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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13화


내 잠자는 연기가 그럴 듯했는지, 아니면 특별히 세심하게 내 동정을 살핀 건 아닌 건지 몰라도 곧 문이 닫혔고, 사영은 혈월들에게 내 호위에 대해 다시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는 소리와 함께 사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기색이었다.

이렇게 사방으로 별다른 장애물이 없을 경우, 몽몽의 레이더 망 범위는 사방으로 약 100미터 정도이다. 그 레이더 망의 영역을 망막 스크린 기능으로 투영하도록 했더니, 액션 영화에서 열감지 센서가 달린 망원경 같은 것으로 건물 안을 살피듯 주변의 지형지물과 오가는 사람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밤이 꽤 깊은 시간… 사영 말고는 객점 주변에서 포착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자신이 말한 것처럼 천천히 객점 주위를 돌고 있던 사영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객점 옆의 좁은 골목 안이었다.

설마 순찰 돌다가 으슥한 곳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사영의 형상이 한순간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목표 인물이 스캔 정보의 육안 전환이 어려운 스피드로 순간 이동했습니다. 이동 경로를 재현할 수는 있지만 이미 저의 스캔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래? 흠, 그랬다 이거지…? 오늘이 처음인지, 아니면 허구헌날 나 잘 때마다 이렇게 보고되지 않은 밤 외출을 했던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오늘은 잘 나가 주셨소, 사영.

이 틈에 나도 나름대로의 대책을 좀 세워야겠는데… 어디 보자, 여장할 때 쓰던 옷가지며 화장품 같은 것이 들었던 상자에 그 비상용 물건도 잘 있으려나?

음… 있군. 보관 상태도 나쁘지 않은 듯하여 다행이다. 생각해 보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 상자 채 잃어버릴 뻔한 일도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흑주가 잘 챙겨주었던 것이다. 흑주 녀석에게 새삼 더 고마운 마음이 든다.

좋아, 불꽃놀이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고 돈이야 애초부터 넉넉하게 있었다. 이 정도를 완벽한 준비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잘만 진행되면 사영이든 누구든 내 쪽에서 뒤통수를 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잘 안되면 골치 아픈 상황으로 치닫겠지만… 에구, 현재 다른 묘안도 없는데 일단 이걸로 그냥 밀고 나가자.

다음 날 오전.

나는 객점의 침상에 아파서 골골하는 모습으로 누운 채 신수성녀를 수행하는 의녀라는 여자의 방문을 받았다. 내가 사영을 통해 전달한 말 때문인지 의녀는 상당히 신중한 태도로 날 진맥했다.

“이, 이럴 수가… 정말 저희 아가씨 외에 이런 희귀한 병자가 또 있을 줄이야.”

꽤 오랜 진맥 끝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고, 나는 계획대로 짐짓 불쌍한 얼굴을 꾸미며 힘없이 대꾸해 주었다.

“벌써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어야 할 몸이었소만… 다행히 몇 년 전 천수성자라 불리는 귀인을 만나 모진 목숨을 잇고 있었습니다.”

내가 천수성자를 언급하자, 의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오래 전에 실종되신 그분을 공자께서 만나셨다니 그런 기연이……”

있을 턱이 있나. 신수성녀의 사부인 천수성자라는 명의가 10여 년 전에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고 알려져 있어서 그냥 갖다 붙여 본 거다.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의 내 몸이 당장 꼴깍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타고난 허약 체질에다 오랜 지병에 시달린 것은 틀림이 없는 상황.

거기다 그 병과 체질이 신수성녀와 유사… 그런 상황인데도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가 실종된 이후 신수성녀가 애타게 찾고 있다는 그녀의 사부 천수성자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면……

“알겠습니다. 한시바삐 제가 공자님을 아가씨께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충 예상했던 반응이었고, 남아있던 두 명의 의녀가 다 오늘 떠날 수는 없다 하여 날 진맥하러 왔던 의녀만이 먼저 우리와 함께 출발하게 된 것도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새로 일행이 된 이 20대 초반 의녀의 이름은 ‘홍초명’이라고 했다. 신수성녀의 측근임을 강조하듯 상당한 미모인 홍초명을 옆에 앉히고 안내를 받으며 사영은 신나게 마차를 몰았다. 그녀가 말한 신수성녀와의 도킹 지점은 현재 속도로 약 이틀 정도였다. 신수성녀의 배가 출발한 시간은 꽤 되었지만 문교촌 이후 신수성녀는 좀 돌아가는 수로를 택할 예정이기 때문에 그 정도만 가면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 판단에 의하면 현재 상황에서 예정대로 신수성녀를 만나고 어쩌고 하는 건 이미 물 건너갔고, 중요한 건 사영이 언제 본색을 밝히느냐 하는 것인데… 사영이 그 낌새를 드러낸 것은 우리가 문교촌을 나선 후 반나절 정도가 지난 후였다.

“저… 지도대로라면, 현재의 길로 계속 가는 것이 바른 길인데 왜 돌아서 가자고 하시는 것인지……”

오후에 만난 갈림길에서 홍초명이 의문을 표하자, 사영은 마차에서 얼굴을 내민 나에게 슬쩍 눈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면 안양성(安養城)을 지나야만 하는데… 거긴 최근 비화곡의 곡주인 극악서생 진유준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자칫하면 강호의 분쟁에 말려들 우려가 있어 그렇습니다.”

당근 그 극악서생은 여기 있지만, 사영의 말은 거기가 얼마 전 내 명령에 따라 월영당이 극악서생 떴다고 소문을 퍼뜨린 동네 중의 하나라는 의미일 것이다.

“어머! 저도 소문은 들었어요. 평소엔 그 소굴에서 나오지 않지만 일단 강호에 한 번 등장하면 반드시 무서운 혈풍을 일으킨다는 그 희대의 악인을 말하는 거로군요. 듣자니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 소녀들에게까지 마수를 뻗히는 파렴치한자라고 하던데 그런 인간 말종을 왜 강호의 호걸들이 아직까지 처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눈살을 찌푸리며 하는 홍초명의 말… 진짜 나에 대해 말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쬐~애금 불쾌하군. 하지만 뭐 그런 거야 그냥 그렇다 치자. 문제는 현재 정말 그 안양성이라는 동네가 소문에 의해 원판의 원수들이 몰려와 있는 위험한 동네라 해도 지금까지처럼 굳이 피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요점은 바로 홍초명의 존재… 우리에겐 지금 환자를 수송하는 신수성녀의 측근이라는 훌륭한 위장도구(?)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또 다른 길로 가자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사영이 생각하는 배신 때릴 시기와 장소가 가까웠다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오히려 순순히 사영의 의견에 동의했다.
사영이 제시한 루트로 이동을 시작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자 우리 일행은 척 보기에도 꽤나 험한 계곡으로 접어들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주변 지형 때문에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는데도 웬지 음침한 숲길이 한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중간에 가끔씩 걱정스런 음성으로 제대로 된 길이냐고 물을 때마다 사영은 이게 지름길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다가 진짜 시간상으로도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우리가 도착한 곳은 꽤나 특이한 장소였다. 사실 나의 꽤나…라는 담담한 표현은 적절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곳은… 온갖 기화(奇化)가 만발하여 서로가 그 자태를 뽐내는 아름다운 들판이었다. 저녁 노을이 아직 머물고 있는 사방 2-3킬로 정도가 온통 그런 아름다운 꽃들뿐이었고 그 사이를 노니는 알록달록한 나비 떼들, 그리고 정신이 몽롱할 정도의 달착지근한 향기… 게다가 짧은 들판이 끝나는 사방으로는 마치 칼로 베어 내기라도 한 듯한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무슨 거대한 식물원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꽃이 만발한 들판 자체가 뭐 그리 특이하겠냐마는… 문제는 현재 계절이 아직 찬바람 씽씽 부는 늦겨울이라는 점이다. 아까 계곡 입구 정도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과 얼음이 자주 눈에 띄었었는데 오히려 몇 시간 동안 계곡 깊숙이 들어 온 이 곳은 눈은커녕 현란할 정도의 꽃밭이 펼쳐져 있고 그에 어울리는 따듯한 기온이 느껴지니 일행이 다들 멍하니 제자리에 붙박여있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오는 동안 계속 이제나저제나 특수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있었던 나지만 역시 다소 놀라서 약간 주저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최소 20년 이상 전에 형성된 휴화산(休火山)으로 추정됩니다. 상세한 지질 분석과 화산 활동 재개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소 60분의 조사 과정이 필요합니다.]

흠… 무협지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런 ‘신비로운 계곡’은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신비로운’이란 말로 떼우거나 좀 근거를 든다 싶으면 과거에 화산(火山)이 있던 자리라 아직도 주변에 열기가 남다르다… 정도로 설명하곤 하던데 여기가 그런 장소란 말인가? 그리고 다시 찬찬히 사방을 살펴보아도 깎아지른 암벽 때문에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이 신비한 장소와의 정상적인 연결점은 조금 전 우리가 통과해 나온 숲길밖에 없는 것 같았다. 흠, 어쨌거나 계절에 맞지 않는 꽃밭… 꽃이라, 어쩐지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의 해답 하나에 가까이 다가선 기분이 드는 걸?

“거기 있는 것이 누구냐!”

별안간 버럭 고함을 지른 것은 혈월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과연 20-30미터 정도 앞의 꽃밭 속에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혈월이 대뜸 정체를 밝히라고 소리친 건 물론 어제 밤 사영이 없을 때 내게 들은 말이 있어서 이기도 했겠지만, 나타난 상대가 워낙에 수상한 차림새이기도 했다. 두 눈만이 드러난 복면은 흑주나 전의 혈월들과 마찬가지였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복면과 전신 복장의 색이었다. 아주 어두운 붉은 빛깔이랄까? 그냥 붉은 색보다 더 피 빛에 가까운 그런 색감으로 전신을 감고 있는 것이다.

“정체를 밝혀라, 그대!”

기분 탓일까…? 다시 고함을 지르는 혈월의 음성이 어쩐지 조금 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혈월 정도의 인물이 그저 말없이 서 있는 상대에게 기가 죽었다…? 어디 그럼 사영은? 흠… 저 혈의(血衣) 복면인을 지긋이 노려보는 폼이 그리 친한 사이 같지는 않지만, 내 예상대로 그리 놀라거나 의심을 품은 표정 같은 건 아니었다.

“우리가 길을 잃어 이런 곳으로 들어온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여긴 어디지?”

내가 모른 척 묻자 사영은 혈의인에게 향해 있는 시선을 내게 돌리지도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곳은 과거… 꽃이 피는 순간 지는 장소…라고 불렸던 곳입니다.”

쳇-! 역시 그거였나?

“그럼, 오늘이 바로 하늘이 제자리에 선 날이겠군.”

내 퉁명스런 대꾸에 사영은 비로소 놀란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나는 사영에게 피식 한 번 웃어준 다음 복면 때문에 여전히 표정이 보이지 않는 혈의인을 향해 말했다.

“이미 구면이니 새삼 소개는 필요 없을 것 같군. 소림 성승… 아니, 혈의문주(血意門主)라고 불러 드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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