들을 떠올려 보았으나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본단의 인물들은 나와 얼굴 마주칠 일이 많으니 서로 민망할 것이고, 역시 일반 주민이나 비화곡 바깥에서 찾아봐야 하나?
그렇게 되면 내가 나서는 자체가 너무 막연하고……
“이봐, 후배. 벌써 한 시진이 넘게 달려왔으니 잠깐 쉬었다 가세, 공자께서 피곤하실 것 같네.”
사영이 혈월에게 외치고는 자기가 먼저 고삐를 당겼고 이어 혈월과 그 수하들도 일제히 말을 멈춰 세웠다.
살수들 교육에 승마술도 있나? 다들 참 멋있고 기민하게 말을 다루는 걸? 특히 혈월은… 가만, 혈월?
그래, 저 친구 정도면 인물도 번듯하고, 비록 직업이 살수라고는 하나 아직 젊으니 일찌감치 은퇴해서 건실한 직업을 갖게 하면… 조금 억지는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떠올린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나은 것 같은걸?
“공자님!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응? 아, 괜찮아요. 잠시 딴 생각 좀 하느라.”
“여기서 잠시만 쉬었다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자께선 본래 말안장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니……”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웬일로 혈월이 하늘같은 대 선배 사영의 말을 끊어 들어왔다.
“말해보게.”
“현재 이 산은 마금산(麻禽山)이라 하는데, 후배가 알기로 이 골짜기에는 꽤 큰 규모의 비적들 산채(山砦)가 있습니다. 일단 산을 벗어나서 쉬는 것이 어떠신지요.”
“흠… 비적이라, 자칫 성가실 수 있겠군. 어쩌시겠습니까, 공자님.”
엉덩이 쑤시고 허리 결리는 내 몸 상태도 상태지만, 새삼 주변을 둘러보니 경관이 매우 좋은 산 속이라 그냥 가기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적떼 정도라면 아무리 떼거지로 몰려와도 우리 팀 전력으로 우습게 격파할 수준일 것이고… 흠, 그러나 비적도 역시 인간들이다. 굳이 만나서 살생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냥 갑시다. 참을 만하니까.”
내 말에 일행은 다시 출발했고 내 엉덩이는 다시 무지 아파 주인아~라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으로 깡으로 버티자. 신수성녀를 만나면 만사 오케이- 고지가 빤히 보이는 곳에서 멈추는 것은 군바리 정신에서 위배된다.
더구나, 더구나… 제기… 내 이럴 줄 알았어.
다시 출발한 지 10분이나 되었을까? 저만치 앞길에 굵은 나무들을 몇 겹으로 쓰러트려 만든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길 옆 수풀에서 네 명의 험상궂은 사내들이 무기를 들고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 때, 몽몽의 때늦은 경고.
[ 왼쪽 등성이 위에 10여 명의 인체가 감지됩니다. 단, 현재 빠른 속도로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소지 무기 중에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활이 다수 측정됩니다. ]
제기, 몽몽의 탐지 거리 밖으로부터 계속 더 몰려들고 있다는 건가? 현재 지형은, 이 외길의 오른쪽은 낭떠러지, 왼쪽은 약간 완만한 경사의 등성이로 이루어져 있다.
일단 양쪽 협공이 아니라 다행이랄까?
“이런… 그냥 강행돌파 할까요? 아니면 먼저 제압할까요.”
말을 급정거시킨 사영이 단순 무식한 전법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긴, 전력에 압도적인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말일 것이다. 저 나무 바리케이트 정도야 사영의 칼질 몇 번에 날아가 버릴 것이고… 하지만 위쪽에서 활이 무수히 쏟아지면 그건 좀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후자. 그러나 일단, 전원 대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쪽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웃음소리가 있었다.
“으하하~! 본 채주의 허락도 없이 마금산을 무상으로 통과하려고 드는 놈들이 아직까지 있었구나!”
설마… 아, 불길해.
“반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재물을 내 놓으면 목숨만 은 살려주마. 으하하~!”
난 으아아~ 저런 처절할 정도로 판에 박은 대사라니.
저 등장하는 태도하며 예전의 식인왕 이상으로 참신함 결여에 유치만발 인물이다.
난 한숨 한 번 푸욱~! 내 쉰 후, 짜증이 배인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사영, 혈월은 두목 생포. 나머지는 두 사람 엄호! 실시!”
“존명!”
간만에 듣는 욕 비슷한 대답과 함께 흑주를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말 등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사영은 말할 것도 없고, 천인군도의 살수들은 강호에서 2-3류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혈월과 그 직속 수하들은 달랐다.
눈부신 속도로 달려 올라가는 그들에게 놀란 비적들이 다급하게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했고… 그 후, 상황 종료까지 딱 5분 걸렸다.
놀란 와중에서도 내게까지 화살이 몇 대 날아온 걸 보면 평소에 훈련은 좀 하는 모양이다.
생긴 것까지 드라마에서 임꺽정에게 두목 자리 빼앗기는 역할의 인물을 닮은 비적 두목을 혈월들이 내 앞으로 질질 끌고 왔다.
“내가 그거 노린 거긴 해도, 어쩌면 정말 너 하나 잡히니까 하나 남지도 않고 다 도망쳐 버리냐?”
“제, 제가 눈이 멀었는지, 대인들을 몰라 뵈었습니 다. 부디 목숨만은……”
“야, 넌 말하지 마.”
“예, 예!”
다른 때라면 붙들어 앉혀 놓고 ‘기왕이면 행인들을 털더라도 비적의 자부심을 가지고 좀더 참신한 대사와 행동을 보이라’고 교육을 시켰으면 좋으련만, 지금은 쓸데없는데 시간을 빼앗겼다는 것에 대한 짜증만 났다.
바리케이트 철거는 사영이 아닌 혈월이 나서서 순식간에 말끔히 처리했지만, 문제는 조금 전 녀석들의 화살 공격에 말이 세 마리나 중상을 입었다는 점이었다.
나야 새털같이 가벼운 몸이라 별 상관없지만 혈월들은 둘씩 한 마리에 몰아 탈 덩치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비적들의 산채에서 말을 보충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저, 마, 말 세 마리만 준비하면 정말 되겠… 억!”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되묻던 비적 두목이 혈월에게 검집으로 뒤통수를 맞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가, 다시 발딱 일어섰다.
군기든 거 보니까, 두목 된 지 얼마 안 된 자인 것 같다.
아직 군기가 살아있는 두목이 생각보다는 빠르게 자기 산채로 달려갔다가 다시 부하들과 말을 이끌고 와 우리에게 바쳤기 때문에 나는 조금 풀어진 기분으로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가다가 얼핏 돌아보니 두목은 애꿎은(?) 부하들을 줘 패고 있었다.
쯧쯧~ 짜식, 그나마 나 같은 지휘관 있는 부대 만나서 전사자가 없는 걸 다행으로나 알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