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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15화


  • 115 –

“잠깐, 시작하기 전에 정리 좀 합시다.”

불쑥 튀어나온 내 말에 혈의승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일단, 다행이다.

“거기 너,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연극하지 말고 그만 내려와. 거슬리니까 네 편으로 가라고.”

내 퉁명스러운 말에 그제까지 얌전히 마차에 앉아있던 신수성녀의 의녀… 아니 그 신분으로 가장하고 있던 홍초명이 흠칫 안색을 굳히더니 곧 쓴웃음을 지으며 마차에서 내려 사영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으며 매우 정중하게 사영에게 상체를 숙였다.

훗-! 지금 내 컨디션이면 주관식 시험을 찍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물론 저 여자도 혈의문 사람으로 생각한 건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추리였다. 아무래도 사영이 진짜 신수성녀의 의녀를 대동하고 일을 진행했을 것 같지는 않았고, 문교촌에서 또 신수성녀를 놓친 상황에서 내가 엉뚱하게 일정을 변경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저런 확실한 길 안내자를 준비해 놓았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혈월들은 왕소설과의 돌발 사태에 의해 합류한 인물들이니 일단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만약 혈월까지 혈의문이면 난 정말 끝장, 짤 없는 죽음이다. 집에서 찐한 된장국 끓여 놓고 날 기다리는 가족들과의 상봉은 뜬구름이 되고, 우리 이쁜 대교와도 이대로 영영 쫑인 것이다.

“혈의문주 그리고 사영, 당신들이 날 노린 이유는 더 따지고 싶지도 않소. 헌데… 과연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함정에 제 발로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다시 스윽 팔짱을 끼는 혈의승. 그는 대뜸 달려들 생각이 없다는 뜻인 것 같아 안심하며 사영의 반응을 보았다.

“…당신은 내 눈을 피해 다른 조치를 취할 틈이 없었소. 대체 무슨 꿍꿍이로 큰소리를 치는 지 모르겠구려.”

“흥-! 사영, 당신은 비화곡의 춘전 체계를 너무 단순하게 여기는 것 같군. 내가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화곡주만이 사용하는 춘전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걸 생각해 보지 않았나?”

“비화곡주만의 춘전…? 훗..! 그 것도 염두에 두고 본 문의 도객들이 일반인을 가장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소이다. 더구나 만약 비화곡을 나서기 전부터 준비를 했다면 예정에 없던 비인사기의 습격을 받아 곡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움직임이 있었을 터, 공연한 말로 수작을 부리지 마시오.”

“공연한 수작이 아닐 것이다. 일호.”

끼어 든 것은 혈의승이었다. 혈의문의 살수들은 보통 숫자로 1호, 2호, 3호… 그렇게 통한다고 했고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막상 직접 들으니까 좀 이상하다. 무슨 독수리 오형제도 아니고…

“뭔가 대책을 세웠다면 문교촌에서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일호 너나 도객들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지금 저 어린것은 구원자들이 달려올 시간을 벌고자 말을 늘이고 있다.”

쳇-! 두목답게 눈치 한 번 빨라 좋다.

“허나… 너의 수하들에게는 결국 자신들 주인의 주검을 거두어 돌아갈 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너의 수하들이 이 낙화곡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시간이면 나는 열 번이라도 너의 목을 딸 수 있다.”

“그렇게 말하니까 이제 조금 악당답소이다, 혈의문주. 어디 그렇게 되나 봅시다.”

코웃음과 함께 큰소리를 탕탕 쳤지만 등으로는 식은땀이 비질거리고 흐른다. 월영당이든 어디든 내가 객점에 남긴 춘전을 발견하긴 했을까? 아니 그 전에 혈월을 시켜 우리가 떠난 후에 공중으로 쏘아지도록 객점 지붕에 장치해 놓은 불꽃 신호탄이 제대로 동작은 했을까? 그 것이 계획대로 진행이 되었더라도, 혈월들과 흑주가 과연 저 혈의승과 사영을 상대로 구원대가 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을까? 으… 막상 상황이 시작되니까 다리가 후달릴 지경이다. 목… 내 목을 따겠다고?

“자… 이제 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되었다는 혈의승의 말이 내 귀에는 ‘목 따러 가세~ 목 따러 가세~ 우리도 한 번~ 목 따러 가세~’ 하는 새목따기 운동(?) 노래 가락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흑주는 벌써부터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말에서 내린 혈월들도 우르르 몰려와 나와 혈의승 사이에 포진했다. 흑주가 사영을, 혈월들이 혈의승을 상대하면 되려나? 아님 그 반대로…? 제기, 어느 쪽도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결정적인 문제는 저 혈의승의 무공이다. 본색을 드러내고 공력을 감출 생각을 하지 않는 지금, 저 지나치게 정정한 노인네의 내공 수치 그래프는 이미 신기록을 갱신한 상태이다. 지하 성지의 지킴이 아수라 백작이라면 몰라도 혈월들이 아무리 떼거지로 검진을 펼쳐도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으~ 구원 병력은 아직 나타날 기미도 없고…

서서히 다가오는 혈의승과 사영을 노려보며, 난 나도 모르게 톡톡톡 몽몽을 두드렸다.

“빌어먹을… 몽몽, 혹시 너 자폭 기능은 없냐?”

[…극비 정보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자체 소멸 기능은 있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나만 얌전히 당하기는 싫다…라는 악 받친 생각을 한 것이었는데 그것도 텄군. 생각나는 최후의 한 수가 또 있긴 한데 과연 혈의승이나 사영 같은 고수에게 통할까…?

우쒸~! 어쨌든 하는 데까지는 해보자. 이건 분명히 전투상황이고 내가 지휘관이다. 전력이 달린다고 손가락만 빨며 구경하고 있을 수는 없지.

“혈월이하 천인군도의 제군들, 그리고 흑주! 지금부터 함께 검진을 펼친다.”

“흑주와 혈월들은 같은 출신이고 흑주도 그들의 검진을 알고 있다. 흑주가 낀 검진과 그렇지 않은 검진은 당연히 천지차이 일 것이다. 문제는 흑주, 저 친구의 태도인데… 음, 좋아. 어차피 자기 혼자 사영이나 혈의 승 누구라도 완전히 제압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지 흑주는 군말 없이 내 곁을 떠나 혈월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좋아, 흑주를 현관으로 만수일검진. 거봉!”

흑주를 중심으로 만수일검진이란 명칭의 검진을 짠다는 얘긴데, 거봉이란 말은 말 그대로 검 끝을 들어 세워 보인다는 의미로써, 이 시대의 거의 모든 진이 준비과정에 저 구령을 사용한다. 어쨌거나 내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검진을 구성하는 걸 보니까, 강호에 나오긴 전 비화곡에서 머리 터지게 공부했던 보람을 느낀다.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는 무공 연구보다는 전술이나 진법 연구가 더 재밌고 쉬워서 그랐던 거지 만 서도…

“만수일검! 천인군도 특유의 진법이긴 하나 비화곡 주의 그림자가 중심이 되었다면… 문주님, 제가 먼저 견식해 보겠습니다.”

우리측의 움직임을 보고 있던 사영이 그렇게 말하면서 혈의 승으로부터 떨어져 옆으로 이동한다. 빌어먹을…! 저 인간이 또 초를 치네? 만수일검진은 다수의 인원이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머릿수 많기로 유명하지만 각각의 능력은 다른 유명 살수단체에 처지는 천인군도의 살수들이 강력한 고수를 해치우기 위해 고안된 검진이다. 발상은 좀 불쌍하지만 진법을 만든 이의 재능은 상당했는지, 이론상으로는 목표 대상에 집중되는 공격력은 진을 구성한 인원의 능력을 단순히 더한 것의 2.6배 정도이다.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의 무대포’식의 공격이라고 할까? 이 검진의 약점은 구성 인원이 모조리 공격에 집중, 공격 시 측면이나 후미에서 다른 공격을 받으면 X 된다는 점이다.

본래는 한 명 상대하는 거라고 해도 흑주가 구심점인 이상 혈의 승과 사영을 동시에 밀어붙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영이 저렇게 혈의 승과 멀리 떨어져 만수일검진을 상대하게 되면 곤란하다. 검진의 영향력 바깥에 있던 혈의 승이 검진의 옆구리를 찌르거나 뒤에서 똥침(?) 놓으면 당장에 진 자체가 아작나게 되는 것이다.

“…흑주, 혈월 이수일정. 잔여 인원 유하검진 거봉.”

변경된 내 명령에 다시 재빨리 검진이 변경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흑주와 혈월은 그냥 이인 합공이고 나 머지가 방어형 검진으로 보조한다는 개념이다. 이 것도 모양새는 나쁘지 않지만 결국 저 빌어먹을 사영 때문에 전력이 두 방향으로 분산된 형국이다.

[주인님, 현 위치로부터 약 31.8 미터 지점에 3인의 인체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이런 제기, 그런 건 진작에 말을 했어야지…라고 몽몽에게 투덜거리려는 순간. 사영이 무서운 기세로 우리측에 달려들고 있었다.

“발진-!”

나의 출격 명령과 동시에 마주 달려나가는 흑주와 혈월의 검이 각각 사영의 상단과 하단으로 검광을 뿌리기 시작했다. 사영의 상체가 아주 살짝 숙여지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 그의 발이 땅을 차고 뒤쪽 허공으로 향해 있었다. 앞으로 달려오며 슬라이딩하는 자세로 공중에 뜬 사영의 몸과 검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흑주와 혈월의 검을 바깥쪽으로 밀어 내 버린다. 회전과 돌격의 기세를 그대로 살린 사영이 흑주와 혈월 두 사람의 사이를 뚫고 나아갔다.

“사, 산진!”

내 입에서 반사적으로 명령이 터져 나온 것도, 그 명령에 따라 천인군도 살수 5인이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져 사영의 검을 피한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선두의 고수들을 연수합공을 뚫고 단숨에 후위의 하수들을 노린, 사영의 허를 찌르는 공격을 와해시킨 나의 재빠르고 적절했으며 멋진 지휘…는 거기까지였다.

“뭐 하는 거야! 썅! 빨리 진 정비 못해?”

다급해지니까, 형식이고 멋이고 다 팽개친, 부대에서의 진하사 모드로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어쨌거나 그런 것이 효과는 더 있어서 당황한 기색이던 천인군도의 인원들이 재빨리 유하검진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 있었다. 뜻밖에도 단숨에 진을 통과한 사영이 내 쪽을 향해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을 통과한 사영의 현 위치는 우리 측 누구보다 나하고 가까운 상태이다.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사영이 만약 이대로 날 공격하면 끝장인… 음, 역시 흑주가 그런 판단엔 가장 빠르다. 먼저 암기를 날려 사영이 피하는 사이 재빨리 달려와 다시 사영과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사영이 흑주와 혈월의 합공과 진 자체를 단숨에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흑주와 혈월들 간의 호흡이 맞지 않은 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일대일이 되어 버린 지금 흑주와 사영의 전력은 일단 호각지세… 혈월들은 새삼 분발하는 표정으로 입을 앙 다문 채 검진을 유지하며 나와 혈의 승 사이로 이동해 있었다.

제기, 그림은 괜찮았었는데… 항상 혼자 호위 활동만을 해온 흑주가 갑자기 검진의 구성원이 되는 건 무리였나? 순발력 있는 지휘로 아군의 전력 손실을 막은 기분을 즐길 틈도 없이 나는 혈의 승과 눈싸움을 시작했다. 좀 전의 사영은 그렇다 치고라도, 같은 시기에 저 무서운 노인네가 검진 자체를 무시한 채 날 공격했더라면 당근, 난 지금 이렇게 서있지도 못할 것이다. 사실 난 그 장구한 세월에 걸친 공작으로 여기까지 유인해 온 나를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해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으로 지휘에만 몰두했었다. 과연 저 노인네는 틈을 보아 날 공격하지 않기는 했지만, 이제 보니 사영과 함께 혈월들을 치는 것조차도 생각하지 않은 듯 하다.

쳇~! 혈의 승, 저 노인네의 여유로운 태도는 천천히 흑주와 혈월들을 정리하고 혼자 남은 내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겠다는… 게다가 설사 먼저 나선 사영이 우리측에 깨지더라도 자기 혼자서 모두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 같다. 빌어먹을-!

[주인님, 새로 스캔된 3인에 대해 아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아, 맞다. 저 꽃 밭 속에 세 명 더 숨어 있다고 했지?

하긴… 세 명 아니라 수십 명의 혈의문 살수가 대기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결국… 이래저래, 현재 우리 전력으로는 아무리 발악을 해도 승산이 없다는 건가?

[ 3인은 모두 신체 에너지 통로가 강제 폐쇄된… 혈도를 제압 당해 신체의 자유를 잃은 상태입니다. ]

응…? 뭔 소리야? 혈의문 살수들이 매복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 정밀 스캔 결과에 의하면, 3인은 주인님과 장기간 접촉이 있었던 이들의 데이터와 90% 이상 일치합니다. 3인의 이름은…… ]

몽몽이 말해주는 이름들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순간적으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뭐냐, 그 아이들이 왜… 어째서 여기에 있다는 거지? 혈의승 이 빌어먹을 인간아.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아이들까지 끌어들인 거지? 응?

지금까지와는 다른, 보다 격렬한 감정에 쌓인 채 노려본 혈의승의 복면 사이에 자리한 두 눈… 꽤 먼 거리라 뚜렷이 보이지 않고 있는데도 어쩐지 그 눈에 비웃음이 담겨져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차츰 분노 이상으로 넘실대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 내 귓속으로 날카로운 금속성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고 집요하게 흑주의 검은 사영을 향해 소나기처럼 검광을 뿌리고 있었다.

흑주의 거센 공격에 어느 사이 혈의승의 근처에까지 밀려 와 있는 사영… 그의 주춤대는 뒷걸음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건… 이건… 그랬…던 건가……?

끝내 중심을 잃고 비틀대는 사영을 향해 흑주의 검이 사냥감에게 달려드는 독사처럼 찔러 들어갔고, 이어 사영의 몸이 거세게 뒤로 퉁겨져 나가고 있었다.

“안돼! 위험해!”

다급한 나의 외침은 조금 늦었다. 이미 사영의 검은 혈의승을 향해 번득이고 있었고, 아무런 대비도 없이 서 있던 혈의승의 목 줄기를 사영의 검이 눈부신 속도로 갈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혈의승은 검붉은 잔상만을 허공에 남겼을 뿐, 이미 거기에 없었다.

“으흑-!”

억눌린 신음소리와 함께 사영은 땅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뱉아내면서도 그는 검을 지팡이 삼아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영은 자신에 이어 달려든 흑주의 공격도 여유 있게 방어하고 있는 혈의승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결국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노 괴물은… 아직도 내 능력 밖이었던 건가?”

사영은 자신에게 다가서고 있는 나에게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가슴, 심장 조금 아래쪽의 옷이 사람 손바닥 하나 정도 크기로 찢겨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입으로는 피를 토했으면서도 정작 상처에서는 피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혈의승의 장력에 내상을 입은 모양이다.

“…곡주님. 조금 전 내게 외쳐 경고한 것은… 저 노 괴물이 이미 내 속내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습니까?”

“그래요. 당신의 기습은… 실패였어요.”

“그렇군요. 곡주님을 배신하고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도모했던 기회였는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사영은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탄식했고 그때, 가소롭다는 듯한 혈의승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흑주는 역부족을 실감했는지 이미 검을 거두고 내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

“차라리, 차라리 어떻게 할 걸 그랬다는 뜻이냐, 일호. 아니… 배신자 사영. 저 어린것과 처음부터 함께 일을 도모했으면 날 속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느냐? 어리석도다…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내 손바닥 위일 뿐이다.”

쳇-! 잘도 지껄이는 군.

“내 기습이 실패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이라 할지라도 나와 여기 있는 모두를 그렇게 간단히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니 오늘 당신도 뜻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영은 비장한 음성으로 그렇게 외쳤지만, 혈의승 보다 내가 먼저 사영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사영… 당신은 이제 물러나서 상처나 돌보고 있어요.”

“부상은 다행히 깊지 않으니 염려 마십시오. 곡주님께서 경고해 주신 덕입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내 경고를 듣고 혈의승의 반격에 대비해 치명상을 면했다는 건가? 그건 분명히 칭찬할 만한 순발력이긴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 것이 아니다.

“부상 때문이 아니야. 당신이 계속 나서면… 저 미친 인간이 아이들을 해칠지도 모르니까.”

“아이들…? 서, 설마……?”

경악으로 커진 사영의 눈이 향한 꽃밭의 한 지점에 일찌감치 싸움터에서 물러나 있던 홍초명이 서 있었다.

꽃밭 속에 그 전에 이미 간단한 기관장치가 만들어져 있었는지, 홍초명이 몸을 숙여 무언가 조작하는 듯 하자 그녀의 뒤쪽으로 세 개의 기둥이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둥에는 각각 한 명의 소녀들이 묶여져 있었다. 그 동안 시간이 흘러 상당히 어두워진 탓에 내 눈에는 소녀들의 얼굴이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물론 그녀들을 알고 있었다.

왼쪽부터 소교, 소령, 미령… 대교의 동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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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때 그들은……?

     - 크리스마스 & 신년 특선...이라고 주장하는 외전(外 傳) -


     1. 진유준 본인의 경우.

극악기원후(極惡起元後) 元年. 12月. 12日.

아아- 심심하다.
할 것 없고, 따분하고 그래서 하품 나고 괜히 늘어 지고 결국엔 짜증만이 지겹게 전신에 끈적인다.

“…곡주님, 백화주가 물리셨다면 요전에 야후장로와 나누셨던 홍포도주(紅葡萄酒)는 어떨까요?”

“응? 술…? 그러…던 가.”

최근 들어 계속 머릿속의 나사가 뭉텅이로 빠진 표 정인 채 하루 웬 종일 침상에서 꿈틀대던(?) 나이긴 했지만, 그 좋아하는 술을 준대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소령이와 미령이는 저희들끼리 더욱 걱정스런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제기, 지하성지로부터 대교를 보낸 후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실제로는 한 달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내게는 마치 1년, 아니 몇 년이라도 지난 기분이 들었다.
본래 별로 하는 일도 없었던 놈이니 새삼 일손이 안 잡힌다고 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지만, 요즘 나는 대 교의 호위대로부터 정기적으로 오는 보고서를 읽는 것 외에는 정말이지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무공 연구 분석…? 강호 정세와 화천루 공략법 연구…? 가경촌 놀러가기…? 술 마시기…? 다 소용없었다.
처음 한 때, 애써 마음을 다잡고 무공을 연구한다거나 화천루를 비롯한 정파들 상대로 써먹을 전략전술 짜는데 노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가지 생각이 떠오르곤 했고 그 즉시 집중력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만약 대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다른 생각은 올 스톱되고 난 ‘워메~ 워째쓰까나~’를 중얼거리며 대교에게 닥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한 온갖 방정맞은 상상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해야 했던 것이다.

“곡주님……?”

“으,응?”

쌓인 스트레스를 이번엔 애꿎은 침상을 머리로 들이 받으며 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사이 소교도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주안상이 마련되었습니다. 안주가 식기 전에 드시면 좋을 듯합니다.”

훗-! 그 동안 가끔씩 맛이 간 행동을 하는 내 패턴에 많이 익숙해졌는지 그리 놀라지 않는 표정이로군. 어쨌거나 주안상… 술… 그래, 그나마 유일한 도피처라 고 할 수 있는 술이나 퍼마시고 자야겠다.

“후후…! 전에 야후 장로께서는 이 홍포도주와 오량 주(五糧酒)의 유혹에 져서 스스로 고집을 꺾으신 적이 있었죠.”

미령이가 옆에서 생글거리며 말을 걸어왔지만 난 그냥 피식 싱겁게 웃어주고는 말없이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제기, 이렇게 좋은 술인데 웬지 맛이 안 난다. 대교가 있을 때 마시던 그 술맛이…..!
에효~! 인간 진유준, 운도 지지리 없지. 좀 평범한 상황에서 무난하게 그런 애를 만나면 어디 덧나나? 좋아하는 계집애에게 칼 들려 보내 쌈박질이나 시켜야 한다니, 이게 뭐야, 이게.

“우이쒸~! 오늘은 너도 한잔할래?”

응…? 무심결에 소령에게 잔을 내밀었더니 녀석이 슬며시 맞은편 자리에 앉네? 지난번에 그 문제의 ‘백 일취 사건’ 이후로는 다시 나와 술자리를 갖지 않겠다고 버티던 녀석이었는데 웬일이지?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평소라면 세 자매 중 한 명만이 남아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세 명 다 방에서 게기고 있군. 아직 별 말은 없지만 가끔씩 배시시 쪼개며 술잔을 비우는 소령이, 내가 시큰둥하니 대꾸에 성의가 없어도 옆에 달라붙어 앉아 계속 조잘대는 미령이, 현재 가장 큰 언니이면서 술 따르는 역할을 자처한 채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소교……
이 녀석들 이제 보니 연합으로 날 위로해 주려고 오늘 아예 날잡은 건가? …쳇…! 웬지 기분이 좀 그렇군.

“…좋아, 까짓 거. 오늘은 아예 우리 넷이서 함께 마시자.”

“곡주님. 소녀는 오늘 담당이라… 아, 알겠습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던 소교는 눈치 빠르게 내 표정을 살피고는 얌전히 내가 따라 주는 술을 받는다. 갑자기 기분이 확 바뀔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소령이와 건배하고 미령이의 수다에도 맞장구를 쳐주기 시작했다. 나보다 어린애들이 지들 친언니 걱정도 덮고 오히려 날 위로해 주려 애쓴다는 걸 생각하니 새삼 자매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어, 소령이 너 그거 몇 잔 째야. 나보다 빨리 마시면 안 되는 거 알지?”

“명심하겠습니다. 곡주님. 헌데… 술이 다 떨어졌습니다.”

“빨라서 좋다. 더 가져와. 그리고 미령이 넌 아까부터 안주 가지고 뭔 장난이냐?”

백과소계(白果燒鷄)라고 했던가? 통으로 그릇에 담겨져 있던 닭의 양발을 장난감처럼 잡고 인형쇼를 벌이고 있던 미령이가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소교 너도 꽤 하는구나. 한 잔 더 받아라.”

“예, 그럼 한 잔만 더……”

한 잔만 더…? 너 그 말 벌써 다섯 번째 하는 거 아냐?

“에… 그동안 내가 곡의 대소사에도 너무 소흘했던 것 같은데 뭐 특별한 일 미뤄진 거 있었니?”

기분 전환도 좋지만 이 ‘말술 자매’들과 같은 속도로 대작하다간 백일취 사건 때 못지 않은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어서 그냥 꺼내 본 말이었다.

취한 소교는 아직 어떤지 몰라도 취한 소령이는 상당히 불안한 아이다. 게다가 지금 벌써부터 장난을 치며 은근히 스킨쉽을 계속하는 막내 미령이, 얘가 가장 위험한 타입이다. 잘못하면… 당한다(?). 아침에 눈뜨고 나서 눈물로 후회하는 일 없도록 정신차리자 진유준.

“곡주님께서 급히 재가하셔야 일은 없었습니다. 아, 내당에서 요청했던 일이 있습니다만 그 것도 춘분까지는 아직 시일이 남아있으니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춘분…? 아, 맞다. 그걸 깜박하고 있었네? 전에 그와 관련하여 보고를 받고 조금 알아 본 일이 있었는데도 대교 일로 침체된 기분에 그냥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중국의 ‘춘분’은 다름 아닌 ‘설날’을 말하는 거다. 중국 풍습으로는 랍팔(석가모니 성불일. 12월 8일.)을 시작으로 소년(설 대청소)이라든가, 설날 전후로 자잘한 행사가 많은 모양이었다. 뭐… 랍팔에는 갖다주는 ‘랍팔죽’ 먹으면 되는 거고 대청소라고 해도 난 청소할 군번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딴 건 내가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었지만 설날 당일은 내가 직접 해야 할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바로, 조상에 대한 제사! 여기 비화곡에서 가장 큰 제사는 비화곡의 조사와 그 후예들인 역대 곡주들의 합동 제사인데 현 곡주의 주도로 치러지는 그 제사가 끝나야 비화곡 주민 전체가 각자 가정의 제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비화곡의 공식 정규 행사로써는 가장 중요도가 높은 행사여서 현재의 곡주에게도 필수적인 의무사항이었다.

근데… 내가 언제 제사를 지내봤어야지. 시골에서 제사 지낼 때 어른들 절하면 그냥 따라 절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던 내가 앞에 나서서 제사를 주도한다…? 그 것도 공식적인 참가 인원이 최소 수 천 명인 대규모 제사를……?

음… 아무래도 날짜 되기 전에 연습이라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귀찮고 부담되지만 대교 생각에 우울해만 하고 있기 보단 뭐든 열심히 하며 지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근데…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도 왜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거지?

“…작년 춘분에는 대교언니의 만두에 동전이 있었잖아. 올해에는… 앗-!”

…늦었다 소령아. 너 또 돌발대사 했어. 무심코 대교 얘기를 꺼냈다가 위아래 자매들에게 눈빛 공격을 받기 시작한 소령이가 자학적으로 혼자 원샷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가 허전한 기분이 된 원인을 더듬어 보았다.

나 때문에 대교가 자매들과 명절을 못 보내게 된 건 당근, 무지 미안한 노릇이지만 그건 이미 몇 번이고 자책했던 분야(?)이고…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또 있었다. 톡!톡!톡~!

“몽몽, 크리스마스가 언제지? 거의 다됐지?”

[ 질문의 요지가…… ]

“양력으로 말야 임마. 서양 명절이잖아.”

[ …주인님 시대의 양력, 정식명칭 태양력(太陽曆)은 B.C 46년 1월 1일 시행된 ‘율리우스력(Julian calendar)’이 시초입니다. 율리우스력의 평균 1년은 365.25일이므로 실제 날짜와의 차가 매년 있게 됩니다. 365.25일 – 365.2422일 = 0.0078일 = 11분 14초. 오차에 대한 예로, 325년의 춘분날은 3월 21일, 1582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재위 1572~1585)의 시대에는 춘분점이 3월 11일이 되었으며…… ]

이 자식, 또 시작이다. 설마 내가 지 말 끊었다고 심술 부리는 건 아니겠지?

[ …1582년 그레고리 13세가 개정한 그레고리력이 주인님 시대에 전 세계에서 가장 폭넓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레고리력의 오차 보정법은…… ]

“됐어, 임마. 그 그레고리력으로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된다는 거만 말해.”

[ 오차 범위 45분 24초 이내로, …1월 9일입니다. ]

“에? 지났,어?”

[ 주인님 시대 종교의 중요 명절인 ‘크리스마스’는 각 시대와 민족 별로 의미하는 날자가 다릅니다. 로마의 태양신 숭배 사상을 바탕으로 한 축제일과 동방교회의 현현일(顯現日)…… ]

“것 두 됐구. 그 중 아직 안 지난 날 있냐?”

[ 없습니다. ]

이 쓰바, XX 같은 로봇이 사람 약올리나. 설날보다는 아무래도 ‘커플의 날’에 어울리는 분위기인 크리스마스에 대교에게 선물이라도 보내주는 이벤트를 가질까 했더니 이미 지났단 말야? 으~ 군대에서도 챙겼던 크리스마스를 여기서 잊고 있었다니……

“…제기, 좋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겠다?”

[ 그레고리력은 로마법에 의해 시행되기 시작한 것입니다만 주인님의 현 위치에서 따를 타당성과 필요성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

“내 말이 그 말이야. 까짓 거, 올해는 음력 크리스마스로 한다.”

[ ……………………………….. ]

그래, 어차피 기분인데 동서양 퓨전 크리스마스면 또 어떻냐…라고 결론을 내리며 몽몽과의 대화를 끝낸 나는 그 사이 조금 침체된 분위기가 되어 버린 자매들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얘들아, 우리 춘분 전에 외국 명절 한 번 즐겨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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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악서생 외전(外傳) >>

◆ 그 때 그들은……?

  • 크리스마스 & 신년 특선…이라고 주장하는 외전(外傳) –
  1. 셋째 소령이의 경우.

극악기원후(極惡起元後) 元年. 12月. 25日.

“언니,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야?”

“응? 내가 뭘?”

곡주님이 계신 창천각을 나와 차갑고 투명한 겨울 바람을 안고 걷던 저는 옆에서 약간 퉁명스런 목소리를 내는 동생 미령이를 무심코 돌아보았습니다. 미령이는 공연히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입을 엽니다.

“나참~ 방금 지나간 창천각의 시비들에게 그렇게 정중하게 인사를 할 건 뭐야? 누가 보면 언니가 아랫사람인 줄 알 거 아냐?”

“그야 그 쪽에서 먼저 인사를 하니까 답례를 한 거지. 그리고 그녀들 중 양자경 부장님은 우리보다 높은 배분이시잖니.”

“에효, 언닌 도대체 우리 신분에 대한 자각이 없으니까.”

미령이는 마치 자기가 언니라도 돼는 양 고개를 세우고 타박입니다.

“아직도 모르겠어? 우린 곡주님의 총애를 받으며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호위무사야. 예전처럼 단순히 비취각 소속의 시비가 아니라구.”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의 공식적인 신분이 어느 정도 배분인지 뚜렷한 것도 아니고……”

“뚜렷하지 않으니까, 우리 스스로 챙겨야 할 거 아니냐!”

미령이가 하도 단호한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전 더 대꾸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본래 제가 말로 미령이를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던 길도 멈춘 채 한동안을 꼼짝없이 미령이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고요.

“언닌 늘 자기 것도 못 찾아 먹곤 하는데, 설사 우리가 곡주님의 정식 호위대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우리에겐 또 하나의 새로운 신분이 있잖아. 바로 비화곡의 총관이신 혈마검호 사부님의 제자라는 거 말야. 에- 그렇게 따지자면 월영당주님과 야후 장로님과도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는 거고, 비취각주님도 여전히 우릴 귀여워 해주시고……”

어쨌든 미령이는 참으로 당찬 아이입니다. 전 아직도 현재의 신분이 실감이 나지 않아 사람들 대하기가 어려운데 미령이는 다르거든요. 언제부터인가 당주님들 정도의 고위 간부들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게 윗사람 행세를 하고 있답니다.

“언니가 겸손한 성격인 건 알지만, 자꾸 그럼 소교 언니나 나까지 함께 얕잡아 보인다구. 사람은 자기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지. 안 그래?”

미령이의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는 역시 쉽게 익숙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의 저에게 붙어있던 정식 호칭은 비취각 소속 2급 시비(侍婢), 백연교(白連翹) 소령, 사실 비취각 내에서도 낮은 배분이었고 그래서 당주님들은커녕 부장급 하위 간부들 앞에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신분이었는걸요.

“…나도 우리 신분이 달라진 건 알아.”

“알기만 하면 뭐해? 예전과 똑같이 행동하면서.”

“아, 아냐. 나도 요전에 확실히 느꼈는 걸.”

“응…? 언제, 어떻게?”

얘기해 봤자 미령이가 또 놀릴 것 같은데… 괜한 말을 꺼냈나 봅니다.

“그거… 달라니까. 그냥 줬어.”

“……?”

“지난번에 곡주님과 대작했을 때 말야.”

“?!?!?”

“실은… 우리 방에 와서 너 잠든 다음, 난 좀 더 술 생각이 나서 주방을 찾아갔거든. 잘 생각 안 나지만… 곡주님 말고 나 혼자 마실 거라고 한 것 같은데 술도 주고 안주도 새로 만들어 줬어. 미령이 너도 들었겠지 만 전에 창천각 주방 음식에 손댔다가 처형된 시비도 있었다잖아. 원칙적으로 주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도 제한되어 있고… 음… 미령아? 왜 그래?”

“그거…야? 달라진 신분을 실감했다는 게?”

“으, 응. 미안해. 이젠 정말 나 혼자 안 마실께.”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미령이가 이렇게까지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을 줄이야. 전 술만 마시면 왜 그렇게 자제가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소교 언니 말대로 주화장창(酒和長蒼)이란 내공법을 익혀야 할까봐요. 그거 극성까지 익히면 술기운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역시 안되겠어. 오늘 내가 시범을 보여 주겠어.”

“무슨 시범…? 너 나보다 술 약하잖아.”

“으이구, 그거 말고. 하여간… 마침 잘 됐네.”

미령이의 말 때문에 새삼 앞을 보니 우리가 서 있는 중앙로의 아래쪽에서 세 명의 사내들이 걸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눈에 뜨였습니다. 한 명은 복장으로 보아 내당(內堂) 소속의 무사인 것 같았지만 다른 두 명… 중년의 장한들은 신분을 알아보기 어렵네요. 간부급 어르신들이 분명한 것 같긴 한데…. 어머…? 그들을 내려다보던 미령이의 얼굴에 살짝 장난기 어린 미소가 스쳐갑니다. 웬지 불안해지는 가운데 미령이가 제 귀에 낮게 속삭였습니다.

“언니, 지금부터 절대 나서지 말고 내가 하는 거 잘 봐, 알겠지?”

제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미령이가 저런 표정일 때는 매우 짓궂은 장난을 친다는 건 알아요. 도대체 미령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1. 막내 미령이의 경우.

극악기원후(極惡起元後) 元年. 12月. 25日.

아아- 소령이 언니는 정말 못 말리겠네. 어쩌면 그렇게 잘도 요점에서 벗어나는지…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서 실감나게 해주는 것이 좋겠어요.

지금 거의 우리가 있는 곳까지 올라온 세 명의 남자들, 내당의 무사 한 명과 그가 안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장한 두 명의 허리춤에 매달린 저 명패는… 음, 외당(外堂)의 고위간부인가 보네요. 과거의 우리 자매였다면 그 앞에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을 신분의 간부가 틀림없고 또 평소 본단에 근무하지 않는 외당 소속이라면 우리 얼굴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야말로 적당한 대상이지 뭐예요.

“응? 이 것 봐라?”

우리 앞에서 걸음을 멈춘 사내들 중 조금 점잖은 인상의 중년인이 약간 표정을 굳히며 그렇게 입을 열었어요. 소령 언니는 벌써 길옆으로 비켜나며 깊숙이 상체를 숙였지만 난 그냥 비스듬히 비켜선 채 가볍게 고개만을 숙였거든요. 두 사람 중 맹수처럼 무시무시한 인상을 가진 흑의의 거한이 먼저 이를 드러내며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어요.

“크흐- 형님. 본단이 높긴 높은 모양입니다. 젖내가 가시지 않은 것들까지도 우리 형제를 무시하는 걸 보니 말입니다.”

오늘 우린 혈랑대에서 험한 훈련을 받고 난 후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상태였고 그래서인지 내당 무사가 조금 늦게 우릴 알아보는 눈치였어요.

“아, 두 분께선 진정하십시오. 저 아가……!”

“더 말하지 말아요!”

난 우리 신분을 밝히려는 내당 무사의 서둘러 입을 막고 난 후, 고의로 목소리를 높였어요.

“흥! 소녀들은 두 분보다 낮은 지위의 무사들이지만, 분명히 두 분께 먼저 인사를 드렸는데 어찌 그리 말씀하시나요?”

내 도전적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쌍의 눈꼬리가 대뜸 치켜 올라갔고 이어 안색도 벌겋게 물들기 시작하네요. 본래 인상도 인상인데다 저렇게 흥분해서 살기를 발산하니 인간 같지도 않게 보여서 솔직히 조금 두려워지고 있었는데, 별안간 한 명이 무서운 공력이 느껴지는 음성을 흘려냅니다.

“우리 섬서이귀(陝西二鬼)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계집이라니… 네 상관을 쳐죽이기 전에 그 입을 먼저 찢어 놓겠다!”

아-! 이 사람들이 섬서이귀? 공식적으로 외당 소속이긴 하지만 무공은 고시리 당주님보다도 강할지 모른다는 말이 있고 흉폭함은 상관마 당주님 못지않다는 그 괴물들이 바로 이 자들이었다니.

“진정하십시오, 형님. 본단에 새로 선발되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인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본좌도 몰라보는 거 보면… 하지만 그래도 용서는 안돼. 계집애야, 내 아우를 봐서 일장에 편안히 죽여주마.”

“어허- 형님. 진정하시라니까요. 그리고 잘 보십시오. 행색은 그래도 바탕이 제법 반반한 계집들인 것 같지 않습니까, 형님.”

“음…? …그렇군. 어째서 이런 애들에게 술잔이 아닌 검을 들게 한 거지? 비취각주가 어느 사이 늙어 눈이 어두워진 모양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이 아이들을 데려가 비취각주의 안목을 넓혀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치이~ 예상보다 거물인데다 기세가 하도 흉악해서 잠시 기가 죽어있었더니 저희들끼리 못하는 말이 없네요. 섬서이귀 중 수귀(獸鬼)는 말 그대로 짐승처럼 탐욕스런 눈빛으로 소령 언니와 날 훑어보더니만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내당 무사에게 고개를 돌렸어요.

“이봐, 자네는 이만 돌아가게.”

“예, 예?”

“흐흐… 여기서부터는 저 아이들의 안내를 받겠다. 나중 저 아이들을 비취각에서 만나면 우당주도 우리 섬서이귀에게 뭐라 하지 못할 게다.”

“그건 불가합니다. 여기 이 아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기 시작하는 내당 무사의 앞을 내가 또 재빨리 가로막았어요. 후훗~ 잠깐 당황했었는데 섬서이귀가 알아서 자기 무덤을 파네요.

“좋아요. 저희가 두 분을 안내해 드릴께요. 어디로 모시면 될까요?”

“흐흐흐~ 그야 네 년들 침상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만… 일단 대청각으로 가자꾸나.”

“그야 어렵지 않지요. 헌데… 저희들은 이미 다른 곳으 로 소속이 정해져있는데 과연 비취각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내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수귀는 여유 있게 웃으며 암귀(巖鬼)를 돌아보았어요.

“험, 우리가 비록 입곡 한 지 얼마 안 되어 올바른 배분을 받지 못한 상태이나, 그 정도 인사권은 발휘할 수 있을게다. 힘들게 하급무사 생활을 하느니 비취각에서 많은 사내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내는 것이 더 낫지 암.”

“흐흐- 그러니 일이 성사되면 너희의 초야는 우리 형제가… 흐흐흐~!”

우~ 하여간 사내들이란……

“은혜를 배풀어 주시겠다는 뜻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문제가 있거든요?”

난 여기서 곡주님 흉내를 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섬서이귀를 빤히 바라보며 씨-이익~ 웃어주었어요.

“우리의 거취를 결정지으려면 그전에 매우 지위가 높은 몇 분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내 말에 섬서이귀의 안색이 동시에 굳어졌고 암귀가 먼저 퉁명스럽게 물었죠.

“지위가 높은 자들? 그게 누구냐?”

“그 중 한 분은 야후 소진광 장로님이에요.”

“응…? 그 분은 살인은 해도 색을 밝히지는 않는 분인데 설마 너희들을 손댔느냐?”

“그럴 리가요. 그 분은 사부님의 장인 어른이신 걸요.”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눈치였지만 아직은 확실히 실감하지 못하는 표정이네요.

“…소장로님의 사위라면 혈마검호 지총관님… 너희들이 그 분의 제자라고 말한 거냐?”

“예, 맞아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지총관께서는 소당주 이후 제자를 받은 일이……”

“있죠. 반 년 쯤 전에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였는데 못 들으셨나요?”

“그건… 너희들이 설마… 이봐, 이 아이들의 말이 사실인가?”

수귀가 좀 더 흔들리는 음성으로 묻자 내당 무사는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어요.

“사실입니다. 저 분이 둘째인 소령님이시고, 이 분은 셋째인 미령님… 두 분다 총관님의 제자이자 곡주님 명령으로 최근 신설된 곡주님 호위 전문의 비연대(飛燕隊) 수석무사(首席武士)이십니다.”

이미 조금 전까지의 험상궂은 표정이 말끔하게 사라진 섬서이귀 앞에서 전 계속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었어요.

“어쩌죠? 저흰 본래 비취각 출신인데 두 분이 돌려보내는 걸 원하신다고 전해드릴까요? 곡,주,님,께.”

싸아악-! 하고 소리가 들리는 착각을 할 정도였어요. 핏기 가시는 소리 말이에요.

“음… 소녀의 침상에 오르고 싶으시다 하신 분이 수귀님 이셨던가요?”

어머, 신기해라. 순식간에 저렇게 얼굴 가득 식은땀이 맺히다니.

“그, 그건 그저 농으로… 게, 게다가 모르고 그런 것일세.”

“맞네. 아우가 설마 알고도 망발을 했을까. 허허허~ 진작에 말을 하지 그랬나. 어찌 그리 짓궂으신가 그래.”

훗-! 입장이 바뀌니까 웃음소리와 말투까지 바뀌었네요.

“이, 이보게… 그게… 이런 사소한 일로 굳이 곡주의 심기를 어지럽힐 건 또 뭔가. 우리가 사과할 테니 용서해 주고 잊어 주시게나.”

와아~! 만세, 만세!

섬서이귀 정도의 인물들에게 먼저 시비를 걸고도 오히려 사과를 받을 수 있다니 너무 신나요. 사실 소령 언니에게 시범을 보인다고는 했지만 내심 부담도 컸었거든요. 후후~ 봤지, 소령 언니. 저런 거물들도 이젠 우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걸. 그러니 이제 언니도 좀 더 당당하게……

“미령아, 이제 그만해라.”

응?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언니가 갑자기 왜 이렇게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나서지?

“두 분은 우릴 몰라서 실수하신 것뿐인데 넌 너무 못 되게 구는구나.”

흥, 다 누구 때문에 그런 건지나 아는 거야, 언니?

“전 신설 비연대(飛燕隊) 소속 수석무사 소령입니다. 두 분의 말씀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본의 아니게 저희가 두 분의 걸음을 지체시켰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령 언니의 정중한 태도와 말투에 섬서이귀의 표정이 밝아집니다. 나처럼 못된 여자에게 당하다가 언니를 대하니 선녀라도 만난 기분인가 봐요.

“껄껄껄! 한 아가씨는 재기 발랄하고 한 아가씨는 예의가 바르니 더욱 조화롭구려. 좋소이다. 정말 좋소이다.”

흠… 오히려 더 존대하는 섬서이귀의 반응을 보니

소령 언니의 예의바른 태도에 오늘 일의 수습을 맡기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어요. 언니에게 오래 말을 시키는 게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정말 고맙네. 허허허~ 우린 자네만 믿겠네.”

“별말씀을… 곡주님께선 알려진 것보다 이해심이 많으시고 현명하십니다. 설령 두 분이 미령이의 입을 찢고 곡주님을 쳐죽인다고 하는 실언을 했다 하나 그 전후 사정을 들으시면 어찌 화를 내시겠습니까.”

…역시!

“저희 침상에 대해 언급하신 것도 곡주님을 쳐죽인다고 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의 실언일 뿐이므로…….”

“잠깐!”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섬서이귀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어요. 하지만… 수습이 될까 모르겠네요.

“지금 우릴 놀리는 건가? 결국 곡주께 전부 고하겠다는 말 아닌가.”

“예? 곡주님께 오해받지 않기를 원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 그야 그렇지만… 그 전에 곡주께 아무 말도 드리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하지만 물어보시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대체 곡주께서 어떻게 알고 먼저 물어보시겠는가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면 되지.”

“저희 자매끼리 있을 때 있었던 일을 종종 묻곤 하시는데 어떻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의 틀림도 없이 말씀드려 곡주님이 두 분을 오해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차츰 소령 언니의 무서움을 깨닫고 다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섬서이귀에게 언니는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직접 곡주님을 해친다고 하신 건 아니었죠? 미령이 상관을 쳐죽인다고 했으니까 음… 미령이는 지금 비연대 소속이고 현재 비연대 대장은 소교 언니인데… 그러니까 소교 언니를 쳐죽인다 는 말이었군요. 곡주님께 불경한 말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곡주님은 소교 언니를 무척 아끼시니까 언니를 쳐죽인다고 하면 굉장히 노하실 거예요. 어, 알아요. 두 분은 그냥 농으로… 아, 실언이었나요? 그리고… 몰라서 그러신 거잖아요. 알고도 곡주님 앞에서 소교 언니를 쳐죽인다고 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예…? 곡주님 앞에서…라는 말 안 하셨다고요? 맞아요. 착각해 서 죄송해요. 음… 그럼 그냥 소교 언니를 쳐죽이겠다 고 하신 건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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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악서생 외전(外傳) >>

◆ 그 때 그들은……?

  • 크리스마스 & 신년 특선…이라고 주장하는 외전(外 傳) –
  1. 둘째 소교의 경우.

극악기원후(極惡起元後) 元年. 12月. 25日.

대청각에서 섬서이귀님들의 보고를 듣고 곡주님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셨어요.

“소장로가 내게 선물을…? 그 양반이 웬일이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 리도 없는데 말이야.”

“그, 글쎄요. 저희들은 그저 장로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이라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대답을 하는 섬서이귀 중의 한 명인 ‘암귀’님의 음성은 어쩐지 조금 불안정한 느낌이 드네요. 섬서이귀님들이라면 과거 20여 년 동안 섬서지방을 종횡하며 화산파와 종남파를 상대로 위명을 떨치고 있는 무서운 고수들이지만 역시 곡주님 앞에서는 긴장을 숨길 수 없나 봅니다.

“소장로가 섬서이귀 정도의 인물들을 통해 보낸 선물이라… 뭔지 궁금하구먼.”

“그, 그게… 저……”

이상하네요. 왜 저 두 분이 저렇게 망설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걸까요?

“왜 그래? 먹는 건데 오다가 둘이서 먹어 치우기라도 한 거야?”

“다, 당치않습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실은,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 호오~ 소장로가 어디서 귀한 인재를 발견한 모양이로군.”

“그게 아니라… 저어~ 그게……”

정말 이상하네요. 섬서이귀님들 정도의 분들이 왜 저렇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요? 더구나 곡주님께서는 지금 두 분에게 농을 하실 정도로 기분이 좋으신데 말이죠.

“흥-! 알겠어요. 여자로군요. 그 것도 아주 빼어난 미녀가 틀림없어요.”

갑자기 뾰족한 음성으로 나선 것은 미령이었습니다.

섬서이귀님들의 표정으로 보아 미령이의 말이 맞는 것 같긴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뭐야. 정말 그래? 소장로가 내게 여자를 선물한 거야?”

“…예, 그러합니다. 현재 내당에서 검열 중이라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만……”

미령이는 또 대화에 끼어 들려는 기색을 보였고 전 재빨리 제 귀걸이를 미령이에게 날려보냈어요. 귀걸이에 이마를 맞은 미령이가 입을 삐죽였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지요. 곡주님이 아무리 잘 대해 준다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버릇이 없으니 참 큰일이에요.

“풋…! 흠, 흐음. 지금 내게 여자는 별로 필요 없는 데… 소장로가 날 곤란하게 하는구먼.”

곡주님께서는 정말로 곤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셨고 암귀님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뭔가 생각을 한 연후에야 다시 입을 여셨어요.

“사실 그 여인은 미녀가 아니라, 매우 이상하고도 특별합니다. 분명 중원인은 아니고 서역(西域)인도 아닌 듯합니다. 피부가 마치 시체처럼 창백하며 불길한 청안(靑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머리카락이 감귤(柑橘) 속에 물든 것처럼 보이니 어쩌면 사람 형상의 요괴가 아닌가 합니다.”

“…뭐야? 금발의 백인이란 말이잖아?”

어머…? 곡주님이 갑자기 몹시 흥분하신 듯 음성이 높아지셨어요. 세상에, 여자 요괴라니! 소장로님은 어떻게 그런 걸 잡아 바칠 생각을 다하셨을까요?

“아하핫-! 이거야 원. 미령아, 아래 연락해서 그 여자는 검열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그냥 여기로 데려오라고 해. 어서!”

곡주님이 매우 흥미로워 하시자 비로소 섬서이귀님들의 안색이 조금 밝아집니다. 저도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요괴라니까 어쩐지 두려움이 앞서네요.

곡주님께서 섬서이귀님들을 통해 소장로님이 요괴를 생포할 당시의 상황을 들으시며 얼마 지났을 때… 내당의 무사 두 명이 문제의 여자 요괴를 앞세우고 대청각에 들어섰습니다. 아~! 과연 전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모습의 요괴였습니다. 헌데… 어찌된 일일까요? 제 눈에는 저 요괴가 그리 흉측하다거나 무섭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물론, 얼음처럼 시린 빛깔의 눈동자가 조금 섬뜩했고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따로 놓고 보니 너무나 이질적이고 징그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눈처럼 흰 피부는 암귀님 표현과 달리 너무나 정갈하고 곱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더구나 눈부신 황금빛 머릿결이 질투가 날 정도로 흰 피부를 조화롭게 감싸주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경탄케하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어요. 아! 계속 겁을 먹은 표정으로 말이 없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려고 해요. 저 아름다운 요괴의 말소리는 또 얼마나 신비로울지……

“…후, 후아유? 유어 캡틴? 헤이~ 마이 네임이즈 세라, 세라 코너, 캔 유 헬프 미? 헤이~ 헬프 미~!”

…기대만은 못하네요. 게다가 사람의 말을 할 줄 모르나 봅니다. 헌데 그 때까지 말없이 특유의 감미로운 미소만을 머금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계시던 곡주님께서 낮게 중얼거리셨어요.

“…헬프 미 몽몽……!”

오오~ 역시 곡주님이십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저 미녀 요괴의 입에서 나온 소리와 비슷한 발음인 것으로 보아 곡주님께서는 ‘요괴들의 언어’에도 정통한 모양이에요.

“#$@#!!%@!!#%%?#%%!!!!!”

“#$@#??%@???#%%??!#%%!!!!!”

미녀 요괴와 곡주님의 알 수 없는 대화는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당연히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미녀 요괴의 표정과 말투로 보아 전 후 사정을 토로하고 그리고 뭔가 선처를 호소하는 것 같았습니다. 곡주님은 간간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시며 얘기를 들으셨지만 결국엔 상황을 모두 파악하셨는지 한참을 껄껄대고 웃으셨어요. 곡주님이 미녀 요괴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하시자 미령이는 불편한 심기를 얼굴에 드러냈고 그래서 저는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지요. 헌데, 그녀에 대한 곡주님의 처리는 매우 뜻밖이었습니다. 그 미녀 요괴를 즉시 곡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외당으로 하여금 그녀를 호위하여 가고 싶은 곳까지 보내주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밤… 곡주님은 제게 물으셨습니다.

“너, 아까 그 여자가 어디서 온 사람인 줄 아니?”

“전 그저 요괴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곡주님께서 사람이라 하시니 그렇겠지만 정말 신기합니다. 그리 생긴 종족이 있었다니……”

“음… 소교야, 내가 오늘이 어떤 날인가는 얘기해 줬었지?”

“예, 성탄절(聖誕節)이라고… 본래는 저희가 모르는 다른 나라의 성스러운 인물이 탄생한 날을 기리는 명절이라고 하셨습니다. 멀리 헤어진 사랑하는 연인들이 선물을 주고받으며 애정을 확인하는 애틋한 풍습이 있는 날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맞아. 뭐, 본래 의미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긴 했지 만… 암튼 그래서 준비한 선물을 그 누군가가 오늘 받도록 보냈었던 거 알지?”

후후… 맞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곡주님께서 마봉후의 후인인 마봉낭자에게 강호 출도 축하 선물을 보냈다고 알겠지만 실은 그런 사연이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전 이미 느끼고 있답니다. 곡주께서 굳이 생소한 명절에 의미를 두신 것은 오직 대교 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실은 말이야. 아까 그 백인여자가 성탄절을 명절로
지내는 나라에서 온 거야. 그들의 명절을 지내기로 한
이상 그 명절의 의미대로 잘 대해줘야 할 것 같아서
특별히 친절을 베푼 거지 뭐.”

“과연 그랬었군요. 그리고 백인(白人)이라… 전 한참
을 생각해서 혹시 천요괴사(天妖怪史)에 실려있는 색
목인(色目人)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본래는 백인이었
군요.”

정말이지 곡주님의 지혜는 어디가 한계일까요? 뱃사람들도
잘 모른다는 대해(大海) 너머의 나라와 사람들에 대한 것까지
정통하시니… 비화곡을 이끌 수 있는 분은 이분뿐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늘밤은 곡주님께서 잠든 방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간이 전혀 지루할 것 같지 않습니다.
대교언니가 오늘 곡주님의 선물을 받고 얼마나 기뻐했을
지를 생각하면 저 역시 너무나 행복해지니까 말이에요.
하지만… 역시 조금 부러워요. 소교도 누군가에게 언니만큼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제 운명 속에 그런 사랑이 새겨져
있기는 한 걸까요? 아~ 불연 듯 곡주님께서 얼마 전
가르쳐 주신 시조가 한 수 생각이나요.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두 사람이 만드는 걸……
어느 세월에~ 너와 내가 만나~ 점하나를 찍을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극악기원후(極惡起元後) 1년. 1월. 1일.

이 곳 비화곡에 온 후 첫 번째 맞는 새해… 에구구… 피곤하다
피곤해. 어제 제석(除夕, 섣달그믐)부터 지금까지 만 이틀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자고 보낸 빡센 일정 때문에 지금 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이다. 사실 여기로 날라 오기 전에도 시골 고향에
내려가려 하면 우선 전쟁에 비견될 정도로 살벌한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설날이 그렇게 반갑게 느껴지지만은 않았었다.

“10여 장 거리 가는데 반나절이군. 썅! 본단에선 비화
고속도로 운영을 어떻게 하는 거야? 그리고 모야~! 대형
가마 전용 가마선으로 얌체 운행하는 저 XX는! 어랏!
비상시에 이용하게 되어있는 길로 달리는 싸가지 없는
가마들도 있네? 으~ 이런 시러배 자식들이 빡돌게 하네!
갓길에 압정을 확 뿌려 버려?”

여기 비화곡에서는 물론 위와 같은 식으로 길바닥에 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전 비화곡이 공동으로
지내는 대규모 제사를 내가 주도하여 치르는 것도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길고 긴 제문(祭文) 낭독은 몽몽으로
컨닝했기 때문에 원판처럼 나도 별로 안 어려웠고(원판은
진짜 외워서 했다고 한다.) 다른 과정들도 미리 ‘가상 공간’에서
열심히 연습한 덕에 별다른 실수는 없었던 것 같다. 문제는
역대 비화곡주들의 업적을 일일이 열거한다던가 하는 쓰잘대기
없는 과정들이 많아서 발생한 긴 제사 시간 때문에 오전부터
녹초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내년에는 줄일 수 있는
과정은 최대한 줄이거나 없애는 등 제사를 좀 간소화하는
방안을 생각해 봐야겠다. 그렇게 제사는 그럭저럭 끝냈어도
우리 한국의 설날처럼 제사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도대체 내가 미리 그렇게 추리라고 지시를 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뭔 놈의 세배객들이
그리 많은지… 게다가 아무리 내 현재 신분이 이 곳의
짱이라고 해도 그렇지, 환갑 진갑까지 예전에 지난 노인네들까지
내게 세배를 드리러 오는데 아주 미치는 줄 알았다. 내게
세배하고는 내가 주는 세뱃돈까지 챙겨가는 노인네들을
보고 있자니 웬지 내가 팍삭 늙어 버린 기분이 들어 영
껄끄러웠던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도 며칠은 더 세배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을 거라고 한다. 오늘 본단이 대충
끝났으나 내일부터는 각 행정구역(?)의 주요 인물들부터
시작해서 강호 각지의 듣도 보도 못한 사마외도인들까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니… 제기, 그 사이 컨디션이 많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이 무서운 세배 공격(?)에 내일은커녕
오늘도 못 견디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한 달 전보다 내 육체적, 정신적 컨디션이 많이 좋아
졌던 건 물론, 간접적이나마 대교와 크리스마스를 보
냈다는 흐뭇함과 ‘세라 코너’라는 금발 아가씨를 도와
준 뿌듯함 때문일 것이다.

암튼 지금은 피곤해서 어서 침상으로 가고 싶긴 한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지금 잠드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세계로 날려온 이래 처음 맞는 새해라서 감상적인 기
분이 되어있는 것도 이유겠지만 실은 지난 크리스마스
에 얽힌 사건들을 생각하면 어이없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그래서 자꾸만 그 생각이 나는 것이다.

우선 ‘세라 코너’. 이 금발 미녀는 ‘잉글랜드’ 즉 영
국인 모양이던데 그리 오래 얘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머나먼 중원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듣지를 못했다. 내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자 헤어진 아버지와
빨리 만나야 한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서둘러 보내게 되었고 그 것이 지금은 조금 아쉽기도 하다.
얼결에 그냥 보냈다고는 해도 사실 그 때의 내 주관
심사는 그녀의 모험담(지금 생각하면 굉장했을 것이라
짐작되는)이 아니었다.

야후 장로 덕분에 이 시대에 백마를 다 타보는구나…
따위의 말초적인 관심은 당근, 아니고… 웬 무서운
무리(노예 상인들로 추정.)들에게 납치되어 가던
그녀를 구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야후 장로(결코
정의의 사도일 리가 없는 인물이 아닌가.)였다는 것과
그녀가 야후 장로를 부르는 호칭이 하도 엉뚱해서
그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세인트 크로스!
세라 코너는 야후 장로를 크로스라는 이름의 성자(聖
者)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막가파 노인네를 보고
성자라니… 납치되었을 때 무슨 이상한 약이나 하여간
못 먹을 거 먹은 거 아닌가 싶어 캐물었더니만…
약 먹은 게 맞는 것 같았다.

한동안 또 싸돌아다니다가 어제 곡에 복귀한 야후
장로의 보고 내용과 세라 코너의 증언을 심층 분석한
나는 대충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유추해 낼 수 있었
다.

때는 약 일주일 전, 장소는 비화곡 인근 지역.(말이
인근이지 도보로는 며칠 거리.)
장명 사건을 자기가 벌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그 날도 세 명의 제자들을 대동하고 놀러 나갔다는
우리의 야후 장로… 근처 외당 지부에 들렀다가 만난
후배들, 섬서이귀와 어울려 한 잔 거나하게 걸친다.

음핫핫- 좋구먼~!을 외치며 경관 좋은 장소를 찾아
팔자 좋게 어슬렁거리던 그들은 마침 그 근처를 지나던
한 무리의 사내들과 맞닥트리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세라 코너를 납치해가던 인신매매단이었던 것이다.
신기한 용모라 비싸게 팔릴 것이라 예상되는 세라
코너를 포함한 다수의 처자들을 확보한 기쁨에 젖은
상태의 그들은 팔아먹기 전에 먼저 시식(?) 하려는
욕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찾은 한적한 장소에서
왠 노친네 하나와 중년 사내 둘, 별로 안 쎄 보이는
젊은 놈 세 명으로 구성된 자들이 시비를 걸어왔으니
건장한 사내 수십 명으로 구성된 놈들이 참았을 리가
만무하다.

야장(야후 장로) : 짜식들, 귀엽게 노는구먼~! 두 아우들도
소싯적에는 저런 짓 꽤나 했지 아마~!

섬서이귀 : 흐흐- 장로님도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소싯적이 아니라 지금도 종종 그럽니다.

인신매매일동 : 뭐냐 저 것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야장 : 껄껄껄- 아우들의 젊음이 부럽구먼. 난 70을
넘긴 후로 영 옛날 같지가 않다네. 허허~ 나도 저 아
그들처럼 젊은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야.

인신매매일동 : 쓰파~! 쳐라~! 치고 먹자(?)~!

우- 떼로 몰려가 덤벼드는 인신매매일동… 약 5분쯤
후 전멸. 허무한 상황 종료.(물론 야후 장로는 자기가
직접 손대어 죽인 일은 없다고 주장했다.)
술김에 별 생각 없이 애꿎은(?) 인신매매업 종사자
수십 명의 생명을 아작 낸 야후 장로 일행은 방금
뭔 일이 있었던가, 하는 뻔뻔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야후 장로 제자 중 한 명(막내
전책으로 추정.)이 사건 현장 근처의 수풀 속에서
신음 중인 문제의 여인 세라 코너를 발견, 사부에게
보고하게 되는 것이다.

반항이 심했었는지 인신매매일동 중 한 명에 의해
어떤 약물을 억지로 복용당한 상태로 비몽사몽 헤매고
있던 세라 코너… 그녀는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을 납치해 온 악마 같은 사내들을 새로이
등장한 어떤 사람들이 모두 해치워 버리는 기적을
보게 된다.

그녀의 눈에 악마를 징벌하는 천사 군단쯤으로 보이던
인물들 중에서 단연 뛰어난 풍모의 한 노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야후 장로였다.

외견상, 희고 풍성한 수염이 잘 어울리는 인자한 인상에
넉넉해 보이는 풍채, 연세에 맞지 않는 환상적인 몸놀림…
이 때 세라 코너에게 야후 장로는 수염 좀 더 기르고
한복으로 갈아입은 KFC 노인 정도의 좋은 인상을 주었고
그들 사이에 이루어진 만남은 이렇게 진행된다.

사라 : (몽롱한 정신으로 쓰러져 있는 상태에서 야
후 장로를 올려다보며) 오~ 이 분은… 세인트(성자,聖
者)이신가…? 날 악마들로부터 구해주러 오신 위대한
세인트… 오, 세인트… 세인트……!

야장 :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내려다보다 문득 신기해하며.)
아우님들, 이거 아무래도 말로만 듣던 색목인인 모양인데
직접 보니 거 아주 묘~한 걸?

사라 : 세인트… 유 어 네임……

야장 : 근데(可是, 중국어 발음으로, 커~쓰)… 뭐라고
하는 거야? 이거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없어?

사라 : 유 어 네임… 크로스(‘커-쓰’를 잘 못 들음.)…?
오오… 세인트 크로스… 탱큐, 세인트 크로스……!

야장 : 흠… 좀 이상하긴 해도 가만 보면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군. 마침 잘됐다. 곡에 빈손으로 돌아가기
도 뭣했는데… 흠하하핫-!

기분이 좋아진 야후 장로는 배를 내밀며 흐뭇하게 웃어 제낀다.

그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과 웃음소리, 흰색과 붉은 색이 어우러진 복장을 인상깊게 기억한 상태에서 세라 코너는 결국 기절하고 만다.

야후 장로의 수염과 머릿결, 의복은 본래 모두 흰색이었으나 인신매매일동의 피가 잔득 묻어 그런 멋진(?) 붉은 색으로 물든 거라는 진실을 모른 체…

그 후 술이 좀 깨자 야후 장로는 좀더 놀다 들어가려 하고 섬서이귀들에게 대신 심부름을 시켜 세라 코너를 내게 보냈던 것인데… 뭐, 직접 보지 않은 이상 모두 정확하게 재현된 건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세라 코너가 끝까지 야후 장로를 ‘세인트 크로스’로 알고 떠났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세인트 크로스… 흰 수염과 머리… 붉은 옷의(실은 피투성이의) 노인… 훗-! 혹시 야후 장로가 ‘산타 크로스’의 원조? 후후… 설마…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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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그들은……?

  • 크리스마스 & 신년 특선…이라고 주장하는 외전(外 傳) –

5-2. 진유준 본인의 경우.

극악기원후(極惡起元後) 元年. 12月. 12日.

피에 물든 ‘야후 크로스’도 썰렁했지만, ‘오해’에 의한 사건은 또 있었다.

난 크리스마스(비록 음력 크리스마스지만.)에 맞추어 대교에게 도착되도록 새로 확보한 영약과 구령옥(鳩靈玉)이라는 이름의 홍옥(紅玉, 루비)을 선물로 보냈는데 그 때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도 그녀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었다.

그 말의 의미는 나중에 대교와 다시 만났을 때 기분 좋게 설명해 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꼭 설명을 해주어야 할지 어떨지 고민 중이다.

보내고 나서 결과에 대한 연락이 어째 좀 늦다 싶더니만, 바로 그저께가 되어서야 도착한 결과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 …곡주님의 선물과 전언은 지시된 날짜에 무사히 전달되었습니다. 곡주님의 전언에 따라 곡주님이 예견하신 불상사는 무난히 해결되었으며 마봉낭자 대유화님과 저희 호위대는 천기를 헤아리는 곡주님의 신기에 새삼 경탄함과 동시에 가슴 벅찬 존경의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습니다. >

뜬금 없이 무슨 골방에서 도깨비 날콩 까먹는 소린가 했더니만… 보고서를 마저 읽어보니, 내가 대교에게 보낸 전언, ‘메리 크리스마스’가 바로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영어나 한글로 써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특별히 내 말을 전달자의 입을 통해 말로써 전달하라고 했었는데… 그걸 지시할 때 정작 몽몽에게는 미리 ‘이건 영어발음 그대로 의미를 담아야 하는 말이니까 해석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 내 실수라면 실수였던 것이다.

그리 하야~ 내 전언은 중국어 발음으로 전달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약간 변질되어 ‘매리 구리수마수’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내게 뜻하지 않게 선물을 받고 기뻐하던 대교.

행복한 마음(그랬길 바란다.)으로 미소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선물과 함께 전해진 ‘매리 구리수마수’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우편배달사고(?)라는 건 생각도 못한 우리 대교…

‘위대하고 또 위대한 우리 곡주님께서 설마 의미 없는 말을 전하셨겠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가득한 대교는 오래도록 ‘매리 구리수마수’라는 말의 해석에 골몰하게 되고…

결국 지나친(?) 영특함으로 대교는 이렇게 해답을 냈던 것이다.

매리(罵) 구리수마수(龜鯉水魔獸).

해석을 끝내자마자 급히 자기 호위대의 짱을 부르는 대교.

“이봐, 전위대 대장. 저 앞의 소요강(逍遙江)에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인(怪人)들이 출몰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알고 있는가?”

“…예, 그런 전설을 들은 바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수십 년도 전에 소림사에서 파견 나온 고수들에 의해 모두 전멸 당하여 이후 출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 그래, 역시! 비록 사라졌다고는 하나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괴인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느꼈던 두려움 때문에 구리(龜鯉) 혹은 수마수(水魔獸)라고 불리웠던 그 괴인들이 바로 여기 있었단 말이지……?”

회심의 미소를 지은 대교는 전 호위대에게 지시를 내려 미리 대비를 하게 했는데… 어찌 된 건지 구리 혹은 수마수라는 괴인들이 정말로 부활해 있었고(마치 누가 시킨 것처럼! 때마침!) 소요강의 물 속에서 기습으로 대교 일행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재수도 지지리 없는 괴인들의 매복을 일찌감치 파악하는데 성공한 대교는 ‘몇 천리 밖의 일까지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곡주님’에 대한 존경심을 새삼 다지며 힘차게 공격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전 부대~ 매리 구리수마수~!(전 부대, 구리, 수마수를 혼내 줘라!)”

생각할수록 연말 결산에서 ‘잘 처리한 일’로 정리하기도 민망한 사건들이다. 여하튼 결과가 좋으니 역시 난 내가 출연한 소설의 작가나 영화의 감독… 그보다 조금 현실적으로 하면, ‘운명의 여신’… 정도의 존재들이 ‘주인공’으로 강력히 밀어 주는 캐릭터란 말인가?

물론…! 나도 새해부터 이런 생각으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역시 이번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일들은 너무 우연과 기연의 연속이지 않은가.

“뭐, 좋수다. 내 운명의 조정자여-! 댁이 소설작가든 영화 감독이든 아무래도 좋고, 장르가 무협지든 SF든 환타지든 상관없으니까 말이야, 부디 누구나 가볍게 심심풀이로 읽을 수 있는 대중 오락물이었으면 좋겠소.

그렇다면 설마 그런 스토리에서 주인공인 나를 죽인다는거나 그에 준하는 비극을 당하게 하진 않겠지? 안 그렇수?”

…으이구~! 하늘에 대고 비는 새해 소망을 고작 이런 미친 소리로 때우다니, 유준아~ 진유준아~ 정신 좀 차리자 정신.

그래… 역시 난 지금 너무 피곤한 상태인 모양이야. 자자, 얼른 가서 자자!

“크-핫!핫!핫!핫!핫!핫!핫!핫!”

생각 정리하기 무섭게 어디선가 들려오는 진짜 미친 사람 같은 느낌의 웃음소리… 또 뭐냐, 이건.

“크학!핫!핫!핫!핫!핫! 그랬었구나-! 역시 그랬었다-!”

…야후 노친네…? 이젠 산타 크로스의 원조일지도 모르게 된(?) 그 막가파 노친네 음성 맞지?

[ 야황살후 소진광의 음성과 94.3% 일치합니다. 파산(破散)성이 강한 에너지가 내포되어 진원지 추정이 어렵습니다. 근접 추정 방향은…… ]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야후 장로의 처소 방향이로군. 근데 새해부터, 그 것도 오밤중에 비화곡 전체가 울릴 정도로의 요란한 웃음소리라니, 노망이라도 났나?

“…하하하하하~! 곡주~ 고맙소이다~ 진정 감사하오이다아~!”

미치겠네. 또 나야?

“10년~! 10년이었소이다~! 그 막막함~! 그 허망함~! 곡주의 한 말씀~ 그 말씀 덕에 끝냈소이다~”

내 말씀…? 내가 댁에게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요 사이 야후 장로에게 특별한 의미의 말을 한 일 없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에…? 가만… 설마 오늘 새벽에 내가 무심코 한 그 말… 그 말이 또 무슨 사고 친 건가?

“해~피~누~이~어~”

역…시 그거였군.

오늘 새벽 야후 장로는 내게 세배하러 와서 나와 몇 마디 덕담을 나누다가, 자신이 오래 전부터 연구해 오던 어떤 무공이 10년 정도 전부터 막혀 올해는 꼭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었다.

여하튼 세라 코너를 구한 공을 새운 대다가 그 연세에도 무공에 대한 정열이 놀라운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새삼 기분 좋게 야후 장로를 대하다가, 돌아가는 야후 장로에게 무심결에 ‘해피 뉴이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체 야후 장로는 그 말을 어떤 한자로 해석해서 자기의 무공 연구에 써먹은 걸까?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엔 별거 아닌 일을 계기로도 한 순간의 깨달음을 얻어 무공의 발전을 이룬다는 얘기는 들어 봤지만 도대체 영어 새해 인사로 무슨… 에효~ 모르겠다 모르겠어. 매리 구리수마수도 있는 판국에 더 따져 무엇하리!

어쨌든 결과가 다 좋은 상황이니 좋은 쪽으로 마무리짓도록 하자.

그래… 올해는 운이라도 좋게 따라주어서 나와 내 주변 사람들도 모두 희망찬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 이제야 그나마 정상적인 새해 희망을 빈 기분이 든다. 대교야, 해피 뉴 이어~!

“해~피~누~이~어~”

그래요, 영감님도 해피 뉴이어!

비화곡 사람들 모두, 모두~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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