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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12화


“두 사람 모두 신수성녀와 합류할 예정이긴 한데, 적어도 내일까지는 환자들 상태를 지켜보고 모레 출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예, 그녀들을 기다렸다가 출발한다면 또 하루를 허비하게 되는데 어쩌시겠습니까.”

짐짓 물어오는 사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사영은 조금 민망해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소인이 불민하여 계속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으니, 곡에 복귀하는데로… 아니, 지금 당장 처벌을 내리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매우 공손하면서도 죄송스러워하는 태도… 이제까지 같았으면 이 능글맞은 아저씨의 군기 잡을 기회로 생각하고 찐하게 한바탕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내가 진실을 모르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이제 이 양반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를 생각하며 굳어진 얼굴로 사영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표정을 풀며 풀썩 웃어버렸다.

“뭐, 할 수 없지. 내일 당장 출발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강구해 볼 테니까 가서 이 지방에서 제일 가는 술이나 몇 병 구해와요.”

그렇게 사영을 내보낸 후 나는 다시 침상에 누워 차분하게 그와 나의 만남 아니 사영이 처음 비화곡을 찾아왔다는 18년 전의 상황까지도 새삼스럽게 되짚어 보았다. 자그마치 18년 동안 비화곡에서 과거를 잊고 살아온 인물… 그런 이가 강호에 나오자마자 자신이 속한 곳의 주인인 나에게 배반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그의 딸들인 대교 자매를 생각해 은연중 그를 장인 대접하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실들이 그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일까? 모든 것을 팽개치고 그가 얻으려고 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일까. 날 죽이려고 들었다면 강호에 나온 후에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상황에서 그가 흑주보다 내게 더 밀접한 일이 많았으므로… 그렇다면 뭐지? 사영이 의도하는 것, 신수성녀를 만나지 못하게 하여 날 계속 위험에 노출된 채 다니도록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지……?

생각에 잠긴 채 얼마가 지났을까,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을 때 사영이 돌아왔다. 그가 객점의 종업원들을 시켜 탁자 위에 주안상을 마련하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그와 비화곡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가지 말고, 거기 앉아요. 간만에 함께 마십시다.”

사영을 자리에 앉힌 후, 나는 쩝,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밤만이라도 맘 편히 지내고 내일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도록 합시다. 자- 들어요.”

내가 조금 웃어 보이며 잔을 채워주자 사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왔고, 나는 그와 잔을 부딪친 후 건배…! 제기… 술은 분명 좋은 술 같은데 왜 이리 쓰게 느껴지는 거지? 후- 역시 술은 암 생각 없이 즐겨야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술자리를 만들면 그 맛이 안 나는 것 같다.

“우리야 그렇다 치고… 대교 일행은 아무 일 없이 목적지로 잘 가고 있는지 모르겠군.”

“아,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번 대교와 장청란의 비무는 전 강호의 화제인 만큼 만약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면 벌써 이곳까지도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그렇겠죠…?”

당연한 얘기고 나도 알고 있었다. 실은 술 마시면서 사영의 생각을 슬쩍 떠보려고 했는데 웬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공연한 질문을 한 셈이다.

“저어… 공자께서 내색을 숨기시나, 실은 심기가 많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수성녀의 수하들을 이용하면 이번에야말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저어 사영의 말을 막았다. 철저히 본색을 숨기고 되려 위로를 해오는 모습을 보니 웬지 정이 떨어지는 느낌… 이 사람 대하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그런 티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지가 않았다.

“오늘밤은 그런 얘기하지 맙시다. 무대가 말대로 솔직히 기분도 좋지 않고… 오늘은 그냥 취해서 잠들고 싶소.”

그렇게 말한 나는 연거퍼 술을 원샷하기 시작했다. 꽤나 독한 술인데다 그렇게 퍼대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있는 사영 앞에서 흐트러진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웃기는 것 같아. 무슨 성인 군자가 될 생각도 없으면서… 새삼 무슨 살생을… 피하겠다고… 이 고생인지 원…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 후후~!”

사영은 뭐라 대꾸하기 어려운지 그저 싱겁게 웃을 뿐이었고, 나는 혼자 꿍시렁거리며 계속해서 빠르게 술잔을 비워댔다. 어느 정도 의도적이었지만 정말로 취기가 올라와 정신이 없어진 나는 결국 사영의 부축을 받아가며 침상에 누워야 했다.

“…에, 거 말야. 당쉰… 딸 농사는.. 전말… 잘 지었어. 대교 마랴… 동생들도 참 괜찮아, 아니, 아니… 나 생각 보단… 욕씸 엄는 노미야… 대교 하나면 돼……”

“…제 여식을 그리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쳇~! 당쉰… 잘해! 대교, 소교… 소령이… 잘해 주고, 미령이 미워하지 말고… 걔도 당신 따리잖아.”

술에 취해 흐릿한 눈이라 정확한 건 아니지만 사영이 웬지 움찔, 하는 기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편히 주무십시오.”

내가 미령이를 언급한 것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있는 듯도 했지만 결국 그는 그렇게 간단하게 인사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분명 나갔…지?

톡! 톡! 톡!

“몽몽… 그런 명령…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다. 나, 술 깨워.”

[알콜 분해 효소 생산을 촉진시키면, 약 2시간 정도 후에 현재 섭취된 알콜의 90% 이상 분해 가능합니다.]

“늦어, 그보다 빨리…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최대한 빠른 방법은 위장과 소장의 활동을 일시 휴지(休止) 시킨 상태에서 체내의 화학성분을 조작, 알콜 분해 효소를 대량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님의 특이 신체는 만약 작업 중 체내 화학성분의 비율이 변동될 경우 매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저로써는 비상조치를 해야 할 만큼 긴급 상황이라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니가… 몰라서 그래… 이건 나… 아니 우리 생존에 직접 관련된… 문제야.”

[…주인님의 판단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사 상태를 유도하겠으니 대비하십시오.]

후… 사용자 등급 올라가니까 좋긴 좋구만, 조금 무리하다 싶은 요구도 막 들어주고 말이야. 음… 으응……?

어… 어?

[다행히 체내 화학성분 비율의 큰 변동 없이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약 13분 20초가 소요되었습니다.]

“어, 그래. 땡큐다 몽몽.”

순간적으로 깜박 졸았다 깨어난 기분인데,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보니 과연 머리 속이 술 마시기 전의 말끔한 상태였다. 어째 속이 좀 거북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정도였다.

“몽몽, 너의 스캔 기능 최대 출력으로 기동시켜서 그 범위 내에 사영이 있나 확인해 봐.”

[…북쪽으로 직선 거리 6.4M. 해당 인물은 바로 옆 방에서 다른 일행 삼 인과 함께 음식물 섭취와 대화를 진행 중입니다.]

“그냥 밥 먹으면서 얘기한다고 그래, 임마. 웬간하면 앞으로는 좀 쉽게 얘기하자고 우리.”

[알겠습니다. 원하신다면 통상 대화체 용어의 비율을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가까우니까 옆방의 대화 정도는 들을 수 있겠지?”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옆에 서서 듣는 것처럼 혈월과 사영의 대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감마선 투시 작동시켜.”

한동안 메뉴를 마우스로 클릭해서 사용하느라 몽몽과의 대화가 많이 줄었었는데 처음에 하던 대로 말로 명령을 내려보니 웬지 이게 느낌이 더 좋군. 하여간, 어디 보자~ 감마선 투시라는 것이 벽을 완전히 꽤 뚫어 볼 정도는 못되고 인체 윤곽을 알아보는 정도여서 나는 얼마간을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관찰한 후에야 대략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왼쪽의 방안에는 세 명의 천인군도 살수들이 대기 중이고 문제의 오른쪽 방에는 사영과 혈월을 포함한 네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두 명은 아래층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듯 했다. 사영과 혈월은 비교적 느긋하게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나머지 살수들은 교대로 식사를 하면서 일부는 차를 마신다는 명분으로 나가서 바깥을 경계하는 상황… 살수라는 직업인(?)들 치고는 경호라는 것에도 개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 그나저나 이 상태라면 별로 주목할 만한 점이 없지? 기껏 사영이 내가 다음 날까지 절대 눈뜨지 못할 정도로 퍼마시고 뻗어버린 것으로 여기게 했는데, 오늘밤 그가 움직임이 없으면 연극(?)한 보람이 없겠는걸?

“할 수 없군. 몽몽, 내게 연결시키지 말고 너 혼자 계속 사영을 감시해. 그리고 사영이 너의 탐지 거리 밖으로 이동하려는 경우, 내게 알려 줘.”

지나칠 정도의 신형, 몽몽표 경계 경보기를 작동시키고 난 후 나는 침상에 걸터앉아 아까 하던 생각을 계속했다.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 내 기억 속의 모든 정보를 동원해도 역시 사영의 배신 동기나 시기를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몇 가지 세워 본 가설 중의 하나는 사영이 비화곡에 들어온 자체가 바로 음모였다는 건데… 이건 언뜻 황당한 발상이긴 하지만 중국인들의 무지막지한 장기 계획력을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꽤 높다.

무협지에서의 예는 잘 생각 안 나지만, 중국 고전 열국지… 였던가? 거기 나오는 고사들을 보면 중국인들이 얼마나 장기 플랜에 강한지를 알 수가 있다. 복수 같은 뜨거운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일을 행하는데도 몇 년, 혹은 몇십 년을 두고 만만디(천천히, 느긋하게) 만만디~ 진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사영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자그마치 18년 동안을 비화곡에 침투해 있었던, 이른 바 ‘고정 간첩’이었다면… 그렇다면 목적은 무엇일까? 원판(지금은 나)의 목숨이 아니라면 비화곡 자체?

음… 그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것이, 본단의 간부급들도 중요 정보의 유통에는 접근이 제한되어 있는데, 1급 거민으로써의 비화곡 생활로 무슨 정보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대교 자매…? 그래, 대교 자매들이 본단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인 사영이 1급 거민으로써의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식 기록에는 그가 당시 막 아내를 잃고 정신적인 공황상태에서 결정한 일이라고 되어 있지만, 과연 그럴까? 그 것도 한두 명도 아니고 네 명 전부를 보내야 했을까?

으으- 제기, 생각하자니 한도 끝도 없군. 이런 식이면 대교와 동생들도 의심 선상에 두어야 한다는 건데… 아- 싫다 싫어.

톡! 톡! 톡!

“흑…주!”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어느새 흑주는 천장에서 내 앞으로 위치를 이동해 있었다.

“…너밖에 없군.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자는.”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갑갑하기만 했던 흑주의 침묵이 오늘은 왠지 믿음직한 느낌을 주니…

“잘 들어, 앞으로 사영… 믿지 마. 그렇다고 그 앞에서 그걸 드러내지 말고. 알겠어?”

여전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흑주.

“…이봐 흑주, 뭐라고 말 좀 해볼래? 가령, 나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던가, 뭐 아무 말이나 한 번 해봐. 진짜 아무 말이나 말이야.”

잠시의 침묵 끝에 나는 먼저 풀썩 웃어 버렸다.

“풋-! 그래, 미안타, 미안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너 편한 대로 행동해.”

나는 조금 과장되게 가보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제기-! 아무리 생각하기 싫은 일들이지만, 대답할 리가 없는 흑주에게 말을 거는 등 딴짓하며 회피할 수만은 없다. 어떻게든 상황 파악에 집중해야만…

“곡…주님. 고민… 몰라… 죄송…”

응…? 뭐야? 환청인 줄 알았다.

“흑주, 너, 지금 뭐라고… 했지?”

“흑주… 말, 잘 못… 죄송…”

나는 잠시 내가 흑주가 된 양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맙소사,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가 말을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가만히 들어보니 전에는 다만 괴이하게 느꼈던 그의 음성… 거칠고 억지로 내는 듯한 이 어감… 설마…?

“너, 혹시… 너희 사부들이 혹시 널… 말을 할 수 없게 했니?”

“…그, 편이… 좋아… 흑주… 불만 없습…니…다.”

끊어질 듯 간신히 이어지는 음성… 흑주에게 있어 말을 한다는 것은 강력한 적과 겨루는 것보다도 힘에 겨운 일인 것 같았다. 이… 썅! 뭐냐, 이건 또. 거두마군과 소팔파파, 그 노마두 부부는 자기 제자의 감정과 음성까지 빼앗았단 말인가?

“너, 너… …제기, 미안하다. 몰랐어.”

“왜… 곡주,님,이 흑주…에,게 미,안,하다…고?”

“제기, 몰라. 하여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되는 대로 그렇게 사과한답시고 지껄였지만, 왜 미안한지를 간단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원판과 비교하면 극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철저히 날 지켜준 이 충성의 화신을 나는 그가 왜 말을 아끼는지조차 따져 보지도 않고 그저 불만을 토하거나 놀리기만 해왔지 않은가. 조금만 생각해도 흑주가 날 24시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도 금방 호위받는 것 자체에만 익숙해져서 의식도 못하고…

“지금은… 달리 할 말이 없다. 미안해, 그리고 고맙다.”

흑주가 그 답지 않게 부끄러움이라도 타기라도 하듯 스륵 천장으로 복귀해 버렸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은 고개를 잔뜩 쳐들고 해야 했다.

나는 다시 침상에 누워 길게 한숨을 몰아냈다. 어쩌자고 열 받고 심란한 일들이 이리 겹치는지 모르겠다. 길지도 않은 기간이었는데도 난 그동안 비화곡주라는 터무니없는 신분과 그에 따른 달콤한 권력의 맛에 취해 주변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걸까?

으아~ 심란, 심란, 심란심란심란, 심란~하다아~!

아아- 아… 아,아…으… 으… 으음… 소리 내어 스트레스 해소용 괴성을 지르지 못하는 건 아쉽다만, 속으로나마 하는 것으로도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것도 같다. 뭐… 정말 최악이긴 하다. 신변은 결코 안전하지 못하고, 믿었던 사영은 배신 때리고 있고, 천하의 흑주마저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모습으로 안타깝게 하고… 제기, 좋아, 좋다구. 까짓 거 기왕에 겪을 나쁜 일들이라면 몰아서 겪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비교하기는 좀 그래도, 나 진유준. 나쁜 일을 더 따따블로 겪은 일도 있잖은가.

처음 자대 배치를 받고, 팔자에 없는 왠 특공대…? 그러며 어이없어 할 때, 난 가자마자 X됐다를 외쳐야 했다. 자대 배치 2주 만에 부대 적응 어쩌고 할 틈도 없이 ‘공수교육’과 ‘전투력 측정’이 연이어 방긋방긋 웃으며 날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게다가 그 와중에 집에서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오고… 훈련지에서는 ‘재수 옴 붙었다’는 말의 어원인 ‘옴’에 걸려 전신에 옴약을 바르고 생활… 훈련 끝나면 어떻게든 자기 직권으로 휴가를 보내 주겠다던 중대장은 ‘응? 그랬었나? 누가 그랬지?’ 소리나 해 대고… 근무지 나가서는 초소에서 잠자던 고참과 더불어 군기 교육대 대기… 뭐, 군대에서 다들 겪음직한 일들이지만 나에게는 자대 배치 받자마자 몇 개월 사이에 몰아서 일어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당시엔 끔찍한 경험들이었지만 그런 화끈한(?) 일들을 먼저 겪어서 그런지 그 이후에는 어지간한 일에는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드는 등 비교적 자대 적응이 순조로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까짓 거 오늘의 이 썰렁한 상황은 앞으로 내가 이 시대에서 버티고 살아남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하자. 어설픈 정신 상태 때문에 스스로 버벅대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자, 진유준.

결국 마음을 다잡는 데 성공한 나는 다시 차분하게 사영과 관련된 사항을 따져 보기 시작했다. 대교까지 용의 선상(?)에 놓아야 한다는 사실은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녀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사영이 꾸민 일에 관련이 있다면 억지로 모른 체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리시키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일 테니 말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어둠 속에서 혼자 머리를 싸매고 있었을까.

나는 지하서고에서 대충 훑어보았던 그 많은 책들의 내용까지 차츰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업그레이드된 내 기억력에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몇 가지 단서를 기억해내고 말았다. 그동안 내가 보고 겪은 일들이지만,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사건들이 그 단서들을 기반으로 놀라울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앞뒤가 맞기 시작했다.

[주인님. 감시 대상, 사영이 이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퍼즐을 거의 다 맞춰가던 나는 몽몽의 경고에 급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영이 방문을 열고 방안을 살피는 기색… 하나~ 둘~ 하나~ 둘~ 박자를 맞추며, 상대가 고수인 만큼 잠든 사람 특유의 느리고도 고른 숨소리까지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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