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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11화


어쨌건, 이제 쉬지 말고 무조건 달리라는 내 명령에 따라 다시 강행군(내 생각에는 나만)이 계속되었다.

엉치뼈에서 발진하여 쳐들어 온 통증이란 적군 놈들은 척추 정도에서 진지를 구축한 채 위로는 어지럼증 유도탄과 간간이 멀미 박격포를 쏘아 댔고, 아래로는 발저림 폭탄을 투하하며 가끔은 치명적인 쥐 핵폭탄을 준비하는 기색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야말로 악으로 버티며 쉬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견디기 어려운 유혹, ‘밥 먹고 가자.’는 의견도 묵살하고 오직 전진만을 지시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이어 달렸을까, 말들도 지쳐 맛이 갈 즈음에 드디어 혈월의 기쁜 기색을 담은 음성이 들려왔다.

“다왔습니다. 저 언덕만 넘으면 바로 ###입니다.”

그렇군, 드디어… 실은 나도 점점 넓어지는 길로 환자들을 실은 마차 같은 것들이 자주 눈에 뜨이는 것을 보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제 강행군 뺑이 치기의 보람을 찾을 때가 왔다.

장하다 진유준~ 용감하다 진유준~ 나는 속으로 자꾸만 그렇게 외쳤다.

오버인데다 아직 이른 건 알지만, 자꾸만 솟아오르는 불안감을 털어 내고 싶은 심정의 발로였다.

우리 일행은 별다른 지시가 없었음에도 언덕 위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말을 멈추었다.

그리 가파른 길을 달려온 건 아니었지만 목적지인 문교촌(雯喬村)은 강 옆의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넓게 펼쳐진 평야지대에 백 채가 넘을 듯한 크고 작은 가옥들로 구성되어 자리한 문교촌과 그 옆을 부드럽게 쓰다듬듯 넘실대며 흐르는 장강의 물줄기를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아름다움마저 간직한 고장의 풍경을 넋을 잃고 내려다보던 우리 일행 중, 사영이 먼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또……?”

그렇다. 문교촌 전경은 물론이고 그 끝, 장강과 만나는 곳의 선창까지 한눈에 보이고 있건만… 신수성녀의 신비선은커녕 그 비슷하게 생긴 것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여기가 맞는 장소이긴 해요?”

내 말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아아- 이럴 수가! 성녀님께서 오셨다기에 천리길을 달려왔건만 이를 어쩐단 말인가!”

지붕도 변변히 없는 낡은 마차에 환자인 듯한 노인을 싣고 우리 근처에 멈춰 서 있던 초라한 행색의 중년 남자가 그렇게 탄식하고는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고 있었다.

새삼 둘러보니 어느 사이 중환자나 그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들어 있었는데 그들의 반응도 한결 같았다.

한 발 늦어서 X됐다…라는 표정들.

“뭐… 맞는 것 같구먼. 게다가 여기서 보이는 저 강줄기 끝까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떠난 지 도 꽤 지났겠는걸?”

내가 의외로 담담하게 중얼거리자 혈월들은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사실, 좀 전까지의 내 심정 같았으면 이렇게 되었을 경우 아래와 같이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야이- 썅! 신수성녀 일정 계산 담당자 누구야! 아니, 곡에 복귀하는데로 월영당 다 죽을 줄 알아. 사영, 댁도 각오해. 대교 아버지고 뭐고… 나? 내 책임? 대빵은 원래 무조건 책임 없는 거야!”

음… 마지막 말은 좀 그랬나? 하여간 무지하게 열 받을 것 같았는데, 내 생각에도 난 지금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아 있다.

뭐, 약간의 허탈감 같은 것은 있지만 그건 예감, 혹은 예상했던 결과를 확인했을 때 느끼는 정도의 크기였다.

“…일단 가보자구. 이 지역의 문제는 전염병이었어. 신수성녀 정도의 여자라면 병세를 어지간히 다스렸다고 해도 뒷일을 확인하는 신중함이 있을 터, 분명히 남겨둔 인원이 있을 거야.”

침착해지니까 머리도 더 잘 돌아가는 것 같다. 간만에 지혜로운 곡주 모드를 보이는 내 모습에 사영도 조금 놀라는 것 같았고 혈월들 중에는 조그맣게 탄성 소리를 내는 이도 있었다.

“과연 그렇군요. 본래의 일행이라면 틀림없이 신수 성녀와 다시 합류할 것이니 그녀를 따라 가는 것이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이 되겠군요.”

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시름 돌렸다는 듯한 태도로 다시 말을 출발시켰다.

이렇게 해서… 잠시 후 우리 는 어쨌든 두 번째이자 마지막 목적지로 생각했던 문교촌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문교촌은 촌이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상당히 큰 규모의 마을이었고 신수성녀라는 특급 미녀 스타가 머물렀었다는 것을 나타내듯 사람도 많았고 매우 활기찬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내 눈에도 이 지방 사람들이 아닌 듯한 차림새가 많았는데, 보통 이 정도로 외지인들이 많다면 무림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법도 하건만 묘하게도 대부분 일반 양민들인 것 같았다.

뭐… 마을 자체가 작지 않은 규모이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자연 친화적인 전원 도시 이미지랄까?

우리 일행이 찾아 든 객점 역시 건물이나 내부가 매우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사영은 신수성녀가 떨구고 (?) 갔을 인물을 찾으러 나갔고 혈월들은 현재 내방 양쪽 방으로 나뉘어 들어가 휴식과 내 호위를 겸하기 시작하는 듯 했다.

오랜 시간 연속으로 말 위에서 시달린 몸을 침상에 누인 나는 고개와 눈동자만을 조금 돌려 객점 창문 너머의 강줄기와 그 너머로 해가 지는 절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혹은 그럴 것이라 여기던 강호행에 긴장해 있던 신경을 어느 정도 풀어놓고 하릴없이 석양을 감사하고 있는 나…

제기- 이놈의 팔자, 걱정한다고 해서 쳐들어 올 놈들이 안 오고, 애써 머리 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어차피 이렇게 흘러가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그냥 강호에 나와 있는 외당과 월영당 집합시키고 부근의 사마외도 인물들 끌어오고 하면 호위는 충분하지 않을까?

약올리듯 만날 만하면 도망가는(?) 신수성녀인지 신기루인지 하는 여자 만나는 건 때려치고 이제라도 대교 일행 수배해서 합류하여 술이나 퍼 마시면서 유유자적 즐기면서 갈까?

사실, 이제껏 운이 좋아 그렇지 내 목숨 하나 챙겨 살기도 불확실한 현실에서 굳이 다른 사람 목숨 생각해서 계속 생고생하며 지낼 필요가 있는 걸까?

이러다 악운이 끝나 덜컥 원판 웬수들 떼거지에 걸리면 나만 손해 아닌가. 솔직히 내가 그렇게 착한 놈이었던가? 남 살리려고 내가 대신 목숨 걸 정도로……?

음… 때론 분노나 어떤 격한 감정보다 허무, 허탈 이런 감정이 더 위험한 거였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막 나가는 생각까지 흘러가고 말았다.

톡! 톡! 톡!

“몽몽, 망망 스크린 기능 좀 쓰자. 우선, 강호행 직 전에 입력한 지도, 비화곡과 이번 목적지 사이의 지리가 특별히 자세하게 첨가된 그 지도… 그리고 월영당에서 제공한 최근 강호 정세 자료를 함께 불러 줘.”

내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으로 천장의 삼분의 일 정도를 덮을 듯한 초대형 지도가 좌악 펼쳐졌다. 길 떠나기 전에 내 업그레이드 된 기억력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면 온갖 자료를 직접 외워버렸을 텐데 불행히도 당시엔 내가 그걸 몰랐던 지라, 주로 월영당에서 제공해 준 지도와 각종 자료의 양이 하도 많은 것에 질려 대충 보는 척하다 말았었다. 물론, 사영의 길 안내와 이 몽몽을 믿었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음… 비화곡에서부터 길 따라 파란 선이 그어져 있는 건 우리가 지금까지 지나온 루트를 표시한 모양이다. 근데 왜 중간 중간 노란 선이 있는 거지? 그리고 저 X 표시 된 건…

[ …지금까지 실제 거쳐온 경로를 분석하여 지도와의 실제상의 오차율이 심한 곳을 구분하여 표시했습니다. X 표시는 지금까지 주인님이 위기상황을 만난 장소를 뜻합니다. ]

“훗-! 짜식, 너 요즘 무지 친절해진 것 같다?”

[ 주인님의 상황 적응력 향상에 따른 사용자 등급의 조정이 있었습니다. 단순 정보의 습득 능력은 이미 저의 정식 사용자 수준에 이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

“기억력이 좋아졌다는 걸 좀 껄끄럽게 표현해 버리는 군. 그래, 그 단순 정보를 내가 추가할 테니 지도 영상에 반영해.”

[ 주인님의 지적능력을 격하하려는 의도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불쾌 하셨다면 정정을…… ]

“됐네, 이 양반아. 그냥 시키는 거나 빨리 처리해.”

[ …예. ]

사용자 등급이 올라가면 이 녀석이 사용자 즉, 날 대하는 태도 자체도 바뀌는 것일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렇다고 표현하긴 어렵지만, 이젠 내 감정적인 면도 많이 의식한다고 할까…? 몽몽은 확실히 처음보다 ‘인간’ 같은 느낌을 많이 주고 있었다. 내가 녀석에게 익숙해져서 그렇게 생각되는 건지도 모르지만… 음, 하여간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지.

나는 지도 위에서 몽몽은 위기 상황까지는 아니라고 여겼는지 빼먹은, 그러나 분명 뭔가 어긋났던 장소들 몇 군데를 마우스로 찍어 가며 추가하도록 했다. 그리 고 나서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본 다음, 누군가 개입하여 수작을 부릴 여지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이 있었던 장소는 ‘삼각형’으로 표시를 바꾸도록 했다.

“각 지점간의 거리를 니가 측정한 실제 거리로 표시해. 그 지점간 우리가 택한 교통 수단의 평균 주행 속도, 그리고 실제로 소요된 시간은 그 옆에 표기하고… 좋아.”

그밖에도 각 지점간의 실제 이동 루트와 정상적이었다면 가능했던 다른 루트를 확인하는 등 몽몽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는 정보를 잔뜩 챙겨 본 후 나는 눈을 떴다. 이번엔 기계인 몽몽이 알 수 없는 영역, 인간으로서의 정보를 추가해서 전체적으로 분석을 해야 할 때다. 그러나 나는 자꾸 술 생각이 먼저 났다. 제기- 심란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행로에 문제가 생기고, 예정보다 다른 진행이 있었던 건, 물론 당시로써는 어쩔 수 없는 상황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몽몽의 자료만으로 봐도, 그게 돌발적인 사건에 의해 불가항력으로 진행된 일들이 아니라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누군가에 의해 유도된 상황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실은… 오래 전부터 웬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런 저런 사건들이 이어지며 매번 신수성녀의 배를 놓치면서도 재수도 없지, 이게 소설 속 상황이라면 작가가 날 미워하나 봐… 등등 속으로 투덜대기만 했던 건, 마음속에서 차츰 커져 가는 어떤 의심을 떨쳐 버리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동안 ‘에이- 설마… 그래 아닐 거야’를 반복했던 건 의심 가는 인물이 정말이지 아니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자님, 다녀왔습니다.”

“…들어와요.”

방안에 들어 온 인물은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과연, 말씀하신 대로 신수성녀의 수하 중 두 명의 의녀가 남아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후… 이제 와서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 진짜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당신이야. 도대체 왜… 왜, 날 속이 고 뒤통수를 치고 있는 거지? 응? 물어보면 대답해 주려오, 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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